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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운 화
(2014년 9월 안성 법등사 초청법회 2박3일 법회 중 마지막 날 질의문답)
혜정법사님 소개
혜정법사慧净法师는 1950년 대만의 남시南市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교육을 받아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깊이 기초를 닦았다. 성년이 된 이후로는 불교에 귀의하여 즐겨 경을 독송하고 염불하기를 좋아했다.
1977년 불광산의 성운星雲대사에게 출가했는데, 법명은 심엄心严, 별호는 혜정이라 했다. 1985년 봄에 성운대사에게 청하여 홀로 자주산自住山에 가서 3년간 수행했다. 이때 염불을 위주로 하였으며, 인광대사문초印光大师文钞를 읽고 정토에 관한 글을 저술했다. 또한 일본의 법연대사가 쓴 선택본원염불집选择本愿念佛集을 연구함으로써, 정토법문은 마땅히 선도대사의 가르침이 가장 순수하고 바르다는 것을 알았다.
1988년 가을부터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오오타니 대학大谷大學으로 유학하여 선도대사 계열의 정토사상을 연구하였다. 1993년 여름에 타이완으로 돌아와 선도대사의 정토법문을 펴기 시작했으며, 수차례 홍콩, 마카오, 중국과 뉴질랜드 등지에서 홍법하였다.
2003년 이후로 타이베이 상산象山의 수행 지구에서 주석했는데, 이후로 상산은 하루 종일 염불하는 ‘미타촌彌陀村’이 되어갔으며 대만 내에서 ‘정토종 선도류’의 총본산이 되었다. 혜정법사의 인품은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꾸밈이 없고 검소하며, 하루 종일 염불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는 스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전 생애를 정토법문에 투신했는데, 그러한 인품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사람들에게 비할 바 없이 큰 감화력을 주고 있다.
혜정법사의 저술은 선도대사전집, 법연상인전집, 염불감응록 등 20여 가지의 책이 있는데, 근본 종지는 모두 선도대사께서 가르치는, 아미타불의 구제하심을 믿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다.
또한 혜정법사는 2013년과 2014년 한국에 초청받아 와서 한국의 정토염불행자들을 위한 법문을 해주었다.
(초청법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임실 상이암에서 순수 정토염불을 널리 펴시는 동효스님과 법등사에서 티벳불교와 정토불교를
포교하시는 설오스님, 강원도 건봉사에서 정토염불수행을 하시는 정전(서현)스님의 원력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혜정법사님 염불 주요 질의응답 (2014 법등사 초청법회)
육자염불과 사자염불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자체를 놓고 볼 때 그 분의 명호가 그 분의 본체이며, 명호 속에는 중생을 부르시고 중생을 구제하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무입니다. 또한 당신의 모든 공덕을 귀명하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모두 나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를 아는 사람은 일단 아미타불께 귀의하여 한결같이 염불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하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의 심정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도록 할 겁니다.
우리는 다른 부처님의 명호 또는 다른 보살님의 명호를 부를 때 모두 앞에다 나무를 붙입니다. 물론 그 때는 공경하고 예배를 한다는 의미가 있겠지요. 시방세계의 불보살님들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아미타불이겠습니까?
다만 부처님은 네 가지 경계가 있으신데, 이른바 이무애理無碍·사무애事無碍·이사무애理事無碍·사사무애事事無碍가 있습니다. 이처럼 무애(걸림이 없음)라면, 부처님의 본체가 육자명호이므로, 육자명호 속에 나무南無 두 글자가 곧 아미타불阿彌陀佛 네 자이고, 아미타불 네 자 가 곧 불佛 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무애이니까요! 부처님 자신의 입장에서는, 무애이기 때문에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미타불은 이미 아시고 이미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여섯 자를 부르던, 네 자를 부르던, 한 자를 부르던 다 똑같이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 아직 말을 하지 않았어도 부처님은 이미 먼저 아신다.’ 다만 우리 염불인들에게 귀명을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언어로 표현을 할 때 나무 두 글자를 앞에다 붙이게 되겠지요. 이는 마치 ‘마음이 진실하고 정성스럽다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여섯 자를 불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어 우리가 잠을 자려 할 때 염불을 그렇게 길게 할 필요 없이 네 자를 불러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여섯 자를 부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면 여전히 여섯 자를 부르십시오. 만약에 연로하다던지, 몸이 불편하여 침대위에 누워 계시다면 여섯 자가 길기 때문에 네 자를 불러도 되고, 나무만 불러도 되고, 한 글자 불을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아직은 건강하기 때문에 여섯 자를 불러야 합니다. 특히 함께 수행을 할 때는 원만하고 완전한 여섯 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네 자를 부르면 완전하지 않고 원만하지 않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도표에서 나무는 항상 아미타불과 함께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섯 자 전체가 모두 아미타불의 명호입니다. 하지만 일체가 유심조이므로, 만약에 비교적 내성적이거나 과묵한 사람, 혹은 벙어리라면, 그가 늘 마음속으로 억념憶念만 한다면 입을 열지 않아도 효과는 똑같습니다.
