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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 명초의 비밀 2
갑자기 경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뭐라고? 큰스님 유골이라고?"
주지가 깜짝 놀라서 큰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정휴는 얼른 <진결>을 바랑에 다시 싸넣고 승방을나왔다.
대웅전 앞 뜰에 웬 처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주지는 그 사람들 하고 이야기를 하는 참이었다.
"연천봉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주장자를 보아하니 명초 스님인 것 같아서
뫼시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뼈만 남아 있더란 말인가?"
"돌아가신 지가 오래 된 모양입니다.
그 사이에산짐승들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이게 웬 떡이냐 하고포식했겠지요."
대웅전 앞에는 처사들이 수습해다 놓은
명초의유골이 놓여 있었다.
살이란 살은 모두 온데 간데없고
하얀 뼈다귀만 남아 있었다.
그것도 짐승들의이빨자국이 나있는 통뼈들이었다.
잔뼈 정도는짐승들이 다 씹어먹은 모양이었다.
주지는 그래도 다비식을 해야 한다면서
부지런히수좌들을 몰아
장작을 쌓고 제사 올릴 준비를 했다.
명초의 유언이 있었던지라
주지는간소하게다비식을 치렀다.
주지는 정휴를 행자로 보고
의식에끼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뒤에서 심부름을 하도록시켰다.
다비가 끝나자 정휴는 승방에 들었다.
가까운 혈육이 떠나갔는데도 왜 눈물이 나지 않는지
정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다비식을 하는 동안
내내 <진결>만 눈에 어른거렸다.
정휴는 <진결>을 다시 펴들었다.
그때 문이열리면서
명초의 유골을 수습해온 두 처사가 들어왔다.
"스님, 주지 스님이 이 방으로 들라기에들어왔습니다
오늘 하루만 묵었다가
다시 신원사계곡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시오."
정휴는 등을 돌리고 앉아 <진결>을 읽기 시작했다.
진결>은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씌어 있었다.
정휴는 한문으로 된 문장은 읽지 못하는 것이 거의없었지만
웬일인지 화담의 <진결>은 하나도 읽을 수없었다.
이렇게도 읽어보고 저렇게도 읽어보았지만
정휴는 단 한 줄도 읽어내지 못하고 책장만 마구넘겨댔다.
"스님, 무슨 책인데 읽지는 않으시고
그렇게 책장만넘기십니까?"
"아, 아니오."
정휴는 얼른 책장을 덮었다.
"<홍연진결>?"
그 중의 한 사람이 책의 겉장에 적힌 제목을 보고말했다.
"<진결>이라? 그렇다면 비결서 아니오?
아니,스님께서 비결서를 읽으십니까?"
"비결서를 우리 같은 술사(術士)들만 읽으라는 법이있나?
절간에서 더 많이 읽힌다네.
그나저나 그 책은누가 지은 것이오?"
그, 그게… 어쨌든 이 책 주인은 따로 있소."
"스님, 그러지 말고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전우치(田禹治)라고 하오.
계룡산에 들어와 벌써 십년이 넘었건만
앞이 까마득하기만 하오.
차라리 명초스님 문하에서 공부나 할 걸 그런 것 같소이다."
"난 남궁두(南宮斗)요
역학에 관심이 많아 그쪽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직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있소이다."
정휴는 하는 수 없이 이름을 댔다.
"난 정휴요. 법명은 자성. 난 원래 이 절로입산했지만
여기저기 떠돌다가 한 보름 전에야돌아왔소."
"그동안은 어디 계셨구요?"
전우치가 물었다.
"금강산에 있었소."
"금강산이면 산기운이 좋아서
우리 술사들이 몹시좋아하는 산인데,
한소식 하신 모양이지요? 그런 책도다 구하시고?"
이번에는 남궁두가 말했다.
정휴는 <홍연진결>을 꼭 붙잡고 두 사람의 눈치를살폈다.
"스님, 비결서라는 것은 흔한 것이오.
하물며 이름없는 비결서까지 합하면
그 수가 엄청날 것이오.
그리 대단한것도 아닐터 한번 봅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보여드리리다."
남궁두가 그의 짐에서 책을 몇 권 꺼냈다.
신읍지(神邑誌)>, <궁을천가(弓乙遷歌)>,
답천보록(踏千寶錄)>이었다.
"이것 말고도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비결서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유포된 책은
흔한 것이었다.
세종대의 서운관(書雲觀)에서소장하던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세종은
이러한 음양서, 참위서가 너무 많이 돌아다니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 모두 분서(焚書)하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었다.
그후 세조 때에도 근절되지 않자 세조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設)>,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선비기(道詵秘記)> 등
열일곱 종을 금서로 묶어 단속했다.
그리고 그뒤 성종은열두 가지를 더 금서 목록에 추가했다.
이러한 비결서는 신라 적부터 고려, 조선 시대를막론하고
끊임없이 민간에 유포되어 왔다.
