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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悅話 第30號》(2016.11.30. 眞城李氏大宗會 刊) 蒐錄]
도산서원에서 행신과 범절
이동구(도산서원 별유사)
dongg49@hanmail.net
1. 시작하면서
서원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그 선현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며 착한 사람으로 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곳이다. 위패는 곧 선현의 자리이다. 즉 선현이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어른 앞에 예의를 깍듯이 차리듯이 서원에서도 행신과 범절을 엄격히 지켜왔다. 행신과 범절은 하루아침에 정하여 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선비들의 질서와 선현에 대한 존경심과 개인들의 경험을 통하여 규율되면서 시행되어 왔다.
각 가정마다 예의와 범절이 조금씩 다르듯이 서원에도 서원마다 약간씩 다르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특히 도산서원은 만세의 사표(師表)이신 퇴계선생을 모신 서원으로서 자긍심과 더불어 예의와 범절을 엄격히 이어오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근대교육제도가 도입되고 산업사회로 발전되면서 유교교육의 가치가 무너졌다. 서원에도 양사(養士 : 교육)는 없어지고 존현(尊賢 : 제향)만 겨우 이어지면서 선현을 받드는 예의와 질서와 수양을 위한 범절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산서원은 양사(養士 : 교육)를 부활하여 선비문화수련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사당에 여성출입을 허용하고 제향시각을 낮으로 변경하는 등 변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이 서원의 모든 예의와 범절이 없어진 듯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버릴 수가 없다. 더욱이 작금에 일어나는 사회현상도 도덕적 사회구현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어 서원의 역할이 가일층 필요하다.
2. 서원에는 가르침 주신 선현을 모신다.
가묘는 생명을 주신 조상을 자손이 모신다. 불천위의 경우 신주의 맨 위쪽에 ‘몇 대 선조(顯〇〇代祖考 또는 顯先祖考)’, 다음에 ‘관직(官職)과 증직(贈職), 시호(諡號) 부군신주(府君神主)’라고 쓰여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다 작은 글씨로 ‘제사를 누가 받든다(孝〇〇代孫 奉 祀)’라고 기록한다. 신주의 규격도 일정하고 축문도 정해진 문구에 조상과 받드는 자손만 기록하면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장손(長孫)이 모시고 불천위를 제외하고는 모시는 대수가 끝나면[4대 까지] 더 받들지 않는다. 제물도 자손들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과일을 올린다. 종부가 아헌으로 잔을 드리기도 한다. 초헌은 주로 종손으로 자손을 대표하고, 아헌은 종부로 며느리들을 대표하고, 종헌은 촌수가 가장 먼 제관[주로 사위 또는 외손 자손]으로 손님을 대표하여 잔을 올린다고 한다. 가묘에 모인 제관은 혈연적 관계로 자손으로서 고마움을 아뢰고 자손들 사이에 우애를 다지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이 모신다. 위패의 규격도 쓰여진 문구도 정해져 있지 않다. 축문도 서원마다 다르다. 받드는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제물 또한 날것으로 바로 먹을 수 없다. 누가 헌관을 하여야 한다고 정하여져 있지 않고 행사[향사 등]때 마다 후학들이 의논으로 선임한다.
최근에 여성이 서원의례에 참여하는 사례가 있으나 과거에는 여성은 서원의례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남존여비 사상에서 여성을 배제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서원에는 본래 남성들이 혈기왕성한 20대부터 모여서 학문과 인격을 수련하는 장소로서 마땅히 여성의 출입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수녀원에 남성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의례에도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많은 향교와 서원에 여성의 참례를 제한하지 않고 있는 추세이다.
도산서원에도 임진(2012)년 춘향에 외국인이면서 여성이 헌관으로 참례하였다. 도산서원 유사 이래 외국인으로도 헌관참례가 처음이지만, 여성이 헌관으로 참례한 것도 처음이다.
서원에서의 의식(儀式)은 가르침을 주신 선현께 감사를 드리고, 선현의 학문과 사상을 익혀서 스스로의 수양과 발전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다.