왜 염불을 해야 합니까?
답: 염불에는 두 가지 큰 이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세의 이익이고,
하나는 내생의 이익입니다.
내생의 이익이란 우리로 하여금 육도의 생사윤회를 끝내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신속하게 성불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내생의 이익은 염불을 하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현세의 이익은 부수적으로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설사 우리가 모르고 있고 특별히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러한 이익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작년 6월 달에 처음으로 법등사에 왔을 때 이야기를 하나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카드에 관한 이야기였지요. 8명이 탈 수 있는 차에 15명이 들어가 앉았는데 모두 젊은이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차를 몰고 200키로로 빨리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내리막길에서 커브를 도는데 전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15명 중에 14명이 죽고 한 명만이 죽지도 않고 중상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사고발생 당시 이 젊은이는 한 줄기 광명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뿐더러 중상조차 입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조금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큰 사고에도 죽지 않은 걸까요?
첫째, 그의 어머니는 불자이자 염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부처님카드를 한 장 주셨는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셋째,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각각 세 번씩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생명이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죽음입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씩 밖에 염불을 하지 않았지만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설사 천냥의 백은과 백냥의 황금으로 우리의 목숨과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길 원할 겁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살리는데 돈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왜 염불을 해야 합니까? 이 사례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제 저녁 제가 말씀드린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여러분들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재난을 소멸한다던지, 사업의 성공을 바란다던지, 좋은 인연을 원한다던지, 가정이 화목하고, 심지어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단지 경건한 마음으로 염불만하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이처럼 염불은 우리의 소원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렇지만 이 소원은 우리와 상응하는 소원이어야만 이루어 주십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좋지 않은 소원이라면 아미타불께서는 결코 이루어주시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이익을 얻는 데는 단지 우리가 염불만 하면 됩니다. 채식을 하고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닦고 밀교에서 말하는 수인을 맺고 관상을 할 필요 없이, 어떠한 사람이든 어떠한 시간 때든 어떠한 장소든 어떠한 행위든 모두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명호의 공덕이 초월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법문처럼 반드시 채식을 해야 하고 계율을 지켜야 하며, 선행을 닦아야 하고 수인을 맺고 관상을 하고, 혹은 다른 것을 조업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성껏 염불만 하면 수많은 소원들은 따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은 가능한 채식을 하고, 심지어 우유와 계란 등 알 종류와 꿀 등을 드시지 말아야 합니다. 동물과 관련된 것은 우리가 되도록 보살피고 보호하여 그들이 고통과 상해를 받지 않도록 해줘야 합니다.
불자들, 특히 염불하는 사람은 아미타불이 우리에 대한 자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집을 두 채 갖고 계시다면 본인이 한 채를 쓰고 비어있는 한 채를 집이 없는 사람에게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통장에 돈이 많이 들어있다면 쓸 만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돈이 없고 필요한 사람에게 보시를 해야 합니다. 아미타불께서는 극락세계를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는데, 우리는 극락세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면 불보살님과 천지신명께서는 열배, 백배를 보태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겁니다.
불교에서는 자慈·비悲·희喜·사捨를 가르칩니다. 그러니 최대한 베푸십시오. 베푼다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불성을 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불자는 반드시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도를 닦아야 합니다.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도를 닦으려면 반드시 자비와 무아 이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무아란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자비란 곧 타인을 성취시켜 주는 것입니다. 설사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타인을 성취시켜 줘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리심이요, 보리행인 것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은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매우 부끄럽게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토법문의 보리심은 바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마음, 즉 원생심願生心입니다. 왜냐하면 왕생만 한다면 성불을 하게 되는데 성불을 한 이상, 보리심과 보리행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널리 중생구제를 하게 될 테니까요. 따라서 정토법문이야말로 완전하고 철저하고 원만한 법문입니다.
