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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동요 '산토끼'의 고향은 경남 창녕
- 故 이일래 선생 1928년 작사ㆍ작곡..일제치하 민족혼 고취
- 창녕군 올해 '산토끼공원' 개장, 관광자원화
(창녕=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 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 올테야'
신묘년 (辛卯年) 토끼해를 맞아 국민 동요 '산토끼'의 탄생 배경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2일 경남 창녕군 등에 따르면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가을 창녕군 이방면 안리에 있는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 재직하던 고(故) 이일래(1903~1979) 선생이 직접 작사, 작곡한 것이다.
이 선생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그가 딸 명주(당시 1세)양을 안고 학교 뒷산인 고장산에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노는 모습을 보고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우리 민족도 하루 빨리 해방이 되어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렸고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오선지에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
이렇게 탄생한 '산토끼'는 처음에 이방초등학교 전교생들이 부르기 시작했고 이웃학교를 거쳐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토끼 형상인 우리 국토를 연상시키고 민족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이유로 일제가 부르지 못하게 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이 선생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신을 숨겼고 해방과 6.25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산토끼' 노래는 작사ㆍ작곡 미상으로 남아 있다가 1938년에 출판된 '조선동요 작곡집'의 영인본이 1975년도에 나오면서 뒤늦게 그가 만든 노래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영인본에 실린 이 선생의 원본 노래 가사는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깡충 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 가아서/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로 돼 있다.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편리하게 노랫말이 약간 바뀌었다.
현재 이방초등학교 교정에는 이 학교 졸업생들이 힘을 모아 세운 이 선생의 흉상을 비롯해 산토끼가 풍금을 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노래비, 이 선생의 음악세계 등을 담은 각종 기록, 토끼사육장 등 '산토끼' 노래와 관련된 기념물들이 가득하다.
이 학교 박선아 교사는 "많은 분들이 산토끼 노래를 즐겨 부르지만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된 시기와 계기를 알고 난 뒤에는 새삼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학교 앞 마을 입구에는 '산토끼의 고장 이방'이라는 표지석을 비롯해 산토끼와 노랫말을 담은 벽화 등도 눈길을 끈다.
이방초등학교 34회 졸업생인 마을 주민 하재진(64)씨는 "일제치하에서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만든 애국의 노래가 우리 고장에서 내가 졸업한 학교의 선생님께서 만든 것이어서 더욱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창녕군은 불후의 국민동요인 '산토끼'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이 학교 뒷산인 고장산에 산토끼 노래에 얽힌 다양한 자료, 영상물, 체험장 등을 두루 갖춘 산토끼공원을 올해 개장한다.
김충식 창녕군수는 "토끼해를 맞아 산토끼 노래에 담긴 그 기상을 군민들과 함께 활기차게 되살려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choi21@yna.co.kr
< 저작권자(c)연합뉴스. >
이일래 작사.작곡 “산토끼 노래”
동요연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이일래선생은 창녕군 이방보통학교에 재직중이던 1928년 낙엽이 수북히 쌓이던 가을에 조국과 함께 음악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린장녀 명주양(당시1세)을 안고 학교 뒷산인 고장산 기슭에 올라가 잔디밭에 누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생의 바로 앞에서 두려움도 없이 깡충깡충 뛰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민족도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을수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리다 집으로 돌아와 오선지에 곡을 만들어 적고 가사를 붙여 “산토끼”를 탄생시켰다.
예부터 “빛벌의 고장”이라 불려져 내려오는 우리고장은 조상이 물려주신 우수한 문화재와 질박한 민속문화를 바탕으로 낙동강역 기름진 토양에서 풍요한 삶을 누려온 호국, 충절의 고장임에 틀림이 없을것 같다.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창녕(昌寧)을 “제2의 경주”라는 별명(제2의 지명)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관광지로 알려진 화려한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의 그늘에 가려져 빛벌에 “빛”이 내리지 않고 있다는 실정을 향토애(鄕土愛)라는 관점에서 냉철하게 생각해본다면 현존하는 상고시대(上古時代) 유적과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유물들을 집중연구하고 향토출신 학자 분들과 사계의 권위있는분들이 하루라도 빨리 모여서 군민과 함께 세미나 공청회등을 개최하여 우리고장의 특색있는 문화와 역사를 찾아 내어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고 할 것이다.