더구나갖은 질병과 기아가 극심했던 조선 중기에는
그러한비결서가 더욱 많이 나돌 수밖에 없었다.
정휴도 화담의 비결서가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처음부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적혀 있는 글이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다.
정휴는 그들이라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강만 살피시고 주시오.
이 책은 분명히주인이 따로 있소이다."
정휴가 가지고 있던 책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남궁두가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음, 파자(破字) 해자(解字)를 해야 알겠군.
한참보아야 무슨 말인지 알겠는 걸.
첫줄은 알겠군. 후천 대환난? 이게 무슨 말인가?"
"글쎄, 찬찬히 보아야 알겠군. 워낙 어려운내용이라서."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책장을 넘겼다.
이윽고 책을 다 넘긴 두 사람은 정휴에게 책을 다시돌려주었다.
그런 다음 남궁두가 정휴에게 말했다.
"스님, 지금 당장에는 뜻을 풀기가 영 난해하군요.
제가 앞장 몇 줄만 따로 베꼈다가 해석해 보겠습니다.
비결이 원래 주인만 읽을 수 있도록 써놓았다지만
한참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풀게되면 알려드리지요."
정휴는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책을 넘겨주는 것도아니고
몇 줄 적어 뜻을 풀기만 하는 것쯤은
화담에게도 지함에게도 그리 누가 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시오."
남궁두는 <진결> 첫장을 베꼈다.
"나중에 인연 닿거든 알려주시오.
난 이 절에 오래묵지는 않을 것이오."
정휴가 말하자 남궁두가 받았다.
"우린 신원사 계곡에 있으니 언제라도 만날 수있다오.
그런데 스님은 어느 절로 가시렵니까?"
절이 아니라 고향에 한번 갈까 합니다. 제 동생을 찾아…"
"원 스님두. 출가를 하셨으면 그만이지 속가는 왜찾습니까?
허허허. 괜한 소릴 제가 했군요."
"두 분 이제 쉬십시오.
노사의 유골을 짊어지고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터이니…"
"그렇지 않아도 졸음이 새록새록 밀려옵니다."
전우치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는 눕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런 민한 친구. 병법에는 그렇게 재주가 많아도
수마(睡魔)에는 꼼짝 못하는군.
스님. 저도 그만쉬겠습니다.
아참, 그런데 그 책의 주인이라는 분은누굽니까?"
"예, 홍성 사람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화담 산방의학인이었는데
화담 선생이 몹시 아끼는가 봅니다."
"그래요? 화담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분이 아끼는 제자라면 대단한 분이겠군요.
그런데화담 선생은 지금?"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이 책을
이지함, 그분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제가 이 선비와 잘 아는 사이라서…"
"그렇습니까?
저희 두 사람은 스승도 없이 계룡산골짜기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여기저기서 책을 구해다가 읽고 있지만
도무지 진도가없습니다.
이러다가는 늙어 죽기 전에
아무것도 못 이룰 것 같습니다.
비결서까지 전해주는 스승이 있는이 선비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선비는 지금 어디에있습니까?"
"팔도를 유람중이랍니다."
"저도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화담선생이 총애하는 제자라면 필시 도력이 깊을터이고…"
"실은 내가 승복을 입고는 있으나
나도 그분의제자나 마찬가지지요.
벌써 오래 전부터 그분이아니고는 마음이 불안하여
글 한줄 읽혀지지 않고,
아무리 훌륭한 스님을 은사로 두어도
도무지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저도 어서 빨리 뵙고 싶군요.
언제뵙게 됩니까?"
"내년 삼월이나 되어야 뵙게 될 것 같소이다."
남궁두는 거듭 지함에 대해서 물었다.
정휴는 남궁두가 묻는 대로 지함의 이력을말해주었다.
"그분은 복도 많소이다.
북창 같은 이는 우리 술사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높은 분인데
그런 분을스승으로 두고 또 화담 산방에도 들어가셨다니…"
남궁두는 거듭 정휴에게 청을 했다.
"스님, 꼭 약조를 하셔야 합니다.
저희 두 사람도이지함 선비의 문하에 입문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십시오."
"그러지요. 내년에 제가 화담 산방으로 올라갈 때
아예 같이 가십시다.
제가 어차피 보령에 갔다가는
이곳 용화사로 돌아와야 할 터이니."
"고맙소."
어느새 두 사람은 말까지 놓아가며 이야기꽃을피웠다.
이튿날 남궁두와 전우치는 신원사로 떠나가고
정휴는 보령으로 떠났다.
"정휴 스님, 잘 다녀 오시게나.
스승님 뵙고 못뵙고는
스님 손에 달려 있다고 너무 위세 마시게.
하하하."
남궁두가 섭섭한 듯 발을 떼지 못했다.
"걱정 말게. 보령에 갔다가는 곧 돌아올 것이니.
내가 일차 신원사 계곡으로 찾아가리다.