정말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집이 두 채 있으면 한 채를 보시해야 하고 통장에 들어있는 돈은 최소한 반 이상은 보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규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지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염불만 하면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때 제 몸에 돈 한 푼도 없기를 희망합니다.
대만의 불광산사에서 인간정토를 주장하며 세상에서 정토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서도 정토회 등에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이 땅을 정토로 이룩하려 노력합니다. 이러한 인간정토, 현실정토 건립의 노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서방정토왕생발원과 현실정토의 실현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답: 인간정토는 하나의 이념일 뿐, 절대 실현될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인간정토를 제창하는 것은 불법의 쇠퇴와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만약에 인간정토가 실현될 수 있다면 부처님 당시 이미 실현되었을 겁니다. 부처님 당시 본인이 부처님이시고 그 밑에는 수많은 보살과 아라한들이 계셨는데 그들은 모두 증과證果를 한 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정법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도 그 때에 정토를 성취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지금 부처님도 안 계시고 성인도 없으며, 우리 모두 탐·진·치로 가득한 범부들이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정토를 제창하시는 분들, 그분들의 마음속에도 탐·진·치를 끊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먼저 무엇이 정토인지를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반드시 죄악과 더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몸과 국토가 모두 청정해야 합니다. 극락세계를 예로 든다면, 그 세계의 모든 의보(依報:거주 환경)는 전부 청정합니다. 경전에서 비록 칠보가 있고 무량한 보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법을 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청정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경계이기 때문이지요. 극락정토에 사는 대중들은 모두 번뇌가 없을뿐더러 신통이 있습니다. 이른바 옷을 생각하면 옷이 생기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이 생기는 등 무엇이든 변화해낼 수 있으니, 이것이 정토입니다.
우리의 이 사바세계의 의보에는 자연적인 지·수·화·풍의 재난이 있는데, 예컨대 지진이라든지, 물난리라든지, 수재·화재 태풍 등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 외에도 뜻밖의 재해가 있으니, 예컨대 교통사고라든지 비행기사고라든지 혹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각종 위험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지구상에 7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사람마다 모두 탐·진·치가 있습니다. 탐·진·치가 없는 사람은 아마 몇 명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수행자가 태어날 때부터 용맹정진하며 120세까지 산다고 치더라도 그는 죽을 때까지 탐·진·치를 조금도 끊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모두 인간정토를 주장하여 상대방에게 생사윤회가 있으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삼악도에 떨어질 수 있고 계속해서 윤회할 거라고 일러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죽어 윤회를 하고 심지어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불교는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생사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 불교는 어디에서 끝납니까? 생사의 해결에서 끝납니다. 따라서 불교의 특색은 바로 선악의 과보와 삼세인과·육도윤회가 있으며, 우리는 생사윤회를 끝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특색이자 불교의 목적입니다.
인간정토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이룩할 수 있다면 이미 굉장히 쉽지 않은 것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집이 있으면 다 같이 살고 돈이 있으면 다 같이 쓰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대동세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모가 나의 부모이고 다른 사람의 자녀 역시 나의 자녀이므로 나에게는 그들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봉양할 책임이 있고, 나에게는 그들이 다 클 때까지 부양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대동편에서 「자신의 부모와 어르신들을 봉양하고 효도할 때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노인들을 잊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자녀와 어린이들을 키울 때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어린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며, 또 「나이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 땅에 있는 자원들을 개발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되 개인이 남겨서는 안 되고, 어떤 일이 있으면 서로 다투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투기를 하는 자가 없을 것이고 강도나 도둑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밤에 문을 잠글 필요가 없고 길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에 누구도 손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천하가 모든 사람들의 것이고 대동의 세계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이는 공산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세계조차 건립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간정토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공산세계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사심이 없고 탐욕심이 없으며 사람마다 대중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초위에서 건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정토도 반드시 사람마다 마음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탐·진·치가 없어야 하며 죄업을 짓지 않아야 하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생·투도·사음·망어·음주 등 오계를 제대로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십선까지 지킬 수 있다면 최상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십선은 최소한 탐욕이 없고 화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의 탐·진·치가 조복을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최대한 작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몸과 입을 기준으로 한다면, 즉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는 현인賢人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업 즉 우리의 심리활동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람마다 선인善人일 겁니다. 그러나 만약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는 선인이 없고 온통 죄인들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불자로서 이 세계가 평화롭고 사회가 정화되며, 천천히 인간정토가 건립되기를 바라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육도윤회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언젠가 한 생에는 틀림없이 삼악도에 떨어지고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겁니다. 또한 미래는 현재를 벗어나지 않았고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에 있는데, 미래에 지옥에 떨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면 지금 우리는 안심하고 밥을 먹고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까? 이것이 가장 진실하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염불하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여서 장래에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되도록 대동세계를 실천해야 합니다. 다만 대동세계의 실현은 모든 사람들이 사심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나무아미타불속에 모든 공덕이 있어서 이것만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염불선이나 염불화두에서는 염불은 하지만 왕생발원을 하지 않고 극락은 따로 없다고 봅니다. 이런 사람은 왕생발원이 없음에도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무조건 왕생할 수 있나요?
