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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고문에 죽어나가는 사람들
증언자 : 강길조(남)
생년월일 : 1942. 4. 5(당시 나이 38세)
직 업 : oo방직 노무계장(현 oo방직 노무과장 대리)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5월 20일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 근처에서 공수대와 대치중인 차량시위 대열에 참가하여 군과 시민 사이의 중재를 서다가 구타, 연행당한 강길조 씨의 증언
우여곡절의 인생
내 고향은 장성이다.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기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갓난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일본 놈들한테 징용을 끌려가 생활이 곤란했던 탓으로 어머니가 장사를 다니시는 바람에 젖을 굶을 때가 많아 죽을 뻔했던 것부터 어쩌면 내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으로 끌려가신 아버지는 함께 끌려간 친구분과 함께 일본의 어느 수력발전소 부근에서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는 도중에 아버지 친구분은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농사일 잘 한다고 농장주인 눈에 띄어 일본 여자와 가결혼해 살다가 해방이 되자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서부터는 생활형편이 좋아져 장성터미널 앞의 약방을 비롯, 장성읍내에 3개의 점포를 가질 만큼 넉넉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여 장성에도 인민위원회가 들어섰다. 그들이 장성읍으로 들어와 인민재판을 하면서 아버지가 부자라 하여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들은 새끼로 온몸을 묶은 다음 우리 마을 인민위원장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넘겼다. 그런데 그 인민위원장은 우리가 경영하던 방앗간 직공(나씨)이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이 옛정을 생각해서인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장성군 서산면의 어느 동굴에다 숨겨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국군이 다시 마을로 들어왔을 때, 부역자라고 고초를 당하는 그 사람을 아버지가 구해 주었다.
그런데 국군이 들어온 다음 아버지는 또다시 큰 고초를 당하게 된다. 당시 보병 20연대 소속 '유도현'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가진 재산을 탐내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린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겨울에 군용 담요 같은 천으로 한복을 지어 입고 다니자 군물품을 빼돌렸다며 끌고가 두들겨팼다. 자세한 경위는 잘 모르지만 결국 그 사람의 의도대로 읍내에 있는 가게와 땅을 뺏겼다.
그 뒤로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고 술로 나날을 보내며 남은 재산마저 탕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생활이 어려워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해 벌어놓은 돈까지 가지고 가출해 버렸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한 방에서 7명(어머니와 우리 형제 6명)이 생활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
우리 집 재산을 뺏어간 '유도현'이는 지금도 장성에서 살고 있는데, 내가 구태여 원수를 갚지 않아도 하늘에서 벌을 주었는지 그 집 딸이 절름발이 병신이라고 했다.
나는 장성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전남공고에 특별생(납부금 7백원 면제, 도비장학금 9천 원 지급)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실업계 고등학교라 대학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서울 충무로 2가에 있는 '한국 대우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별의별 일을 다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4·19를 만났다. 4·19 때 나는 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파고다공원에서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고 미군 트럭을 개조한 것을 끌고 다니다가 연료가 떨어져 남산 근처에다 버렸다. 가두에서 시위를 할 때 보니 경찰과 시위대가 밀고 밀리면서 싸우는데, 경찰이 총을 쏘아대면 시민들이 재빨리 골목으로 숨었다. 텅 비어 버린 길바닥에는 총에 맞은 사람들과 급하게 도망치다가 벗겨진 검정 고무신이 까맣게 널려 있었다.
그러면 큰 바구니를 짊어진 넝마주이들이 나타나 부상자와 시체, 검정 고무신들을 쓸어담고 사라졌다. 그런 다음 또다시 시위군중이 모여들고, 경찰은 또 총을 쏘고.... 이런 식의 시위가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그 뒤 5·16으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는 집에 내려와 놀고 있었다. 그랬더니 무직자라 하여 '국토개발대'에 끌고 가 한 달 동안 강제노역을 시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나와 내 친구 한 명이 돈 3천 원을 들고 병무청에 찾아가 군대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심사과정에서 친구는 탈락되고 나만 통과되어 공병학교로 갔다가 기관병으로 차출되었다. 거기서 다시 카츄사 선발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미7사단으로 배치되었다.
다시 한국군 1군사단으로 넘어와 간부후보생 훈련을 받고 공병대 작전보좌관으로 일하다 예편했다. 그런데 공병대 작전보좌관으로 있을 때 부하와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사고를 당해 부하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것 때문에 예편 당시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가 1989년 1월에 '소위' 계급을 되찾았다. oo방직은 예편하면서부터 입사해 21년 동안 근무해 오고 있다.
