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컬한 숫자]
*그의 인생은 ‘18년’이란 숫자와 연(緣)이 깊다???
A.[22세~39세]=18년
=22세(진사과=초시합격=소과小科=생원, 진사→성균관 입성)
=28세(대과大科=문과합격=성균관 규장각 초계문신→벼슬 가능)
=30세:진산사건(晉山事件-정조5년)으로 정적들에게 시달림
*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윤지충’이 모친상을 가톨릭교 방식으로
행함으로서 발단이 되어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하여
서적구입 엄금과 윤지충, 권상연을 사형 시킴.
=31세:부친사망
=33세:암행어사
* 1795년 정조가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 정치적 공세를 벗어나기 위해
좌천 형식을 취함(낮은 계급으로..)
(이가환=충주목사, 정약용=충남 금정 찰방, 이승훈=여산현으로 유배)
=36세(1797년):동부승지
* 천주교를 버렸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동부승지를 사직 하자, 임금은 그를
* 황해도 곡산부사(외직에 피해 있어라)로 발령하여 불길을 피함.
=38세:형조참의
* 성균관에서 6년 학문연마+벼슬살이 10년을 함.
* 벼슬 시절=사환기仕宦期 라고도 함.
=39세:처자식과 고향(마현)으로
* 참소(讒訴=남을 해치려고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 에게 일러바침)
하고, 시기(猜忌=샘을 내고 미워 함)한 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
B.[40세~57세]=18년..유배생활(장남18,차남15,딸13세 때)
[장기현(경상도 포항 근처)→서울 압송(황사영 백서 사건)→강진]
* 長鬐장기에서 7개월 지냄(詩=세상이 이렇구나!..모두가 곁을 떠나고..)
&.썩어 문드러진 나라를 건질 국가재건 프로젝트를 심서(心緖)
즉, 마음으로만 시물레이션 할 수 밖에 없었으니,
무너져 가는 나라를 그저 손 놓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그의 문집들을 가득 메우고 있다.
* 강진(1801년 추운 겨울에 도착)
&.도착 하면서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이제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늘이 나에게 학문을 연구 할 기회를 주었구나!
그동안 벼슬 하느라 당파에 시달리느라 책도 못 읽고 저술도 못
했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인 학문 연구에 몰두하자!! 화이팅~
..강진에서 4번 거처를 옮긴다.
→사의제(思宜劑=생각은 맑고, 용모는 장엄, 말은 과묵, 행동은 중후)=4년
→고성사 보은산방=1805년~1년
→제자 ‘이청’의 집=1806년 가을~약1년 반
→다산초당(‘윤단’의 산정)=1808년 봄~약10년
..이미 자녀 중 3남 1녀를 잃은 바 있는데,
막내아들 사망 소식을 접하고 비통함을 금할 길 없었다고 회고 한다.
또한,
각종질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학질의 일종인 ‘축일학’을 앓기도 하고,
=두통, 종기, 눈병, 팔다리 마비 등..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드뎌...역사는 바뀌고~~~
1800년 정조 사(死) 후(後)→1801년 천주교인 탄압과 大 박해사건
정조가 1800년6월28일 붕어 했는데,6월16일 규장각의 아전이
왔는데, 왕이 보낸 ‘한서선(漢書選=중국의 두 번째 왕조인 전한前漢
의 역사를 서굴한 책)’10권을 가져와 전하길..
“내가 그대를 그믐께 곧 부를 것이니 이책 중 5권의 책 이름을 써서
다시 보내시게..”라고 임금의 뜻을 전 했다고 한다.
그토록 약용의 글씨라도 보고픈 그리움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이다.
이것으로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끝을 맺게 된다.
이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 하면서
정약용을 기용코저 했으나, 노론 벽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서용보’의 적극적 반대!!!!!
→정약용이 암행어사 시절 고발당한 적 있는 인물
→영의정까지 함
→원한으로 불리함이 작용 했을 듯 하외다.
*동복同腹(같은엄마)의 3형제→감옥에 갇혀,
국문(鞠問=형장을 가하여 피의자를 신문=고문 하는 것) 끝에,
*일사이적一死二謫이 되다.
