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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50) /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말 씀 : 요 한 복 음 14장 22절 - 31절 (신약성경 p.172)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아멘!
우리는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다락방강화를 듣습니다.
특히 14장 말씀은 네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13장 끝에서 베드로가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자꾸 떠나신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놀라운 영적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심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도마가 나섭니다. 그의 질문은 베드로의 질문을 조금 변형한 질문입니다.
5절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어떻게 그 길을 따를 수 없느냐고 질문했지만, 도마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세 번째는 빌립이 나섭니다. 8절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로,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유다는 예수님의 여러 대답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질문합니다.
앞서 세 제자들의 질문을 종합 정리해 본다면, 이래도 이해가 안 되고 저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설교도 많이 듣고, 기도도 많이 해서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시원하게 뚫리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성령 충만했다가 어떤 날은 마냥 곤두박질하고,
어떤 날은 찬양하는 등,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위기나 시련이 닥쳐오면 금새 의심하고,
부인하는 바람에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합니다. 베드로나 도마나 빌립이나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나, 우리도 똑같은 현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자꾸 의심이 들면서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는, 예수님에게 왜 자신을 세상에 숨기시고,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시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진리는 보편성과 동시에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천국 복음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진리는 특정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이해되는 배타성을 갖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세계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신화나 문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에겐 너무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보편성과 배타성에 대해 잘 말해 주는 부분입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감동적이고,
큰 능력을 쏟아내지만, 그런 감동과 큰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설교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리의 성경 말씀을 받아먹습니다. 24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아멘! -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합니다. 마치 씨앗이 딱딱한 땅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그냥 흘러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거절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아 진리가 없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은 진리를 배척합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의 옆에 있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거짓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불의는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마음에 죄의 세력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돌덩이를 들추면, 햇빛을 받은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도망가는 것처럼,
빛이 오면 어둠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자꾸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은혜의 빛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거짓과 불의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고, 진저리치게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어둠의 세력을 더 좋아합니다.
요즘 국내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포르노나 폭력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내면에 그런 성향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에 쓰레기 같은 인격과 지저분한 생각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은근히 그런 것들을 즐깁니다. 빛과 진리가 있는 사람들은 불의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빛에 거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어둠에서 떠나 더 이상 죄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사람들은 어둠에서 떠나고 죄를 멀리 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죄 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성령 받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빌립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제 가룟 사람이 아닌 제자 유다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오늘 본문 25절, 26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 짧고 분명하게,
정의해 주십니다. 보혜사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시는 성령님입니다.
기독교의 2,000년 역사가 오늘날까지 유지해 온 것은, 전적인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진리를 지키시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학문적 이론과 과학과 철학과,
이데올로기 등이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를 공격해 왔고, 지금도 공격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성령님을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곧 성령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방식대로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위기는, 곧 성령님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성령님을 믿고 체험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과거에 성령님을 체험하신 성도들은 더욱 새롭게,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과 같이 간절히 사모하여 성령충만 받고, 성령의 체험으로 사시기를 원합니다.
방언이나 예언하기를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은사가 임하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 기도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육적 상태에서 벗어나시를 바랍니다.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님을 충만히 받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성경에 기록돼 있는 모든 사실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평소에 남을 미워하고, 화를 잘 내던 사람도 성령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경험하게 되면,
곧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항상 웃습니다. 이상하게도 말이 많고 실수가 잦던 사람도,
성령 체험으로 모든 면에 여유를 보이며 위기에 처해 어려움 당하면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면, 사람은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성령님께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한마디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체험이 있게 되면 기적,
부활의 진리마저 이해하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은 주님의 모든 진리 말씀을,
깨닫도록 세세하게 다 가르쳐 주시고, 하나하나 이해하도록 친히 인도하여 주십니다.
또 하나는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꾸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냅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뭐라고,
말씀했는지, 성경 말씀을 읽긴 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신기하게도 하나님 말씀만은 항사 샘솟듯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아이큐나 기억력이나 추리력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줄줄이 생각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게 되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아멘! -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선적으로 신 구약 성경의 영적 진리에 대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이라도 생각나게 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많은 설교를 듣게 되는데, 적어도 지난 주 설교는 생각나야죠.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사 41:10)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광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당할 위기에 처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게 됩니다.
생업이 힘들고, 가정에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살게 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이렇게 이해되지 않던 말씀들이 이해되고, 진리의 말씀들이,
생각나고,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27절 말씀대로 평안이 찾아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이 보혜사 성령님의 임하심에 대한 최종 결론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시고, 순간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두렵고 흔들리던 우리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위에서,
내려오는 평강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지배하므로, 마음에 평안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로 구성된 특별한 평안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나의 평안’ 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평안으로 네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평안은, 순간적이지 않고 영원한 평안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조건이 좋을 때 생기고, 나쁠 때 사라지는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둘째 평안은, 영적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셋째 평안은, 내면적 평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넷째 평안은, 불완전한 평안이 아니라, 너무나 완전한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나의 평안’ 에 반해, 세상이 주는 평안도 네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짧고 순간이며, 둘째는 물질적이고 육적이며, 셋째는 외면적, 넷째는 불완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나의 평안’ 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내면적이고, 완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안을 경험하고,
소유하며, 인생에 위기가 닥쳐도 주님의 평안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든 삶에서 확실하게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오늘 이 시간에 이 믿음과 예수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말씀의 토씨까지도 기억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끼치시는 참 평안이,
우리를 다스리시므로 항상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