가묘와 서원의 의절이 확연히 다르다. 가묘에는 기제사와 계절마다 명절날에 시사(時祀)를 모시고, 서원에는 봄과 가을에 모시는 향사와 매월 삭망(朔望)에 향알을 모신다. 가묘에는 행사마다 제물을 차리지만, 서원에서는 향사이외에는 제물을 차리지 않았다. 가묘에 모인 제관은 혈연적(血緣的) 관계이나 서원은 학연적(學緣的) 관계이다.
3. 서원에서는 모신 선현에 결례가 없어야 한다.
서원은 선현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익혀서 개인의 인격을 도야하여 성인(聖人)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곳이다. 선현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셨지만 선현께서 살아계시는 듯 출입하는 선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어른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거기에다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따르려는 스승께서 앞에 계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까? 이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건방을 떨지 못하고 최대한의 공손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약관에 도산서원에 방문한 박정희대통령이 정문계단에 발을 딛기 전에 안쪽을 바라보며 양복의 깃을 여미고 발을 세 번 굴러서 먼지를 터는 것을 봤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지만 선현(先賢)을 모신 서원에 들어감에 있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자세를 가다듬은 것이다. 이러한 행동과 마음가짐이 곧 선현을 뵙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서원에 가야할 일정이 정해지면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가지런히 하여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로지 모셔진 선현의 언행과 사상을 따르고자 하는 생각만 하여야 한다. 나쁘고 험한 꼴은 보지도 말고 흥정을 하여야할 거래는 다음으로 미루고 남의 집 문상이나 제사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재계(齋戒)라고 한다.《예기(禮記)》〈교특생(郊特生)〉편에 ‘군자는 3일간 재계하면 반드시 모시려는 선현 또는 조상을 뵐 수 있다[君子三日齊 必見其所祭者]’라고 하였다. 재계는 산재(散齋)와 치재(致齋)로 구분하는데 산재는 집에 있을 때이고, 치재는 서원에서 재계이다. 옛날에는 행사의 규모에 따라 재계기간을 정한 법도 있었다. 재계는 불교나 예수교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실천하고 있다. 불교신자들이 절에 가기 전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거나 남과 시비를 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자기 옷 가운데 가장 정갈한 것을 입고 간다든지, 예수교 신자들이 주일이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님을 생각하며 역시 정갈한 복장으로 교회에 가는 것은 기본적 마음과 몸가짐은 다를 바가 없다.
서원에 들어갈 때부터 최대한 공손한 복장과 자세와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도산서원에는 석간대(石澗臺 : 지금의 관리사무로 아래 선착장) 앞에 ‘하마비’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서 경건한 자세로 걸어서 들어가라는 것이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진입로를 다시 만들어 그 입구인 관리사무소 앞에 ‘하마비’와 ‘차량출입금지’표석도 설치해 두었다. 이러한 표석을 보고도 가끔 차량을 타고 정문까지 들어가려는 사람도 있다. 본인의 사회적 지위 등을 내세우며 굳이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하여 매표소 직원들과 실랑이를 하는 것을 목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현을 모신 사당 앞에는 걸어서 가야 함은 물론이고 들어가는 길이 좁아서 보행자들에게 불편으로 주기 때문에도 차량은 들어 갈 수 없다.
4. 선비들이 서원을 출입할 때 먼저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
도산서원에는 도포와 갓 또는 유건으로 복장을 갖추어야 진도문 출입을 허락하라고〈의절초〉맨 첫 조항에 규정하고 있다.《천자문》에 ‘모습이 단정하고 깨끗하면 정직함이 표면에 나타난다[形端表正]’고 하였고,〈원규〉에 ‘의관을 갖추어 말과 행동을 서로 살피고 타일러 착해져야 한다[衣冠作止 言行之間 各務切偲 相觀而善]’고 하였다. 외부에 나타나는 모습이 내면의 마음과 생각을 나타내기 때문에 복장이 말과 행동을 규율하고 있다. 즉 선비복장을 하면 선비다운 언행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서원에서의 복장은 전통적 한복과 도포, 갓을 착용하여야 한다. 갓은 서원 내에서는 유건으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이런 복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갖추어 있어야 한다. 옛날 원내 행신에 대하여 논의한 완의(完議)나 어떤 일의 진행을 기록한 일기(日記)에 복장을 갖추지 아니하면 밥을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행신이었다.