우리고장이 가지고 있는 부존자원은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문화자원(가야시대이후 전통민속, 유물) 자연환경자원(화왕산, 세계적인 습지 우포, 부곡온천), 관광자원(제2의 경주 - 문화재, 사적지, 빼어난 경승지)등 3대자산을 고루 갖추고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에서 우리들은 고장의 미래를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짜 내어야만이 혁신과 분권시대에 지자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 정치하는 사람, 행정하는 사람, 학자들과 군민모두 - 이구동성으로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30년이상 지방행정의 중심에서 주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우리문화를 지키고 가꾸어나가는 박물관에서 일할 기회를 가졌는바 지방행정이 그 시대를 앞서가는 시책을 발굴하여 지역산업을 발전시켜나가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느낀바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하나의 예로써 관광객유치를 위한 관광코스 개발은 5-7개 코스로 설정, 우리고장의 문화, 관광지 연계개발이라는 취지에 맞도록 도상으로 개발되어 있으나 이에 부수되는 세부조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구호에만 그친 사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정서순화와 동요문학을 우리고장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제강점기시 우리고장에 부임하신 이일래선생의 동요곡인 “산토끼”노래가 어떻게 창작되었으며 그 문학적인 정신, 음악가적인 미학(美學)은 무엇인지를 재조명하여 전세계 어린이를 대상으로하는 관광산업으로써 인근에 위치한 세계적 습지 “우포”와 연계개발되어야 한다.
「나의 젊음의 정열은 오직 어린이를 위하여 무엇을 봉사할 것이냐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이루어진것없이 나는 이미 황혼기를 넘어 영원한 세계로 기울어져 가고 있을 뿐입니다. 원컨대 이 노래속에 남아있는 「산토끼」를 귀엽고 예쁘게 이 江山에 널리 펴 나가면은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입니다.」- 이일래선생이 출판한 조선동요작곡집 서문에서
■ 이일래 선생 연보(年譜)
성명 : 李 一 來(본명 : 무근)
1903. 5. 10출생 (탄생후 101년)
본적 : 마산시 성호동 52번지
․ 1920~ 창신학교 고등과 졸업, 서울중동중학 입학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입학
․ 1927~ 3학년 중퇴, 마산으로 낙향, 창신보통학교 교사 재직
․ 1928~ 이방면 이방공립보통학교(훈도교사)
<산토끼>, <단풍> 작사, 작곡
․ 1930~ 복음농업학교(음악교사)
․ 1936~ 마산제비산에 있는 호주선교원(어학교사로 재직)
일본대학예술원 음악과 1년 수업
․ 1938~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출간-1,000부(그중 700부 호주등 외
국으로 배포)
※ 우리민족의 존재와 동요를 세계에 알림
․ 1940~ 마산여자 가정학교 설립(1943년 강제 폐쇄)
※15년간 교직생활을 떠남, 마산문창교회 성가대 활동
※<조선동요작곡집>재판출판기념회(1,000부인쇄)개최
․ 1947~ 만주에서 귀국, 경북도 초대 상공국장 역임(2년간)
미군정시 CIC 마산대장 통역활동
․ 1951~ 민선시장 선거시 청년부 활동
․ 1975~ 거주지 옮김(서울시 중구 필동 3가 27번지)
<조선동요작곡집>영인본 출판-마산의회 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
개최
※“월간음악”잡지 인터뷰에서 “마산 창신학교 재직때 일본인 교
장과 사냥을 자주가면서 토끼가 노는 것을 보고 집에 와 시를 짓
고 곡을 붙여 본적이 있다”라고 밝힌바 있다.
․ 1978~ 산토끼 노래비 건립(공사기간 9.28~12. 5. 제막식 12.8)
※ 노래비는 이방보통학교 27회 졸업생 하종달씨와 창녕교육청
협조로 공사비 100만원으로 하여 설계는 당시 정판범교장과 석
촌조각연구소장 최정교씨, 대구교육대학 미술과교수가 담당하였다.
※ 제막식에는 맏딸 명주씨와 함께 참석. 제자들로부터 기념패를
받으시고 “산토끼 작곡가는 내가 아니라 당시 조국을 잃은 슬픔
의 우리 민족이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함.
제2회 한국아동음악상 공로상 수상(1978년)
․ 1979. 7. 10 76세 일기로 작고함(당시거주지 : 경기도 양주군 화소면 가곡리
202)
※ 선영은 당시 거주지 천마산
■ 「산토끼」노래 창작의 동기
이일래 선생께서 작고하신지 101돌이 되는 2004년 어린이날 기념행사로써 (산토끼 노래의 발상지로써의 자긍심을 높이고 나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기 위하여)처음으로 기획된 “이방 산토끼의 꿈”축제가 5월 7일 이방초등학교 강당과 도서실에서 학부모님들이 초대되어 조촐하게 열렸다.
축제 기획자료에는 노래창작의 동기와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일래 선생이 이방보통학교에 재직중이던 1928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때이다. 선생은 학교 뒷산인 고장산에 뛰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민족도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까?”하는 생각으로 산토끼노래를 작곡하셨다. 특히 이 동요는 우리나라가 토끼형상이므로 민족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이유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며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창녕군 사이버타운의 산토끼 작곡유래에서는 이렇게 적고있다.