답: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비록 왕생발원을 하지 않았지만 세간에 대해 집착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겠다든지, 혹은 천생에 태어나겠다든지, 혹은 어떻게 하겠다는 집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임종 시에 아미타불을 뵙게 되면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게 됩니다.
또 한 경우는 그에게 집착이 있어서 다음 생에 다시 사람이 되어 다시 불법을 배우며, 심지어 불법을 널리 펴기를 원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그런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므로 왕생을 못하겠지요. 하지만 다다음 생에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관정스님의 극락세계유람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에는 불신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스님생각은 어떠신지요?
답: 이 책은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보지도 말고 믿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 책은 경전의 말씀과 어긋나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작가 본인의 생각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법을 믿는 불제자는 이런 책을 유통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이 책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진정한 정토교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극락세계도 아주 좋구나, 나도 염불해서 왕생해야지’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것이 좋은 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속의 많은 지견들이 정확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홍보하고 유통을 시키려면 정확한 것을 홍보하고 유통시켜야 합니다.
타종교에도 선을 권장하는 책들이 있고, 민간신앙에도 선을 권장하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책들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들을 따라서 선양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들이 세간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이 있으나 우주와 인생의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 불교도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제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어떻게 해야 적절한지는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 극락세계에 가서 본 경계를 쓴 책들이 현재로서는 비교적 적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경전에서 극락세계를 묘사해놓은 것만으로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현대인이 극락을 다녀오셔서 현대의 언어로 써놓으면 아주 친근감이 있게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극락세계유람기, 천당유람기, 지옥유람기 등등의 책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극락세계의 모습이라든지 천당과 지옥의 모습들은 경전 속에 모두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다만 초심자 또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이런 유람기들이 더욱 인기가 있는 것이지요. 저희들이 출판한 서적가운데, 예컨대 염불감응록 속에도 몇몇 분들이 극락세계를 다녀오시고 쓰신 몇 가지 사례들이 있습니다.
염불수행과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염불선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착실한 염불인이라면 선정쌍수라는 미명美名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을뿐더러 가장 온당하여 만 명 중에 한명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염불하는 자가 누구냐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선종에서 명심견성을 목표로 삼고서 이 화두를 빌어 염불하는 자가 누구냐를 참구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는 화두참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샛길로 새는 것으로 불필요한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대부분 선종의 천하입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여러분께 여쭙겠습니다.
한국에는 진정한 선사가 계십니까? 계시다면 몇분 계십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헛수고를 한 게 아닙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만 있고 정토가 없으면 열에 아홉은 길에서 지체하나니 중음신 경계가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휩쓸려 간다.’ 선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확철대오를 해야만 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토가 없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잘못된 길을 가게 되어 좋지 않은 경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탐·진·치 번뇌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죽을 때 그의 업력이 나타나서 업에 따라 윤회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중음신경계가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휩쓸려 간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선을 하려면 이른바 업이 다하고 집착이 텅 비는 경지에 이르러 탐·진·치를 말끔히 제거해야만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여전히 육도윤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착실하게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염불에 대해 의심이 있다면 그가 설사 왕생을 하더라도 태궁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 태궁은 하나의 비유인데, 비록 왕생하였지만 잠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없고 대보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아직 어머니의 배속에 있으므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원인은 비록 염불하여 왕생을 했지만 아미타불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면서 참선을 한다든지, 아니면 염불을 하면서 진언을 외운다든지, 아니면 염불을 하면서도 다른 법문을 겸하여 닦는다면, 그렇다면 이는 부처님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단지 염불만 한다면 아마도 아미타불께서 나를 완전히 구제해주시지 못할 것이다.’ 혹은 ‘내가 단지 염불만 해서 왕생을 하게 되면 아마도 경계가 높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참선을 하고, 진언을 외우고, 독경을 하고 또 다른 수행공덕을 덧붙여야한다. 그래야만 아미타불께서 나를 구제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왕생을 하고 나면 나의 경계가 비로소 높아질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미타불께서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을 갖추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이란 바로 ‘당신을 구제하려 한다. 그리고 백프로 당신을 극락세계로 구제할 역량에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범부들과 같지 않습니다. 범부들은 차별적인 관념이 있지만 부처님은 그런 차별관념이 없으십니다. 어떠한 사람도 극락세계에 왕생만 하면 모두 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아미타불의 광명과 수명이 무량하고 자비와 지혜가 무량하므로 우리가 극락왕생을 하면 부처님과 똑같아집니다.