(셋째형 정약종=참형으로 죽고, 둘째형 정약전+약용=유배)
1801년(신유년)에 감행된 사건=뜻은 동일하나 명칭은 다름
→신사옥고(신유교옥,신유사화)=정약용의표현
→신유사옥=종교집단 체벌사건을 칭함
→신유박해=천주교측의 명칭
1801년11.22일 재再(다시) 유배길에 오르다
*나주에서 형은 흑산도로..(16년후 사망)
약용은 강진(18년 후 귀향)으로..이후 서로 한번도 못 만남.
C.[58세~75세]=18년..사망시 까지
*저술의 수정, 보완
*석학들과의 학문 교류
=노론계(대산,김매순,연천,홍석주)
=소론계(석천,신작)
*1836년 회혼일에(2월22일) 축하객 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상을 뜨게 된다.
&.유배 3년쯤 되었을 때..깨달음!!
자신의 운명이 ‘예외적 불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게 다~ 하느님의 뜻인 것을....하고서 말이다.
&.아모르파티[Amor(사랑) Fati(운명)]랄까?
→독일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임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 하지 마!!
→모든것을 다 잘 할 수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 이야!!
&.부당한 운명을 삭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샜을꼬?
* 혹자는 다산의 생애를 4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1단계(수학기 修學期)=유년시절~28세까지
2단계(사환기 仕宦期)=28세~38세(벼슬로 승승장구 시절)
3단계(저술기 著述期)=40세~67세(강진유배시)
4단계(정리기 整理期)=57세~75세 사망시까지
[임자를 만나다]
* 자고로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主君에게 목숨도 바치느니..
그는,
때(?)를 잘 만났고 운명運命(?)이었다고 할까요?
풍운지회를 통해 어수지계의 사이로 훌륭한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할 것이다.
본인의 자질을 알아주는 어진 임금과의 만남!!!!
風雲之會(바람과 구름이 만나야 이슬이 되거나 눈이 되는 조화가 일어남)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와의 만남으로 역사발전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회동을 표현한 것
漁水之契(물고기가 좋은 강을 만나 자유롭게 다님)
=임금과 신하가 뜻이 맞아 긍정적인 역사 창조가 진행 될 때의
두 사람 사이를 일컬음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역사를..]
조선왕조(27명 임금) 중에서 훌륭한 왕을 꼽으라면(각도, 판단 차이?)
영조와 정조대왕 때가 아닌가 싶다=초기(세종)후기(정조)→일반적 판단
정조(22대왕)는 영조(21대왕)의 손자이다. 왜? 아들이 아니지?
19대의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이 20대 경종 임금(이복동생)이고,
숙종과 숙빈의 아들이 21대가 영조 임금 이다.
영조는 6세때 ‘연잉군’ 책봉되고, 숙종이 죽자 대리청정하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 즉위년(영조=9세때)에 노론측의 압박으로(마침 경종도 후사가 없던터라) 세제책봉(효장세자)을 하게 됨.
경종이 즉위 2년만에(10세때) 병으로 사망 하자
영조가 왕위에 오름.(2남7녀를 둠)
* 2년후 사인이 독극물 살해로 판명되어 소론↔남인간 역모 싸움
영조는 재위 기간내 경종의 독살설과 아들(사도세자)죽임에 대하여
죄의식 속에서 보내게 된다.
영조는....
노론파의 택군으로 왕이 되었으나, 나중에 탕평책으로 인재를 쓴다.
정비(정성왕후)에게 자식 없고, 계비(영조66세↔정순왕후15세)도
후사가 없어서 후궁중 정빈이씨(1남1녀중 효장세자)와
후궁 영빈이씨(1남3녀중 사도세자)로 부터 아들을 얻는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아들보다 손자를 더 예뻐했다),
정조를 적통세자로 만들기 위해 (북한의 ‘백두혈통’이 흉내?)
반역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장자(효장세자)의 사후2년에
아들로 입적(8세때)시켜 ‘동궁’이라 칭하고 빈을 ‘혜경궁’이라
부여함으로써, 선문화 제스처와 사도세자 반대 벽파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게 됨.
*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썰(?)은 많다.
(정신병자? 신하들의 이간질? 당파간 이견의 희생양?..)