『이일래선생은 창녕군 이방보통학교에 재직중이던 1928년 낙엽이 수북히 쌓이던 가을에 조국과 함께 음악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린장녀 명주양(당시1세)을 안고 학교 뒷산인 고장산 기슭에 올라가 잔디밭에 누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생의 바로앞에서 두려움도 없이 깡충깡충 뛰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민족도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을수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리다 집으로 돌아와 오선지에 곡을 만들어 적고 가사를 붙여 “산토끼”를 탄생시켰다. 산토끼 노래는 일제의 압박속에 있는 국민의 심정을 토로한 억눌린 항일사상이 담겨있는 애국의 노래이며 동심을 가득담은 맑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어 작곡당시 처음에는 이방초등학교 전교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이웃학교를 거쳐 전국으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작곡자의 이력가운데서 선생의 성격을 『인정이 많고 자상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참지못하는 곧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의 제자들은 말한다. 이선생은 이방보통학교 재직시 산토끼를 만든 계기가 된 고장산을 자주 올라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혼자서 노을이 질 무렵이면 고장산에 올라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아마 당시 일제의 압박속에 있는 나라의 상황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이선생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고장산에 올라가 산책을 하는등 신학문을 공부한 개화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당시 제자들은 회상한다.』
■ 이일래 동요연구 사례소개
지역문학연구 제3호(경남지역문학회 1998. 9 간행 p59~78)에 개재된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함.
이일래 동요연구
김 봉 희
1. 들머리
동요<산토끼>를 작사․작곡한 작가 이일래는 나라잃은시기 가난과 슬픔에 빠져 있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밝고 순수한 동요를 통해 아름다운 동심을 키워준 교육자였다. 한 권의 동요집 발간외에 문단활동이나 대외적인 음악활동을 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조사되어 있는 것이 없다.
1938년 초판된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에는 <산토끼>, <봄노래>등 이일래가 직접 작사․작곡한 동요 13편과 이원수, 최순애, 이은상, 이광래 노랫말에 곡을 붙인 6편, 가극 ‘달팽이집’중에 곡을 붙인 <불이야>, 성서에 곡을 붙인<시편23>등 모두 21편이 실려있다. 1975년 영인본 발간 당시 이은상은 ‘책머리에서’나라잃은시기 이 책이 나오자 각처에서 작곡집에 실린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동요가 끼친 영향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까지 이일래에 대한 연구나 논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사에서도 이름조차 빠져 있는 상태다. 이 글은 이일래의 삶과 문학을 처음으로 학계에 발표하는 글이 될 것이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이일래의 삶을 가능한대로 복원한 뒤,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을 기초로 하여 문학성과 음악성을 분리하여 그의 동요가 가지는 특성을 다루고자 한다.
2. 이일래의 삶과 예술
1) 출생과 음악수업
이일래는 1903년 5월 10일 마산시 성호동 62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무근이었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는 극작가 이광래의 친형이며, 노산 이은상과는 동갑내기 당질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녀는 명주(장녀), 영주(차녀), 명학(장남) 1남 2녀를 두었다. 이일래는 1920년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에 있는 중동중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 때부터 음악에 대한 꿈이 부풀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일래의 스승인 김영환은 일찍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을 전공한 서양 음악가라 할 만한 이였다. 1925년 김영환이 출강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일래는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이일래가 음악에 기울인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수업을 받던 그는 홍난파가 퍼스트 바이올린, 이일래가 세컨드 바이올린, 김영환이 피아노를 맡아 YMCA에서 트리오로 연주 활동을 하였다.
2) 교사생활과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출간
19278년 이일래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3년을 중퇴하고,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때부터 그의 교육자로서, 동요작곡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창신보통학교에서 처음 교육자로서 맡은 바 길은 내딛게 되고, 이 무렵 작곡활동을 시작하게 되니 것이다. 그가 처음 작곡한 노래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이원수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고향>이었다.
1928년 이일래는 <산토끼>와 <단풍>을 작사․작곡하게 되고, 창녕군 이방면 이방공립보통학교에 훈도교사로 전근하게 된다. 거기에서 밝고 인자한 그의 성격을 보여주었다고 제자들은 회상하고 있다.
그가 내놓은 동요 <산토끼>는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멜로디에 재미있는 노랫말 때문에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산토끼>가 나라잃은시기 어린 아이들에서부터 노인들에까지 널리 불려졌지만, 민족 감정을 고무시켰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기고 해서, 정작 이일래는 노래의 작사․작곡자가 자신임을 밝히지도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산토끼>노래를 항왜정신이 담긴 노랫말로 바꾸어 불러 곤혹을 치른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930년에 복음농업학교 음악교사로 일터를 옮기게 되었고, 1936년에서 1945년까지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 성가대 지휘까지 맡으면서 많은 동요를 작사․작곡하게 된다. 복음농업학교 음악교사 시절과 문창교회 성가대를 맡았던 이 시기에 이일래는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 뒤, 복음농업학교에서 마산에 있는 제비산 호주 선교사 어학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이 곳에 있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그 동안에 작사․작곡한 노래들을 모아 1938년 조선기독교서관에서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을 출간하게 된다. 처음 출간시에는 모두 1000부를 찍었으나, 출판사 측에서 모두 회수해 갔다. 이듬해 1939년 다시 1000부를 찍어 700부 가량은 호주등 세계 작지로 배부되었다 한다. 나라를 잃어 민족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던 시절, 이일래의 동요는 우리나라에도 어린이를 위한 아름다운 동요가 있음을 알렸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존재도 알렸던 것이다.