요즘은 향사를 봉행하기 위하여 서원에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복장에 대해서 간섭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한 번이라도 서원에서 알묘나 향사에 참여하였거나, 의례를 봉행하기 위하여 서원을 찾아오는 경우에는 일반 관광객과는 달리 단정하고 경건한 복장을 갖추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서원이 아니더라도 전통적 사찰이나 고적이든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든 우리 조상들의 땀과 정성이 배어있고 얼이 서려있다. 이러한 유적이나 유물을 감히 옷깃을 여미지 않고 경건함이 없이 바라 볼 수 있겠는가.
복장 외에도 선현 앞에서 조심하여야 하고 공손해야 할 행동들은 어떤 것인가? 말과 행동을 최대한 공손히 하여 사당을 향하여 인사부터 드려야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서원에 들어오면 일단 사당 앞에서 인사부터 드렸다. 이것을 지알(祗謁) 또는 첨알(瞻謁)이라고 하였다. 근래에 어느 선비가 전교당 앞 뜰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가 시중에 회자되기도 하였음을 볼 때 지팡이를 짚을 정도로 불편하면 서원에 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현께 걱정을 끼쳐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선생이 학생의 불편함을 보고 즐거워하겠는가?
《효경(孝經)》에 ‘우리 몸은 털 하나라도 부모에게 받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함부로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몸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건강관리도 잘하여 몸이 부모보다 노쇠(老衰)하지 않게 하고, 나쁜 짓을 하여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부모이든 스승이든 자식이나 제자가 불편한 몸으로 나타면 걱정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선현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몸이 불편하면 서원에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서원에 소장되었던 옛 문서(헌관집사록, 전임안, 각종일기 등)에 이름 아래 병단(病單)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인다. 몸이 불편하여 임사(任司)를 수행하기 어려워 중도에 사직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의 사직은 몸이 불편하여 임무수행이 어렵다는 것도 있지만 불편한 몸으로 서원에 와서는 안 된다는 전례(前例)가 있기 때문이다.
5. 경내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방에서 조용히 선생의 가르침을 공부하여야 한다.
〈원규〉에 ‘모든 유생들은 항상 각방에 조용히 있으면서 오로지 독서에 정진하여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강론하는 일이 아니면 부질없이 다른 방에 가서 쓸데없는 얘기로 날을 보내어 피차간에 생각을 거칠게 하여 공부를 폐해서는 아니 된다.[諸生常宜靜處各齋 專精讀書 非因講究疑難 不宜浪過他齋 虛談度日 以致彼我荒思廢業]’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마당이나 경내를 서성거려서도 안 되고, 경내를 다녀야 할 때에는 항상 공수(拱手)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야 한다. 큰 소리로 떠들거나 뒷짐을 지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색안경(sunglass)를 착용하거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등 겸손하지 못한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각자 처소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퇴계선생의 가르침이나 유학과 관련한 학문을 강론하거나 토론하는 등을 하여야 한다.
또 선생께서〈원규〉에 ‘까닭 없이 알리지 않고 자주 출입해서는 아니 된다[無故無告 切無頻數出入]’라고 하셨다. 방에서 까닭 없이 들락날락해서도 안 되지만 서로가 언행에 조심하여야 하나 조심하지 않으면 간절히 타일러 다 같이 착해지도록 하여야 한다.
《언행록》에 ‘선생께서는 평소에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몸이 피곤하여도 기대거나 자세를 흩트리는 일이 없었다.[先生之燕居 終日端坐 雖或氣疲身困 未嘗有偏倚放肆之容]’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실내에서 어떤 경우에도 벽에 기대거나 다리를 뻗거나 잠잘 때가 아니면 탈관복(脫冠服)하거나 누워서도 안 된다. 그리고 실내에서 대화에도 신중해야 한다. 서원에는 현달(顯達)한 선조의 자손들이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모인다. 이러한 자리에서 섣불리 조상자랑을 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못 발언을 하여 비판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언행을 조심하여 어떤 일이든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투게 되면 서로가 마음이 불편해 진다. 마음이 불편하면 정신을 바로 차릴 수 없다. 정신이 바르지 못하면 의례봉행에 정성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5. 실내외의 자리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서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다. 공동생활에는 질서유지를 위하여 반드시 서열이 있게 된다. 같은 직위이면 전임(前任)을 우선으로 하고 직위가 같거나 유생의 경우에는 연장자(年長者)를 우선으로 한다.