* 근래의 학자들=진짜 원인은, 정조의 아들에 대한 교육방침이
잘못된 것이 근원 이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정조에 대한 교육방식은 완연히 달랐다고 한다.
[사도세자교육]=조선의 전통적 교육방식의 장점과 원칙을 무시함.
1.무리한 조기 교육=15개월 때 세자책봉(당파의 분열구도에서
대대로 적통 세자를 이어가고 싶은 욕망?)
2.과도한 간섭=왕 자신이 직접 교육(질문과 답을 요구하고,
대답을 못하면, 네 스승을 자르겠다= 심적압박 등 부의 계획한
방향으로만 일방적 훈육)
3.간접적 경험 위주의 교육=궁 밖을 전혀 출입 금禁(현실상을
체득치 못하게 하다가 22세때 능陵에 제사 지내려 갈때서야
세상을 보게 함)
*궁궐내에서 왕의 체험담, 신하들, 스승의 업, 고전과 경전, 영조의 지침서..등만 가르침)
4.인색한 칭찬(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디...)
=꾸짖음과 쉬지 않은 질책, 더 강한 왕의 요구 등으로
사도세자는 두려움과 위축된 마음을 품게 되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17세에 낳았는데 우리 학문보다 청淸의
환타지 같은 것+무예를 더 좋아해 아빠의 노여움을 사게 됨.
반면,[정조에 대한교육]=후계자교육방식→사도세자와 상반된..
1.체계적인 눈높이 조기 교육(8세때 왕세자 책봉)
2.자율적인 교육 방식
3.현장 교육
4.무한한 신뢰와 격려=세손에게 대리청정 맡길때도 확실한
믿음으로 지원사격 함으로써→권력을 이양함.
영조의 정책=붕당대립 완화
붕당에 관계없이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고루 등용 하는
탕평책을 펼쳤고,
붕당의 근간 이었던 서원을 대폭 정비하였으며,
균역법 시행과 신문고를 부활함.
정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혼신의 힘을 기울여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이
세종과 정조라고 감히 주장 하는 바 올시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즉위년(1796년3월10일)의 윤음(임금님의 말씀)=취임 일성一聲
*나는 종통宗統(=왕통王統=왕의혈육 순서)이 아니다.
왜냐면, 부모 모두 왕과 대비를 하지 않았기에..
*허지만, 내 아버지에 대한 추궁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자는 즉, 형률로써 논죄 하겠노라!고 엄포
*대 원칙에 대한 최소한을 말하고 이를 거역하면 죽이겠노라!
=윤음과 훈유訓諭(가르치고 타이름)의 문서를 남긴다.
=윤음의 메세지는 뭘까?
아버지를 죽도록 만든 배신과 복수심과 분노도 있지만,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될까..? 하고 고심 끝에,
A:예禮와 정情(예도 중요지만 정도 중요=단, 정이 예를
앞서면 안된다=즉, 예가 중요한 나라를 세우겠다!)
B:공公과사私(멸사봉공滅私奉公=사는 멸하고 공을 만들자!)
*개인 욕심은 버리고 공공이익을 위하자
C:국가와 개인 모두를 위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
노론외 소론과 남인도 고루 등용하여 아버지의 탕평책을 계승했고,
초계 문신제(37세 중하위직 관리중 유능한 인물을 뽑아 40세 될 때
까지 ‘규장각’에서 연구에만 전념 하도록 함)를 시행 하고,수원
화성을 축조 하여 신도시 건설등...,문화 황금시대를 만듦.
수원(부의 묘)행차 가는 길(연인원 5십만명 동원)을 만들었고,
행차 도중 서민들의 실상과 애환의 소리를 청취하기도 했다.
그는,
18c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마흔 아홉 길지 않은 생 을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왕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온 인물 이라 할 것이다.
허나,
그 뜻을 완전히 펼치지 못하고 장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왕 이었다.
&.죽음 의혹=심환지(노론의 대표)가?... 과로사?
...
...
정조의 죽음으로 정약용과의 군신 관계는 끊기고, 벼슬도 못하며
오랜 귀양살이 신세가 되는 운명을 접 하게 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