게다가 이일래는 여성들의 신교육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1940년 마산여자가정학원을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왜로는 식민교육과 제국주의 교육을 강압해왔다. 이일래는 왜로 거듭된 탄압에 힘겨워 결국 1643년에 마산여자가정학원을 폐쇄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일래는 15여년에 걸친 교직생활을 떠나게 된다.
3) 사회활동과 <산토끼 노래비>건립
이일래가 교직생활을 그만 두고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광복 뒤였다. 그 무렵 그는 미군정 당시 CIC마산 대장의 통역을 맞게 되었는데, 아마도 제비산 호주 선교사 어학교사 시절 익힌 영어가 인연이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어서 그는 1947년에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을 역임하여 2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일래는 체육분야에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의 동생인 이광래가 마산 대표 축구 선수생활을 했을 때 이일래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일래는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마산 체육회 2대 회장을 맡게 된다. 체육회 재임시절인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서 1년간 공부를 하고 오기도 했다. 이 당시 백여 곡을 스케치 해 놓았으나 경인동란을 거치면서 모두 분실되고 타버려 단 한 곡의 노래도 남길 수 없었다는 아쉬움을 이일래는 밝히고 있다.
동란이 끝나자 <산토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이 노래는 널리 알려졌으나 작사․작곡자를 알 길이 없어, 교과서 편찬위원들은 처음에 작자 미상으로 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일래 자신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동요집이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산토끼>의 작사․작곡자로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1951년에는 마산 민선시장 출마설이 나돌 정도로 이일래는 작곡활동보다 사회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보여진다.
<산토끼>의 작사․작곡자가 밝혀진 것은 <산토끼>가 만들어진 지 반세기가 지난 1975년이었다. 그의 고향 친구가 1939년에 발간된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을 소장하고 있어 영인본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 계기로 <산토끼>와 이일래의 동요는 뒤늦게 주인이 밝혀지고,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이일래는 아동의 바른 성장을 돕는 데 이바지한 공을 인정 받아 1978년에 제2회 한국 아동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1978년 12월에는 제자들이 힘을 모아 창녕군 이방초등학교에 ‘산토끼 노래비’를 건립하였다. 노래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일래는 감회 어린 한 마디를 했다. 그는 동요작가 이일래 보다도 자신의 동요가 얼마만큼 우리 어린이들에게 밝은 동심을 키워주며 널리 불려졌던가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3. 문학적 특성과 순수성
동요는 ‘아이들의 감정이나 심리를 나타내는’ 노랫말 중심의 문학적인 요소와 곡을 전제로 하는 음악적인 요소가 결합한 두 영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승동요와는 달리 창작동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어린이」,「신소년」과 같은 잡지가 창간됨에 따라 속속들이 많은 작가들이 동요로 문단 활동을 하게 되고, 우리나라 동요는 근대문학의 영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어서 1930년대부터는 다양한 창작동요가 마련되면서 동요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에 실린 대부분의 동요들도 193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당대 활발했던 동요창작의 분위기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작사․작곡한 13편의 동요에 나타나는 문학적 특성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1) 형식
이일래 동요 속에 나타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나 자연의 모습은 밝고 순수하고 천진스럽기 그지없다. 이것은 이일래 자신이 어린이의 언어로, 어린이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동요라는 생각을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동요가 지닌 밝고 순수한 면은 먼저 가락에서 찾을 수 있다.
뒷동산에 꽃이피고
앞뜰에는 나비난다
나물캐는 동무들아
갔던봄철 다시왔네
강남갔던 제비들은
하나둘씩 짝을지어
처마끝에 집을지어
봄소식을 속삭인다
-<봄>
기러기가 날는다. 기러기가 날는다.
하늘공중 높이 펄펄 날는다.