서원의 행사는 의례를 기본적으로 수행한다. 향사 등 존현의례에는 물론이고 강학할 때에도 반드시 그 시작과 마무리에는 의례가 있었다. 시작할 때에는 먼저 개좌(開座)를 하는데 인원이 많아서 마당에서 의례를 치러야 할 경우에 동쪽 계단아래가 윗자리가 되어 임사(任司)의 서열(序列)에 따라 차례로 서고 그 다음은 연치순(年齒順)으로 하여 서로 마주서면 서쪽 계단아래에는 말석으로 재유사의 자리가 된다. 이렇게 정리가 되면 도사령이 상읍례(相揖禮)를 고(告)하면 마주 읍을 하고 다음 행례를 시행하게 된다. 방에서는 남벽(南壁)의 우측이 윗자리가 되어 왼쪽으로 차례로 자리가 정해진다.
전교당에서는 동쪽이 윗자리가 되어 서향으로 맨 좌측부터 수임(首任)이 그 다음에 차례로 하고 북벽에서 남향으로 맨 동쪽을 윗자리로 역시 나이순으로 하여 돌아가서 서로 마주서면 수임 앞이 말석이 되어 재유사의 자리가 된다. 동쪽과 좌측이 윗자리가 되는 것은 방위(方位)의 서열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임금의 사신(使臣)이나 임금을 버금할 경우에는 북벽 가운데에서 남향이 주빈(主賓)자리가 된다. 임금의 자리가 남향이기 때문이다. 《예기》〈교특생편〉에 ‘임금이 남향하는 것은 하늘에 보답하는 것이고, 신하가 북면하는 것은 임금께 보답하는 것이다[君之南向答陽之義也 臣之北面答君也]’라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임금을 대신하여 치제를 봉행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과 1969년 10월에 서원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북벽에서 남향으로 앉았다. 이러한 자리배치는 궁궐에서 임금의 옥좌가 남향이니 임금에게 등을 보이고 앉을 수 없다는 것이고, 서원에서는 퇴계선생의 위패를 남향으로 모셨으니 후학이 스승에게 돌아앉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6. 상덕사 항상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출입한다.
상덕사는 주향(主享)으로 퇴계선생(退溪先生)과 종향(從享)으로 월천조공(月川趙公 : 趙穆,1524~1606)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여야 할 장소이다. 일반인들의 상덕사 출입은 알묘(謁廟) 등 의례를 봉행하지 않으면 통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의례를 봉행하기 위해서 복장을 갖추고 절차를 사전에 알아야 하고 선현을 뵙기 전에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알묘를 예(例)를 들어 살펴보면 알묘를 하고자 하면 먼저 관리인에게 알묘를 하겠다고 하고 준비를 부탁하면 관리인은 사당에 들어가서 문을 열고 절을 할 자리를 펴는 등 준비한다. 다음은 전교당에서 예복을 갖추게 하고 초석을 깔아 알묘자를 앉게 하여 알묘를 하도록 고(告)한다. 관리인은 알묘자를 묘정(廟庭)에 준비한 자리로 안내하여 알묘를 진행한다.
알묘자는 항상 공수하여 공손한 자세로 보행하여야 한다. 절차는 손을 먼저 씻고 동쪽계단을 올라 가운데 기둥을 돌아 사당(祠堂)의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서 향상 앞에 꿇어앉아 향불을 피워 제상에 올려놓는다. 향을 올리고[獻香] 잠시 읍을 한 다음 동쪽 문으로 나와 가운데 기둥을 돌아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절하는 자리(拜席)에서 재배를 한다. 공수(拱手)를 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기둥을 도는 것은[仰俯節旋] 가장 공손한 자세로 사당을 출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둥을 도는 것도 본래는 ‘사당에 들어 갈 때 계단에 올라서 오른쪽 기둥을 바깥으로 돌아 나와서 가운데 기둥을 바깥으로 돌아서 사당 중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나올 때에는 사당 동문을 나와 가운데 기둥을 안쪽부터 돌아서 오른쪽 기둥을 안쪽으로 돌아 나와 계단을 내려와야 한다.[凡入廟內升自東階循楹外入中門出自東夾門循楹內折旋楹外下東階]’라고〈의절초〉에 규정되어 있다.
