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는 ‘독일의 플라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57]
근대 유대교 개혁 이끈 독일 최고 유대인 가문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3.03.28. 03:00업데이트 2023.03.28. 06:44
0328 여론1 홍익희
오늘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이 마지막에 신랑 신부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듣는 음악이 있다. 그때 연주되는 행진곡은 야코프 펠릭스 멘델스존이 17세에 작곡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의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다. 1858년 영국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서 연주된 이후 일반인의 결혼식에서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1809년 멘델스존은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1년 나폴레옹이 함부르크를 점령하자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주변에 유대 회당인 시너고그가 없어 교리가 유대교와 가장 비슷한 루터교도가 되었다.
할아버지 멘델스존은 척추장애인
멘델스존은 일찍부터 음악 교육을 받아 여러 악기를 다뤘고, 9세 때 피아노 연주회에 나가 갈채를 받았다. 그는 유대인답게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멘델스존은 10세 때부터 작곡도 시작했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4중주 작품3′을 괴테에게 헌정하면서 노년의 괴테와 12세의 음악가 멘델스존 사이에 우정이 싹텄고, 괴테는 멘델스존이 모차르트보다 뛰어난 천재라고 단언했다. 멘델스존이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인 ‘제13 교향곡’을 작곡한 때가 15세이었고, 이듬해 그의 최고 걸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현악 8중주’를 작곡했다. 그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으로, 경쾌하고 힘차고 즐거운 이 작품은 17세의 나이에 작곡했다고 믿기 어려운 뛰어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처럼… 손자의 ‘한여름밤의 꿈’ - 보스턴 발레단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요정들이 군무(群舞)를 선보이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은 발레는 물론 연극,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바탕이 됐는데, 작곡가 멘델스존이 17세에 작곡한 음악극 ‘한여름밤의 꿈’도 그중 하나다. 연인들이 우여곡절 끝에 운명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척추 장애를 극복하고 첫눈에 반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를 연상시킨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멘델스존이 유명세를 타자,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나는 저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저명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저명한 아버지가 바로 계몽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모세(모제스) 멘델스존이다.
근대 들어 네덜란드에서는 종교적 관용 덕분에 유대인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다. 그때 유럽 유대인 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게토에서의 해방이 그 하나요, 나폴레옹에 의한 유대인의 자유 선포가 또 다른 하나였다. 이 모두가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같은 사상가가 주도하는 계몽주의 덕분이었다.
17~18세기 유럽 유대인 공동체의 학문 활동은 미약했다. 유대인 대부분이 게토에 갇혀 있었던 원인도 컸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소수 민족에게도 평등권을 줄 것을 주장했다. 인간 이성의 힘과 진보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외친 계몽주의 정신에 힘입어 서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18세기 말엽에 유대인들이 게토로부터 해방되었다.
모제스 멘델스존(왼쪽)과 작곡가인 손자 펠릭스 멘델스존. /위키피디아, 게티이미지코리아
모세 멘델스존은 폐쇄적인 유대교 교리와 전통에 얽매여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보고, 유대인 사회를 서구 사회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교 신앙과 계몽주의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는 유대인이 바깥 사회와 어떻게 하면 잘 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모세 멘델스존은 신동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몸이 허약해 척추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린 멘델스존은 서구 사회의 학문을 익혀 두 세계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몰래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를 배우고 수학, 과학, 철학 등을 익혔다. 베를린 아카데미가 1763년에 ‘형이상학적 진리의 판명성’에 관한 논문을 모집했는데 그가 칸트를 누르고 최고점을 땄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사가 되어 ‘보호 유대인’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든 제한 사항에서 해방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 뒤 1767년 멘델스존은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를 모델로 삼아 ‘파이돈’을 저술했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던 유물론에 맞서 영혼의 불멸을 옹호한 글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으로 멘델스존은 ‘독일의 플라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모제스 멘델스존(왼쪽)이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서 있는 사람), 스위스의 시인 요하나 카스퍼 라바터(오른쪽)와 토론하는 모습. 당대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던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대인들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의 일반 문화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멘델스존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칠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1783년 유대인의 경전 ‘토라’(모세 오경)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당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책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싫어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주변 문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문화유산만을 고집했다. 유대인들은 정신적인 게토를 벗어나 넓은 세계의 일반 문화로 나와야 한다고 멘델스존은 생각했다. 그는 토라의 히브리어 원문 옆에 히브리어 문자로 음역한 독일어 번역문을 나란히 두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쉽게 독일어를 배우도록 했다. 이로써 게토와 바깥세상이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외부인들이 유대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진력했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각 나라에서 유대인의 대우에 대한 법률들이 개정되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바깥 학문을 유대 교육과정으로 채택했다. 멘델스존은 비록 정통파 유대교로부터 배척받았으나, 미래를 위하여 유대인들을 준비시킨 개혁 사상가였다. 멘델스존의 생각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나면서, 율법과 전통 중 많은 것을 현대 사상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포기하는 개혁파 유대인들이 1800년대 초 독일에서 등장했다. 이들이 184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다. 현대 유대교는 크게 세 분파로 구분된다. 60% 이상이 개혁파이고, 15% 내외가 정통파, 그리고 나머지가 정통파와 개혁파 사이의 중도 격인 보수파이다.
철학 논문서 칸트 누르고 최고점 받아
경제사에서 멘델스존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학자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대인답게 스스로 노력하여 가난의 고리를 끊고 굴지의 금융 가문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베를린에서 고학하며 공부하다 21세 때인 1750년 ‘보호 유대인’ 자격을 가진 부유한 비단 공장 주인 아이작 베른하르트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뒤 모세 멘델스존은 자녀 교육뿐 아니라 1754년부터는 비단 공장의 회계를 도와주다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동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인 1761년에는 독자적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그 뒤에도 그는 경영과 학문의 길을 병행하며 금융가로 우뚝 서 사업과 학문 양쪽 분야에서 모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후에도 멘델스존 가문은 큰 금융 가문으로 성장하면서도 꾸준히 학자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그러면서도 독일의 3대 금융 가문의 하나로 커서 근대 독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청혼]
”저를 꼽추로 만드시고 신부에겐 아름다움을… 신에게 애원했답니다”
모세 멘델스존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푸근한 인성과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척추장애인이었다. 멘델스존이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대 상인인 구겐하임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구겐하임이 그를 초대했다. 구겐하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은 멘델스존이 쓴 작품에 심취해 그를 직접 만나보기를 고대했었다. 그러나 멘델스존을 직접 만난 딸은 그의 흉측한 외모에 충격받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끝날 시간이 다가오자 멘델스존은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당신은 결혼할 배우자를 하늘이 정해 준다는 말을 믿나요?” 딸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는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멘델스존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신은 그에게 장차 그의 신부가 될 여자를 정해 주지요. 그런데 그녀가 척추장애인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신에게 필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안 됩니다. 신이시여! 소녀가 혹 등을 갖게 되면, 그 소녀는 슬픔과 불행을 감내하기 힘듭니다. 차라리 저를 척추장애인으로 만드시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제가 척추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훗날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아내가 되었다. 소설 같은 ‘한여름 밤의 꿈’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