앞에가는 기러기 소리높이 외치면
뒤에가는 기러기 열을 맞후네
-<기러기>가운데서
알뜰살뜰 가을바람 불어오면은
나뭇가지 잎사귀 잎사귀마다
노랑바지 홍저고리 가지각색옷
곱게곱게 입혀서 꾸며주어요
-<단풍>가운데서
앞의 <봄>은 2음보의 정형성을 가졌다. 그러나 두 행을 한 단위로 묶는다면 4음보로 보아도 자연스럽다. 곧, “뒷동산에 / 꽃이피고 / 앞뜰에는 / 나비난다” 가 되어 이일래는 음악의 4박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기러기>는 전형적인 4음보의 율격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4음보가 지닌 안정적이고 질서 잡힌 가락으로 줄 지어 나는 기러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이일래 동요의 노랫말은 대부분 4음보가 주는 안정감 있는 가락을 지니고 있어 따라 부르기가 쉽다. 그 밖에는 4음보의 율격을 지닌 동요로 <아침>, <산토끼>, <해바라기>, <다람쥐>를 들 수 있다.
맨 뒤에 <단풍>은 우리나라 고유 율격의 하나인 3음보에 맞추어 아름다운 단풍의 서정적인 모습을 경쾌하게 살려주고 있다. 가을바람이 쓸쓸하기는커녕 오히려 ‘알뜰살뜰’ 자연을 꾸미고,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밝고 경쾌한 인자로 그려지고 있다. <단풍> 이외에도 <봄노래>, <집떠난 제비>에서 3음보 율격에 얹은 경쾌한 분위기를 볼 수 있다.
3음보와 4음보는 우리 전통 노랫말을 이루고 있는 기본 율격 가운데 하나다. 이일래 동요에서도 3음보와 4음보가 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보다 자유롭게 변용시킨 몇 편의 동요도 보인다.
지붕위에 참새가
동산에 해가 떴다고
짹짹짹 짹짹
노래를 부른다
-<아침>가운데서
해님은 아버지 해바라기는 아들
얼굴이 꼭같이 닮았습니다.
아버지도 둥글둥글 아들도 둥글둥글
하루종일 쳐다보고 벙글벙글 웃지요
-<해바라기>
병정나팔 또또또
참말 듣기좋구나
하나둘 하나둘 척척척 척척
앞으로 앞으로 나가네
병정나팔 또또또
앞뒷산이 우루루
하나둘 하나둘 또또또 또또
발걸음 맞후며 나가네
-<병정나팔>
앞의 <아침>은 “짹짹짹 짹짹”이라는 참새의 노래소리를 표현하여 아침의 밝은 정서를 살려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단순한 생각에 친근감을 더해 주고 있다. <해바라기>는 해와 해바라기의 모습을 “둥글둥글”, “벙글벙글”이라는 의태어로 표현하여 해와 해바라기가 닮은꼴이라는 아이다운 재미있는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일래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빌어 아이들의 흥미를 북돋우고, 외워 부르기 쉬운 노래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병정나팔>은 신호나팔을 흉내내며 아이들이 부른 노래인데, 병정나팔 소리와 병정놀이의 재미를 나타재기 위해서 “또또또” “하나둘” “앞으로”와 같은 시어를 되풀이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표현 효과가 그리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시어들 반복으로 말미암아 병정나팔 놀이하는 아이들의 밝고 경쾌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밖에도 <반딧불>, <연>, <단풍>, <해바라기>에서는 의인법을 쓰고 있고, <별과 달>, <산토끼>에서는 이채롭게도 문답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일래 동요에 나타난 수사는 세련되거나 다양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2) 내용
1920년대, 1930년대 아동문학은 성인문학과 혼류되고 있음을 특징으로 삼는다. 곧 이들의 최대 공약수로서 민족주의, 교훈주의, 감상주의를 저마다 내보였지만 그것은 다시 주관적 동심주의 사고와 현실주의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20년 후반에서 1930년대에 창작되었던 이일래 동요는 그 당시의 흐름에 견주어 보았을 때 크게 주관적 동심주의 경향에 든다 하겠다. 곧, 어른이 아이들의 심성을 천사와 같이 고운 것으로 상정하고 그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노래하려는 것이다. 이일래가 직접 작사․작곡한 13편의 동요를 소재별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 자연물(동물, 계절, 기상) : <봄노래>, <봄>, <아침>, <산토끼>, <해바라기>, <단풍>,
<다람쥐>, <기러기>, <집떠난제비>, <반딧불>, <별과 달>
․ 일상 생활(친구, 가족, 놀이) : <병정나팔>, <연>
그의 동요에 나타나는 자연이나 어린이들은 모두 아름답고 순수하다. 푸르른 들판이나 산 속에 아름다운 꽃과 나비가 있고, 높은 하늘에는 아름답게 비치는 별과 달이 있고, 예쁘고 천진스러운 토끼나 다람쥐와 함께 뛰어노는 공간이 형성된다. 이일래는 밝고 순수한 마음이 가득한 어린이의 세계를 만들어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일래 동요의 또 다른 특징은 역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대상의 움직임이 재미있고 귀엽게, 혹은 서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동적인 성격의 동요라는 점이다. 그의 동요가 역동적인 것은 움직임이 날렵한 짐승과 조류, 의태어 가운데서도 동작이 큰 것, 동사의 빈번한 사용에 말미암는다.