7. 도산서원은 향교 또는 타 서원의 명예(名譽)를 존중하고 있다.
향교 또는 다른 서원의 임사(任司)를 역임한 사람에게는 그 임사의 직분 이하의 임사로는 망기를 보내지 않는다. 이것은 규정화된 문서는 없다. 향교 또는 다른 서원의 명예를 존중하고 서로 신뢰로 교류하기 위해서 이다. 특히 향교의 전교를 역임했다면 수임으로도 출망(出望)하지 않는다. 향교전교는 문선왕(文宣王 : 孔子)을 비롯한 성현(聖賢)을 모시는 국립기관의 가장 높은 어른이다. 전교(典校)를 역임한 분에게 향촌의 사림이 운영하는 서원의 수임으로 망기를 보내는 것은 향교에 대한 예우나 당사자에게도 그 명예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퇴계선생께서 백운동서원(현 소수서원) 향사례(享祀禮)를 개정하시면서 학궁(學宮 : 鄕校)의 규범을 능가하시지 않으셨고 진설은 오히려 반으로 줄이신 것은 서원은 향교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따라서 향교는 서원의 상위이기 때문에 향교운영을 책임졌던 전교를 서원의 수임으로 천망(薦望)하는 것은 향교에 대한 예우에도 맞지 않고 당사자의 명예를 실추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서원의 수임을 역임하였다면 아헌(亞獻)이하의 임사로는 천망하지 않는다. 이 또한 그 서원에 대한 예우이고 당사자에 대한 명예를 실추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도산서원에서는 망기에 조선시대에는 출망 당사자의 관직명을 썼으나 현재는 모두 유학(幼學)이라고 쓴다. 유학(幼學)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라는 뜻이다. 확실한 근거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조선국왕의 교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또 마지막에 ‘00년 0월 일’라고 쓰고 월과 일 사이에 원인(院印)을 검은색으로 마른 모로 찍는다. 원인(院印)을 검은색으로 찍는 것은 붉은 색은 국가기관에서 발행하는 공문서에 사용하고 민간은 검은 색을 사용하였다는데 따른 것이고, 마른 모로 찍는 것은 겸손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한다.
8. 마무리
도산서원의 행신범절에 대하여 광명실에 보관되었던 고문서 가운데 완의(完議)와 일기(日記)에 가끔씩 기록을 찾을 수 있고, 1916(丙辰)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의절초(儀節草)〉라는 문서와 이를 다시 규정화하여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사항을 추가한〈도산서원 운영규정〉과 그〈시행세칙〉을 1972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 규정에는 주로 상덕사 의절과 서원운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였을 뿐이고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행신범절에 대해서는 진도문 출입과 전교당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사당출입 규정 외에는 언급된 조항이 없다.
서원은 다양한 계층에서 출입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다. 스스로 선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경모(敬慕)하면서 질서를 유지하는 곳이기도 하다. 선후배와 동료 사이에 믿음과 사랑으로 섬기고 배려를 해야 한다. 나의 불편은 감수하고 상대방을 편안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곧 행신범절이다.
유궁(儒宮 : 선비들이 모이는 집)에서 지켜지는 의례나 범절은 유림들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모시는 선현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 군자(君子)로 나아가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본고(本稿)에는 의절(儀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의절도 제도의 변천에 따라 변하거나 없어진 것도 있다. 지금까지는 정하여진 규정에 따라 형식이나마 유지하려고 하지만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이 또한 서원의 중요한 전통문화이므로 보존과 계승에 많은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절은 인간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요건이라고 한다.《예기》〈예운(禮運)〉편에 ‘예를 행함으로서 서로 신뢰와 친목을 두텁게 할 수 있고 단결을 튼튼하게 할 수가 있다[禮義也者 人之大端也 所以構信脩睦]’고 하였다. 인간생활을 건강하게 활성화 하려면 행신범절을 비롯한 모든 의절이 전통적 가치를 잃지 않고 유지 발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