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프랑스어: Marie-Nicolas-Antoine Daveluy,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 ~ 1866년 음력 2월 8일 / 양력 3월 30일 충청남도 보령)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이며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다. 조선에 입국하고 21년 동안을 복음을 전파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와 함께 병인박해가 있을 때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한국의 103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1844년 그는 6개월의 여행 끝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 3대 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자신과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상하이에서 작은 나무배를 타고 긴 여정 끝에 충청남도의 강경에 도착하였다. 다블뤼는
1846년 조선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2년 만에 17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지만, 아픈 와중에서도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국어-프랑스어 사전과 여러 천주교 서적을 집필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 순교사를 집필하고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페레올 주교를 이어 조선 대목구장이 된 베르뇌 주교가 도착하자 1844년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르뇌 주교가 1866년 2월 순교하자, 다블뤼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 승계를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그를 돕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체포되었다. 3월 14일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선교사(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는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심문과 고문을 받고, 한양에서 100km 떨어진 갈매못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왕이었던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갈매못에서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와 장주기, 황석두와 함께 참수되었다.
축일은 9월 20일(103위 성인)이다.
3일 동안 시신이 바닷가에 방치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1866년 6월 중순,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순교자의 시신들과 함께 홍산의 석죽골(현재는 [서짓골 성지]로 명명됨)로 이장하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여러번 옮겨졌다. 1882년에 나가사키로 옮겨졌으며, 1894년 5월 22일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다가, 1900년 9월 10일 명동대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현재 유해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