알밤꿀밤 땍때굴
다람쥐가 쪼르르
가랑잎이 팔랑
다람쥐 눈이 똥글
가을바람 우수수
밤한톨 물고서
다람쥐가 나무위로 쪼르르
-<다람쥐>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
깡충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
-<산토끼>
“땍때굴” 밤이 굴러가면, 다람쥐도 그것을 따라 “쪼르르” 움직인다. 그 사이 가랑잎이 바람에 “팔랑” 거리면 다람쥐의 놀란 눈이 “똥글”해진다는 이야기를 지닌 시가 <다람쥐>다. 의태어의 사용과 잽싸게 움직이는 다람쥐를 통해 대상인 다람쥐의 귀여운 모습을 한 눈에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산토끼>는 철모르게 뛰노는 토끼의 천진스러운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동요 역시 “깡충깡충”이라는 의태어와 동작이 큰 “뛴다”라는 동사가 토끼의 움직임을 더욱 재미있게 표현해내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1)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일래 동요의 문학적 특성은 3음보와 4음보의 기본 율격을 사용했으며, 곡을 붙이기 위해 시어를 늘리는 등 변형형태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요 특유의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의성․의태어와 반복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아울러 그의 동요는 어린이 생활을 어린이들의 언어로 아주 친근하고 순수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로 인해 그의 동요는 마치 동심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4. 음악적 특성과 전통적 정서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은 동요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요소 뿐 아니라 음악적 요소도 잘 살려낸 작품집이라 볼 수 있다. 1930년대 당시 창작된 동요들이 지금의 동요 개념처럼 곡이 붙어져 노래로 불리어진 것은 아니다. 현재의 동시와 같이 노랫말만 남겨진 것이 있고, 곡을 붙여 악보와 함께 전해지는 동요들도 있다. 이일래 동요집은 모든 노랫말에 곡이 붙어진 수기본이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앞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이들이 이일래 동요가 지닌 음악성을 심도있게 연구․논의하게 되기를 바라며, 멜로디와 반주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멜로디
앞서 살펴본 이일래의 음악수업은 외국인에게 정식으로 양악 공부를 한 김영환에게 2년간 바이올린을 배운 것과 4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예술학원 음악과에서 1년간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마산 문창교회 성가대 지휘자 시절 많은 음악 ․ 작곡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성서 시편에 곡을 붙여 창작한 <시편23>은 지금도 어린이 찬송집에 실리어 많은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명곡이 되어 있다.
그는 처음부터 서양 음악과 악기를 배우고 익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전통의 음악성을 고집하고 있다. 멜로디를 주로 우리 고유의 음계인 오음계를 사용, 철저한 단선음악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어린이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우리 정서에 맞는 노래를 창작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불이야>는 가극 ‘달팽이집’에 나오는 노랫말에다 이일래가 곡을 붙인 노래다. 오음계를 사용한 단조의 곡조임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외에도 이일래의 동요들은 주로 오음계 곧, ‘도, 레, 미, 솔, 라’ 만을 사용하여 곡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일래는 이원수 노랫말의 <고향>과 최순애 노랫말의 <오빠생각>을 다 작곡하여 동요집에 싣고 있다. 그런데 <고향>의 경우는 홍난파가 곡을 붙인 <고향의 봄>이, <오빠생각>의 경우는 박태준이 곡을 붙인 <오빠생각>이 따로 있다. 우리가 오늘날 즐겨 부르는 노래는 홍난파와 박태준이 곡을 붙인 작품들이다. 이 곡들이 이일래가 작곡한 노래와 다른 점은 둘 다 칠음계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일래가 굳이 오음계를 따르고 있는 점과 대비된다. 그는 우리 정서에 맞는 곡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셈이다.
2) 반주법
1930년대는 피아노나 바이롤린 같은 서양악기를 접하기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일래 역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보았다고 서술한 바 있다. 하물며 마산이라는 시골에서 피아노를 구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곡자에게 있어 곡의 멜로디며 화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피아노나 오르겐은 필수적이었다. 그 당시 마산에는 호주선교학에서 문창교회에 기증한 오르겐 한 대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일래는 그 오르겐으로 곡을 만들고, 반주 부분을 넣었다고 한다.
이정구가 작사한 <외딴집>은 철저하게 반주부가 오르겐 포인트로 되어 있다. 이일래가 작곡할 때는 오르겐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또한 그 무렵 대부분의 동요들이 반주부 없이 실려져 있는데, 이일래의 동요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반주부를 싣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당시 악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일선에 있는 음악교사뿐이었을 것이다. 반주부가 실린 이일래의 동요집은 교사들의 좋은 음악학습 자료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이일래가 단순히 불려지는 동요라는 오락적인 뜻에서 더 나아가 체계적인 음악교육으로서의 동요 보급을 염두에 두었음을 뜻한다.
