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려고 앉으면 꼭 딴짓을 하고 싶다. 그래서 괜히 도구정리를 한다.
내가 가진 붓은 대부분이 재직 중 학생들한테서 물려 받은 거다. 이민 간다고 자기 그림 도구를 내게 전부 양도해 준 반장 회송이. 종업식이 끝나고 교실 한 켠에 버려진 주인을 알 수 없는 문구들.... 그러니 변변한 붓이 없다. 그래서 하루는 질렀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실버 블랙 벨벳', 기타 납작붓, 둥근 붓, 화홍에서 이런 거 저런 거 사고, 가지고 있는 화홍 붓도 톱질을 해서 짧게 만들고, 잘린 부분은 사포로 밀어 둥글게 손질해서 아크릴 물감으로 칠해 티나지 않게 만들고, 버릴 거 버리고....그렇게 붓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중.
선배 회원들 도구 선반에 놓여있는 붓꽂이 생각이 났다. 나무로 만들어 붓을 꽂으면 붓이 꼭 숲 속의 나무들 같다. 그래서 나도 붓꽂이를 장만해보기로 했다. 집안을 서성이며 재료를 물색해본다. 나무로 만들자니 도구가 없다. 종이는 물에 젖으면 안된다. 그러다 부엌 수납장에 보관중인 페트병에 눈이 갔다.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저거다...
젓가락을 불에 달궈서 종류별로 공간을 배정해 사이즈에 맞는 구멍을 뚫었다. 처음 뚫은 구멍은 치수가 엉망이지만 점차 좋아진다. 그렇게 붓이 늘어날 때마다 구멍을 뚤어 계속 세워둘 수 있다. 가볍기도 하다. 역시 딴짓은 정말 재미있다. 그림그리기 보다 더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