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들어온다
안성 아양동 석불 / 서운산 청룡사 / 바우덕이 사당
박 윤 호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안성에 안성이 없다. 그러나 안성은 한 때 우리나라 3남 지방의 물산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여 서울로 보낸 유통 지역이다. 요즘이야 그런 흔적은 볼 수 없지만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원전’에 대추, 밤 곶감 등 제물들을 매점매석하여 떼돈을 번 진원지도 안성이다. 그래서 안성으로 가는 길은 산도 풍성하고 물빛도 유난하였다.
자갈 눈동자, 아양동 석불
변해가는 아파트단지에 밀려 두 기의 석불들은 연두색 철망 밖으로 쫓겨나 설자리조차 옹색하다. 주민들은 정월 대보름에 치성을 드린다고 하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당국의 처사가 불손하다. 그러나 석상의 모습만은 여느 석상의 생김새와는 특이하다.
왼쪽 입상보살은 원래 크기는 3m80cm이라 하나 무릎 이하 40cm 가량은 땅속에 파 묻혀 본래의 훤칠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로 보아도 특이한 모양이다. 가운데로 타오른 불꽃 형의 무늬의 중심으로 연화를 둘렸고 옷에는 연꽃을 새겼다. 늘씬한 키에 화관을 쓴 몸매는 여성다움이 배어 있다. 더더욱 특이한 것은 석불의 눈동자이다. 전혀 다른 질감의 자갈을 구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갈로 눈동자를 잘도 성형했다.
그 옆, 지그시 눈을 내려감은 인자한 할아버지 석불의 모자는 흡사 명상용 춤을 추는 터키인의 모자를 빼닮았다. 혹여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를 드나든 이슬람 장사꾼은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본다.
마을 사람들은 왼쪽 미륵은 할머니이고, 오른쪽 미륵은 할아버지이란다.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언제까지나 이어나 갈는지. 석불에는 성구별이 없어 여성 불자는 보살, 남자 불자는 거사로 한다는 어느 거사의 말이다.
남사당패의 고향, 안성 청룡사
늘 초행길 답사에는 관심도 많고 욕심도 크다. 그곳에 얽힌 이야기며 전각의 구조, 벽화에 담아 놓은 그림 중에서 한두 가지의 특색은 있기 때문이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로 가는 심정도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이다. 우선 대웅전 법당에 걸린 감로탱화의 아랫부분에 남사당패들이 그려져 있다는 말에 잔뜩 기대를 갖고 법당 안을 살펴도 그런 탱화는 없었다.
지난해 해남 달마산 미황사 마당가 수조에 달마산의 영상이 비친다는 말에 이곳저곳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나중에서야 수조는 새 축대 아래로 옮겨져 감로수의 물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기야 오늘도 남사당패 놀이판이 벌어진 감로탱화 보기는 허탕을 친 셈이다. 아마 보물로 지정되어 별도로 보관하는가 보다. 늘 이럴 때는 한발 늦게 온 것을 후회하지만 그것은 욕심일까? 허탈감일까?
법당에는 1674년에 청동으로 만든 범종에 파옥지진언 破獄地眞言 ‘지옥도 깨뜨린다는 범종의 소리’란 뜻의 글씨가 양각되어 있다. 종소리만으로도 중생들의 갈 세상이 달라진다는 범종을, 만지지도 말고 사진도 촬영금지란 패찰을 보면서 7가지 보시를 빗대 번민해 본다.
아름드리 원목 그대로 기둥을 삼겠다고 먹줄을 치고 그렝이 질 한 대목장의 솜씨도 대단하고 그의 배짱도 두둑하다. 또한 대웅전 추녀 끝, 풍경 위로 금강문에 있어야할 금강역사가 법당을 지키려 왔는지 풍경소리가 듣고 싶은지 여기에 와 있었다. 청룡사에서의 특이한 볼거리들이다.
1800년대부터 남사당패들은 청룡사 불당골을 거점으로 하여 봄여름가을에는 전국을 순회하다 겨울철에는 돌아와 기예를 연마하면서 겨울 한 철을 보냈다고 한다.
바람은 노을이 되어
청룡사 사적비가 한길에 나와 섰다. 이수의 모양이 이색적이다. 네모진 지붕돌 끝자락에 해태를 닮은 석수가 사방을 지킨다. 여기서 ‘여우가 말했다’는 카페의 푯말을 따라 10여분 걸어가면 연두색 사이로 바우덕이 사당이 보인다. 사당 안에는 위패만 있고 영정은 없다. 마당가에 황동조각상 바우덕이가 객들을 맞는다.
2005년, 한 조각가는 ‘바람은 노을이 되어’ 라는 제목으로 바우덕이 상을 빚어 놓았다. 사실적인 묘사로 가늠하고 야무진 체구에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코, 다문 입과 부드러운 눈매에 상쇠를 틀고 짚신을 신은 형상은 남사당패의 꼭두쇠인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에 동원된 노역자들의 고된 마음에 신명을 불어 넣어 줄 모습처럼 참 잘도 빚어 놓았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내 어머니 같은 삶을 산 바우덕이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미인박명이라더니 짧은 생애가 야속하다. 1848년에 나서 1870년에 돌아가다. 가난한 집의 딸로, 꽃다운 청춘에 짧은 생을 마감한 바우덕이, 엄마는 가출하고 아버지마저 일찍 죽고, 나라는 풍전등화 같은 이즘에 그래도 한을 신명으로 승화시킨 바우덕이,
본명은 김암덕金岩德, 조선말에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하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수할 적에 안성 남사당패가 놀이판을 벌려 조선팔도에서 동원된 인부들을 위로한 공로로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 받았다 한다.
그의 동상으로 다가서 살포시 손을 잡아본다. 바람은 노을이 되어 사당을 감싸 녹음으로 짙어가고 있었다. 불당골로 불어오는 한줄기의 바람은 타는 노을이 되어 바쁜 걸음을 재촉한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