<노고지리> 동요의 한 부분인 ‘따뜻한 봄 들판에서 노래하는’ 반주부에서 ☞손표시는 오른손으로 새 우는 소리를 간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오르겐으로 맑은 새소리를 재미있고, 정답게 그려내도록 했다. 오르겐을 통한 재미있는 이러한 간주 부분은 어린이들에게 동요 부르기의 재미를 더하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일래의 동요는 모든 노랫말에 곡조를 붙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정서에 맞는 전통 오음계를 사용하여 반주를 삽입하여 동요의 세련미를 한층 살려 주고 있다. 그의 동요는 이러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더욱 부르기 쉽고, 재미있는 노래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이 많았던 것이다.
5. 마무리
이일래가 동요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하게 된 동기는 교사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마도 교사생활을 통해 어린이들의 생활을 그린 동심 가득하며,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생각된다.
이일래의 동요 속에 나타난 문학적 특성은 첫 번째, 형식에서 볼 때 리듬에 대한 고려를 들 수 있다. 기본 율격인 3음보와 4음보에다 노래 부르기에 알맞도록 변형된 율격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의성어, 의태어에다 반복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동요의 리듬감을 살려 내주고 있다. 두 번째, 내용으로 볼 때 철저한 어린이의 세계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린이들의 친근한 소재를 어린이의 언어로, 어린이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 순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움직임이 큰, 동적이며 경쾌한 동요를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동요를 들으면 깨끗하고 순수하여 마치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음악적 특성으로 그의 동요는 우리 고유의 오음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수 있다. 그 무렵 나라잃은 어린이들에게 그는 동요를 통해 민족적 정서에 보다 가까이 젖어 들 수 있도록 했던 셈이다. 또한 오르겐 반주에도 동요의 맑고 순수한 투명성을 살려 주려는 노력을 했으며, 음악교육에까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동요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동요는 그 무렵 좌파 아동문학인들이 보여 주었던 시대나 현실감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일래는 문단활동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천진하고 밝은 노래’만을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 동요를 통해서 바른 심성을 갖춘 어린이를 기르고 사랑하고자 했던 교육자로서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다.
<산토끼>의 작사 ․ 작곡자였던 이일래는 이제껏 세상 그늘에 오래 묻혀 있었다. 글쓴이는 이 연구를 통해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교육자로서, 밝고 순수한 동심을 심어주는 동요작가로서, 이일래가 우리 아동문학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한 발판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 이일래 선생 동요연구가 김봉희씨의 바람
- 산토끼>의 작사 ․ 작곡자였던 이일래는 이제껏 세상 그늘에 오래 묻혀 있었다. 글쓴이는 이 연구를 통해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교육자로서, 밝고 순수한 동심을 심어주는 동요작가로서, 이일래가 우리 아동문학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한 발판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 지역주민의 바람 - 고장산을 동심의 천국인 산토끼 테마공원으로 조성. 우포 생태공원과 연계하여 전국 어린이 관광객을 유치하자.
- 고장산에 노래비를 건립하고 밤나무 숲을 조성하여 산토끼를 길러 도시 어린이와 생태관람객을 위한 이일래선생 기념관 건립등 테마공원으로 시급히 조성하자.
■ 이일래 선생을 기억하는 학자 군민들의 증언과 바램
○ 죽서 임면섭(이방면 죽전리 거주. 80세) - 2004. 11월 채록
-78년 산토끼노래비 준공시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선생에게 직접 들은 바 “나라잃은 슬픔에 우리 아이들은 산토끼처럼 마음껏 뛰놀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떠올라 가사를 쓰게 되었다고 함.
- 산토끼 노래산실인 고장산을 산토끼 테마공원으로 조성하여 「동심의 천국」으로 만들어 우포생태공원과 연계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 지역민 소득증대에 기여토록 하면 좋겠음.
○ 하증홍(제23대 이방초등학교 교장. 67세) - 2004. 12. 26채록
-당시 이일래선생님은 토요일오후 방과후에 첫딸 명주를 안고 학교 기숙사뒷편 고장산아래 묘지가 있고 잔디가 넓은 현재 추원재(秋遠齊)있는 곳으로 산보를 갔었는데 산토끼가 겁 없이 뛰어지나갔다. 일제때 우리민족은 압박을 받고 있는데 산토끼는 자유를 누리며 뛰노는데 시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당시 이은상씨가 선생의 당숙으로 선생의 작품을 다소 수정하는등 손을 좀 보지않았나 싶다. 당시 교사와 사택은 6.25시 전소되었다고 함.
