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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3일 오전 11시 45분경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향년 82세를 일기로 양대노총 위원장과 가족,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2011년 9월 7일 이소선여사의 장례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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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장으로 5일장으로 치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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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가 서울대학병원을 떠나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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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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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여사가 손을 벌려 안아주는 듯했다.
이소선여사의 장례식을 보는데 아들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의 상황이 같이 겹쳐보였다.
2010년 11월 13일 전태일 40주기에 만났던 신순애씨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7번 시다(보조로 일하는 사람)로 공장에서 일하던 신순애씨는 1970년 11월 13일 공장장이
“야, 니네들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 지금 깡패가 죽어서 가마데기로 덮어 놨어.
” 전태일을 처음 만난 순간을 그렇게 말했다.
무서워서 밖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 가마데기에 덮여 있던 아들을 안았을 어머니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어머니로 수많은 아들들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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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영결식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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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영결식장에는 노동자들과 시민등 1500여명이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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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이 '귀천'과 봄날은 간다'를 조가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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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공원에서의 영결식을 마치고
노제를 지내기 위해 평화시장으로 장례행렬이 움직였다.
할머니 한 분이 파지를 밀고 장례행렬 앞으로 나왔다.
"어, 할머니 이곳은 안되는데요."
누군가 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어느면에서는 노동자에도 못들어가는 파지를 줍는 할머니
누구의 장례든,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국장 행렬이 있어도 별 상관이 없을 듯한
할머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삶의 무게가 깊으면 주위를 살필 수 없으며
저 할머니로 하여금 주위를 살필 수 없는 삶으로 살게 하는
우리 사회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할머니는 지나가고
장례행렬은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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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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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들의 손에 들린 영정을 앞세우고 상여가 흥인지문을 지나
평화시장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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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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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전태일이 어머니를 맞아드리는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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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여사의 노제를 지내는 중간에
전태일이 41 년전에 근로기준법 책을 불사르고
분신했던 자리로 갔다.
이곳이 전태일이 죽음으로써 부활한 자리이며,
그 어머니로 하여금 전태일 죽음 후
41년간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게 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전태일 재단의 두 분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님 이소선 여사의 노제인데 이곳에 꽃이라도 놓지 그랬어요,"
"아,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라며 어머님의 영정을 안고 있는
전태일의 포스터를 그 자리에 놓았다.
아들이 분신한 장소에서 어머니의 노제가 치뤄지는 것은
우리 역사상 이곳이 처음일 듯했다.
자식을 잃은 그 처절한 이 장소는 이제는 노동의 역사 현장이 되어 있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신문 한 귀퉁이에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전태일이란 이름을 부활시키고 불멸로 만든것은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변호사와 아들의 죽음 뒤
온갖 회유와 돈의 유혹에서도 꿋꿋이 버텨내고
41년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은 이소선여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현장
주위로 오늘도 분주한 오토바이가 지나고 있었다.
언제나
삶은, 죽음을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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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제가 끝나고 장지인 모란공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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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이 덮였다. 명정은 '명기'(銘旗)라고도 한다.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하관(下棺) 후에는 관 위에 씌워 묻는다 .
명정에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之棺(지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소선 여사의 한 생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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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이나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달공을 했다.
참석자들은 달공하는 인부 앞에 저승 노잣돈을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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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전태일의 묘에서 바라보았다. 전태일은 22년을 살았고 어머니는 82년을 살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41년을 노동자들과 함께 그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전태일 그는 지금도 22살의 불꽃이고 어머니는 41년을 한결같은 어머니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선여사는 노동자들이 분신 하는 것을 못견뎌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을 알기에 또 다른 어머니의
처절한 한과 슬픔을 못 견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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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가 전태일의 동상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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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첫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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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여사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자식으로 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선여사의 민주사회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알 수 있었다. 상여를 맸던 이정희(48)씨는 "상여를 튼튼하게 만들어서 무척 무거웠다. 20명이 10명씩 교대로 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가까이 모시고 간다고 생각하니까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임영순(46)씨는 "엄마죠. 엄마." 하고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이명옥(54)씨는 " 어르신은 사람이 오면 뭐가 필요해서 오는지 한 눈에 알아보셨다. 따뜻하신 분이시다.
다른 분들 말을 다 들어주시고 양보하시고 하시고 싶은 말은 다 하셨다. 이소선! 자체로 모든 사람들의,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지주고 이분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에게도 시대의 기둥으로 살으셨다.
전태일과 이소선여사를 통해 시대의 정신을 읽는 것이다."고 했다. 충북 영동에서 온 이주형(65)씨는 "노동자의 진정한 어머니이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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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가 넘어서 끝났다.
저녁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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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로 가는 버스는 유가족 버스였다.
차가 서울대에 있었기에 유가족 차에 탔다.
서울대병원에서 마로니에 공원의 영결식, 전태일 다리에서의 노제,
모란공원 장지까지 오늘 함께 다닌
이소선여사의 영정이 버스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당신의 마이크는
꼭 쥔채였다.
이소선여사의 아들 전태삼(61)씨는 "어머님의 마지막 말씀은 천하보다도 한 생명이 귀하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김진숙에게 가장 절실하다. 살아서 다 못한 것 죽어서 어떻게 이루겠니.
너는 꼭 살아서 이뤄야 할 일이 있으니 너는 꼭 죽지 말고 내려와야 한다."고 하셨다고 했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물었다. "내 트집과 고집을 다 받아 주신 분이시다.
엄마 안에서는 걱정이 없었다."고 했다. 세상의 자식들과 당신 소생 자식 모두에게 이소선여사가
있으면 걱정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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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분과 있으면 걱정이 없었다고 했다. 호되게 야단을 맞아도 엄마에게 맞는 것이기에 노여움이 없었다고 했다. 너그러웠지만 화가 나시면 호랑이가 되셨다고 했다. 뒤를 안보고 그냥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분과 함께하면 후회가 없었다고 했다. 후회를 하지 않는 삶을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후회를 하지 않는 삶을 당당히 살아낸 분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만나도, 이분이 믿는 더 높은 그분을 만나도 당당히 안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인예배에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낭송되고 영결식에서 장사익은 귀천을 노래했다. 귀천
천상병 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비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덮으러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비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비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소선 여사는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돌아가는 날, 세상은 슬프고 아득하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날들도 많았지만, 그러함에도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을 만났다고, 내가 한 모든 일에 후회가 없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듯했다.
이소선 여사의 영면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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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결같은 어머니....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인것 같습니다
사진을 담는 내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 란 이름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