그간 베끼신거나 잘 들여다보시게나. 허허허."
"원, 두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을저질렀기에
이리도 정이 깊어졌담."
전우치가 불퉁거리자 남궁두와 정휴가 껄껄웃으면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정휴는 공주에서 칠갑산을 넘어 청양으로 갔다.
청양에서는 장곡사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청양에서 대천 가는 길을 잡아
꼬박 하루를걸은 끝에
정휴는 보령 땅을 밟았다.
보령은 정휴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아니,그렇게 여기고 살았었다.
삼촌인 명초가 그의 내력을이야기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아버지도,얼굴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종이었을 것이라고생각했었다.
행여 금부의 도사일 줄은 꿈에도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신의 신분이 밝혀졌다 한들
무슨 대수가 있을까.
같은 배를 빌어 태어난 심충익의막내딸을 만나는 것도
하등 의미가 있을 게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고,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
그동생에게도 마음 편한 일일지 몰랐다.
그러나 핏줄이 자꾸 당겼다.
조선 천지에 단하나밖에 없는 혈육,
그 혈육이 보령에 있다는것만으로도
정휴의 발걸음은 저절로 그리 향했다.
정휴가 심 대감 집의 대문을 두드리자
낮익은 종이나와 문을 열었다.
"아니 정휴 아닌가?"
"그렇소, 형님."
"아이구, 이놈아.
면천을 했으면 멀리 가서 잘 살일이지 왜 중은 되었냐?"
"제 소견이 이렇게 좁지 않았습니까."
"쯧쯧쯧. 그래 여긴 웬일인가?"
"마님 뵌 지도 오래 됐고, 어머니 산소도 찾을 겸해서…"
정휴는 동생 이야기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들어오너라. 내당에 마님이 계시다."
정휴가 내당에 들어서자 문이 열렸다.
심 대감 부인이었다.
"마님."
정휴가 합장을 했다.
"자네, 스님이 되었군.
어째 명초 스님이 안 오신다했더니
자네가 대신 오는군."
"명초 스님이 있는 용화사에 출가했었습니다
명초스님은 보름여 전에 열반하셨습니다."
"저런. 우리 집안을 잘 보살펴 주셨는데…"
정휴는 동생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얼른 말이나오지 않았다.
종도 물러가고, 마침 내당에는 심 대감 부인과
단둘이 있게 되었다.
심 대감 부인은 회갑을 치른나이라서
내당에 들어도 흉이 될 리 없었다.
정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입을 떼었다.
"저, 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런가? 들어오게. 남녀칠세 부동석이라지만
할망구와 스님 사이인데 누가 뭐랄라구? 호호호."
정휴는 내당으로 들어가자
곧 심 대감 댁 막내딸이야기를 꺼냈다.
"마님, 명(明) 아가씨가 안 보입니다."
"출가했다네."
"예? 어디로요?"
"홍성으로 갔다네."
"누구한테요? 뭐하는 사람인가요?"
"지금 홍성현에서 현감 노릇을 하고 있다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명이는 왜 묻나?"
"궁금해서지요. 안 보이길래…"
정휴가 우물쭈물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부인의눈초리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자네, 명초에게서 무슨 얘길 들은 게로군."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그 요망한 중이 입 하나봉하지 못하고 발설하다니."
"그러면 명이 아가씨가 제 동생이 맞습니까?"
"그게 명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내가 본시그 아이를 귀여워해 주지는 못했어도
그 아이를 망치고 싶지는 않네. 알겠는가?"
"하오나, 마님. 제겐 하나뿐인 혈육입니다.
다 죽고이제는 저희 남매밖에 없습니다."
"아비가 다르느니라."
정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래도 명이 아가씨는 제 동생입니다."
"무슨 망발이냐. 너 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 애를 망치지 말거라."
"왜 관계가 없습니까, 마님."
"첩 없는 양반이 어디 있더냐?
그 아이는 엄연히대감께서 낳은 아이이니,
한 점 혈육에 대한 정이있다면
그 아이를 괴롭히지 말거라."
"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서 제 동생이란 사실을알리고 싶습니다."
"씨가 다르면 같은 밭에서 나는 곡식이라도다 다른법이야.
밭이 한밭이면 보리가 벼가 되고,
무우가배추 된다더냐!"
정휴는 조용히 자리를 물러났다.
가슴 속에서 진한눈물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정휴는 어머니 무덤으로 갔다.
잡초가 무성했다
정휴가 돌보지 않았으니,
종무덤에 벌초를 해 줄 사람이 따로 있었겠는가.
"어머니, 왜 제게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종노릇이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왜, 왜 숨기셨습니까?
심 대감 딸을 낳았다는 게 뭐가 그리 대죄라고…"
정휴는 어머니의 산소에서 내려와
홍성으로 발길을돌렸다.
홍성. 그의 운명이 새로이 열리고
새 삶이 시작된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