- 산토끼 노래 시원지인 고장산을 올라가보면 추원제앞에 잔디밭이 넓어 쉼터로 좋을뿐아니라 정상에 올라가면서 잔디가 더 넓은곳이 많아 고장산에 노래비를 건립하고 밤나무숲을 조성하여 산토끼를 길러 인근 우포와 연계하여 도시어린이와 생태관람객을 위한 기념관 건립등 「테마공원」으로 시급히 조성하여 주민소득증대를 가져오면 좋겠음.
-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교과서에 실어 널리 보급 전파되도록 하여야 하겠음.
○ 김봉희(1969마산출생, 경남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동요연극전공) - 2004. 12방문
- 문학사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아동문학의 성장기였음으로 음악가인 이일래선생이 교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동요창작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산토끼노래 창작동기에 대한 여러 가지 설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명확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향후 음악 전공학자와 공동으로 이일래 선생동요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임. 또한 선생의 인간성에 대한 가족들의 면담과 협조를 얻어 아동문학, 음악가로서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도록 하여 선생의 「공적을 영원히 기릴수 있는 사업」을 전개하여야 할 것임.
「더우기 이 작곡집의 저자 이일래는 나의 동향인이요, 동갑이요, 동창인데다가 집안에서는 내게 조카가 되는 사람이요. 또, 일찍이 그 작곡집 초판이 간행되었을때 .....(중략)....
요즈음 작곡들은 그야말로 현대의 혼탁한 공기에 물이 든 탓인지는 몰라도 어딘지 모르게 깨끗하고 순수한 맛이 덜한 것 같은데 이 노래들은 들어보면 저도몰래 어느결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느낄수 있다...」
- 조선동요작곡집에 수록된 노산 이은상선생의 서문에서 -
■ “산토끼노래”관련 기록물 자료발췌
○ 창녕군지(2000발행. 상 p459)
<이방초등학교 - 1978. 12. 8 “산토끼 노래비 건립”(“산토끼 노래”발생지)>
○ 창녕문화원지(1991년 발행)
향토사논고편(p62~p72, “산토끼 노래는 창녕이 산실이다.” 소담 김세호 기고)
○ 창녕군지명사(1992년발핼. p532-533)
<코장산(高長山)
내동뒷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7m. 이 산에 바위구멍이 있는데 구멍이 뚫려 소의 코처럼 생겼으므로 이를 소코덤(牛鼻岩)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 바위이름을 따서 코장산이라 하였다한다. 고장산은 코장산의 음훈차이다.
「산토끼」노래를 이일래가 이 산 기슭에서 아이를 안고 산보 나갔다가 토끼가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지었다 한다.>
○ 마산시사(1997년 발행, 문화체육편)
<Ⅳ 음악
1. 초창기 마산음악의 개화
… 한편 동요작곡가였던 이일래는 1938년 자신의 동요곡을 엮은 「조선동요작곡집」의 출판을 하였는데, 당시 이화예전 학장이었던 아펜젤러 박사의 영역가사까지 붙여 외국에도 우리동요음악을 소개하였다. 이 곡집에는 애창동요 「산토끼」를 비롯한 21곡이 실렸다. 「산토끼」는 이일래가 창녕의 이방초등학교에 교사로 재직중 어린이들에게 민족적 얼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사, 작곡했는데 항일사상과 동심이 잘 내포된 동요곡으로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출판당시 이일래는 마산에 있었던 호주선교원의 어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문학기행 주소록(www.imunhak.com.ne.kr)
<169 - 이일래 - 시비 - 경남 마산시 회원구 산호공원 - 산토끼>
※이방초등학교 산토끼 노래비는 미등재되어있음.
○이일래 조선동요작곡집(1938년 간행. 제2판. 영역:유안례, 삽화:유영완, p35)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차 례 >
1. 고향 李 元 壽 作謠 1
2. 봄노래 李 一 來 作謠 3
3. 산토끼 李 一 來 作謠 5
4. 해바라기 李 一 來 作謠 7
5. 봄 李 一 來 作謠 8
6. 귀뚜라미 金 泳 贊 作謠 9
7. 단풍 李 一 來 作謠 11
8. 아침 李 一 來 作謠 13
9. 병정나팔 李 一 來 作謠 14
10. 외딴집 李 貞 求 作謠 15
11. 다람쥐 李 一 來 作謠 17
12. 반딧불 李 一 來 作謠 18
13. 노고지리 李 殷 相 作謠 19
14. 기러기 李 一 來 作謠 21
15. 오빠생각 崔 順 愛 作謠 23
16. 불이야 歌劇 달팽이집에서 作謠 25
17. 달과별 李 一 來 作謠 27
18. 집떠난 제비 李 一 來 作謠 29
19. 엄마생각 李 光 來 作謠 31
20. 연 李 一 來 作謠 33
21. 시편(23) 聖書中에서 34>
[출처] 산토끼동요작사작곡가 이 일래 선생
<출처: 호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