부모라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전부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바랄 겁니다. 게다가 자녀들의 지혜와 능력이 부모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용이 되기를 바라고 딸이 봉황이 되기를 바라는 천하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는 따로 배울 필요 없이 자연히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 앞에 계시는 부모님들! 이런 마음이 맞습니까? (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이시겠습니까! 그 분은 무연대자無緣大慈와 동체대비同體大悲를 갖추신 분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애연자비愛緣慈悲라고 부르지요. 이 자녀가 나와 혈연관계가 있으면 자연히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모두 자신처럼 봅니다.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면 천성적으로 자연히 모든 중생을 자신으로 보게 되므로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착실하게 단순하게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셔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극락왕생을 하더라도 바로 부처님을 뵙지 못하는데, 마치 태궁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장애는 본인의 관념이 장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에 가면 부처님께서는 매우 빠른 시일 내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마음이 바뀌게 해주십니다. 이 마음만 바뀌면 바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부처님의 평등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무엇 하러 염불을 하면서 또 참선을 하고 관상을 하며 진언을 외우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염불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답: 가장 중요한 것은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신심이 있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행·주·좌·와와 사·농·공·상 각자의 직책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시시각각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재밌는 드라마를 시청합니다. 그 시간만 되면 그는 누군가 방해를 할까봐 문을 잠그고 전화기 코드를 뽑고는 열심히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며 당신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현재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 때에 이 어머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텔레비전을 끄고 화장도하지 않은 채 대충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갈 겁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오로지 내 아들이 괜찮을까,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있을 겁니다.
극락왕생이 바로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자식입니다. 왕생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우리 모두 엄청 신경을 쓰기 때문에 염불을 잊지 않습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일을 하더라도 염불을 장애하지 않고, 염불을 하더라도 일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이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일이 되고, 생활이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생활이 됩니다.
두 구절로 된 시구가 있습니다. ‘대나무가 빽빽해도 흐르는 물을 가로막지 못하고, 산이 높다고 한들 어찌 떠다니는 구름을 방해하랴’
제가 늘 얘기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하루의 생활을 염불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시작할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먼저 고요히 앉아서 염불을 합니다. 당신이 앉아서 오분·십분·삼십분·한 시간·두 시간 염불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반복을 하면 자연히 염불에 인이 박혀서 습관이 됩니다. 인이 박히면 신경 써서 염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을 하게 되고, 하던 일을 마치고 나면 이 나무아미타불 명호는 자연스럽게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게 마음속으로부터 솟아오를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조금 넓고 빈 공간을 찾아서 경행염불을 하시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법등사) 하는 것처럼 몸을 편안하게 하고 발걸음은 느릴수록 가벼울수록 부드러울수록 좋습니다. 소리는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상관없습니다. 그다음 소리는 발걸음을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렇게 매일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씩 할 수만 있다면 아마 2,3개월이면 인이 박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염불할 때 눈은 함부로 보지 않고, 귀는 함부로 듣지 않으며, 반드시 정확하고 분명하게 불러야 합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당신이 길을 걸을 때 어디를 가든지 모두 걸음걸음마다 염불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차에 앉아서 별일이 없을 때 마음속으로 염불하고 입으로 염불을 하는 게 습관이 될 겁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고 기술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고 우리는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명을 하는 것입니다.
출처 / 순정시대 http://cafe.daum.net/sunsujeongto
혜정법사님의 아미타불은 어떤 부처님이신가 법문 바로가기 ☞http://cafe.daum.net/amtb/8L2t/621
어느 염불행자의 아름다운 수행 이야기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amtb/52mo/3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