협상을 중재하다 붙잡히다
1980년 5월 20일 회사에서 퇴근 후 양동 복개상가를 지나다가 공수들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최루탄이 터지고 학생들이 쫓기거나 두들겨맞는 것을 보니 너무나 살벌했다. 처음에는 나도 겁이 나서 도망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소유하고 있던 자가용(부리샤 2)을 몰고 다니면서 시위대에게 양동과 월산동 지역의 도망가기 쉬운 골목들을 가르쳐주고, 어디어디에서는 지금 공수부대 와 대치중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양동 복개상가 앞 임동 쪽, 광주공원 앞 월산동 쪽에서 주로 공수부대와 시민들이 대치중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오후 6-7시경, 무등경기장에 택시와 버스 등 차량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자가용을 몰아 무등경기장으로 갔다. 무등경기장에서 광주역으로 나가는 도로가 차량으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전차량이 양쪽 차선을 다 메운 채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차량들은 20-30명 정도의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공수대들은 최루탄과 착검된 총을 가지고 도로를 횡대로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시민들은 대개 차 안에 타고 있었다. 트럭의 적재함에도 사람이 가득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 측 도로에 주로 차량 시위대열이 있었으나 차츰 시외곽에서 온 차나, 나중에 와서 사정를 잘 모르는 차들이 왼쪽 도로를 메우는 바람에 순식간에 차량대열이 고가도로 근방까지 이어져버렸다.
나는 간신히 차를 도로 옆으로 빼내 롯데제과 앞에서 옆 골목으로 들어가 주차시켜 놓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맨 앞으로 간 나는 공수대 지휘관(중령)과 시위대의 대표격인 청년(빨간색 티샤쓰 차림, 스포츠 머리, 180센티미터쯤 돼보이는 큰 키에 몸집이 좋았음)을 불러 말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겨누어서도 안 되고, 우리도 군인에게 돌멩이를 던져서도 안 된다. 가까이 있으면 적대감이 커지니까 적대감을 가라앉히고 양쪽으로 10보씩만 물러서자."
고 제안했다. 양쪽 대표들이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공수부대들도 10보 물러 서고 시위대도 '뒤로 10보'를 외치며 물러섰다. 그런데 시위대 쪽에서 뒤편의 차량들로 인해 더 물러서기 어렵게 되자 시위대 뒤쪽에서 '거짓말이다', '사기다'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엄청나게 쏘아대며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그때 나도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무수히 구타 당하고 정신을 잃었다. 심한 압박감으로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며 눈을 떠보니 트럭 짐칸의 맨 밑바닥에 짐짝같이 깔려 있었다. 내 몸 위로 대여섯 명의 몸뚱이가 쌓여 있었다. 기절한 나를 트럭에 던져놓고, 그 위에다 나하고 같은 꼴이 된 수 많은 사람들을 던져 실었던 것이다.
트럭에 실려 무수한 발길질과 곤봉 세례를 받으며 도착한 곳이 전남대학 어느 건물 앞이었다. 전혀 자세한 위치는 기억할 수 없고 시간은 해지기 전이었다.
전남대로 끌려가서
어느 강의실로 끌려들어가서 군대에서 받는 유격훈련과 같은 기합을 받았다. 손을 뒷머리에 붙이고 무릎꿇고 허리를 펴고 눈동자를 고정시키는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 사이 말할 수 없이 구타를 당했다. 매일 수백 대씩 구타당했다. 장교들이 백여 대를 때리고 가면, 이어 하사관들이 와서 다시 구타를 하고, 다음엔 사병들이 또 그렇게 했다. 그렇게 구타당하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을 몰랐다. 정신없이 맞다보니 왼쪽 팔이 힘이 없어 저절로 내려졌다. 그때서야 팔이 부러진 것을 알았다. 부러진 팔이 말을 안 듣자 자세가 불량하다며 M16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공수대원들은 상당수가 월남전 얘기를 입에 올리기를 잘했는데, 그중 한 명은 대검을 빼어들고,
"이 대검은 월남에서 배트공 여자 유방을 사십 개 이상 자른 기념 칼."
이라고 자랑하며 그 대검으로 앞사람의 더벅머리를 탁 쳤다. 머리카락이 베어지면서 스포츠 머리처럼 되었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주소를 '양동구'라고 대답하자, '동'이면 '동'이고 '구'면 '구'지 양동구가 뭐냐고 하면서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혀를 깨물어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러자, 더욱 '악종'이라면서 구타가 추가되어 끝내 개구리처럼 바르르 떨다가 뻗어버렸다. 끌려간 후 처음 목격한 사망자였다. 나이는 40대 초반쯤 되어 보였고 마른 체구에 눈이 유난히 빛나 인상적이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물 한 모금도 못 먹고 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구타만 당했다.
시체를 카메라로 찍고 가마니로 덮어
다음날 포승줄로 손이 묶이고 굴비처럼 엮어진 채 서 있는 자세로 병기수송 차량도 같은 밀폐된 트럭에 실려갔다. 한 트럭당 삼십 명쯤 탔는데 작은 유리창이 양쪽으로 두 개가 있었고 유리창 바깥쪽은 철망이 씌워져 있었다. 차는 전남대 후문쪽으로 빠져나갔다. 유리창 틈으로 내다보니(나는 팔이 부러져서 뒤로 손을 묶이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을 움직이가 편해 간신히 유리창으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전남대 정구장 쪽 비탈에 두 명의 아가씨가 가슴에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고 씌어진 천을 두른 채 움직이지 않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이송되는 도중 그 밀폐된 차 안에다 최루탄을 쏘았다. 순식간에 생지옥이 되었다. 전원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쌌다. 나는 숨이 차서 머리로 차의 유리창에 들이받아 유리 파편이 무수히 머리에 박혔다.
목적지(광주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내가 탄 트럭에서만도 서너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살아 있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최루탄 때문에 얼굴 피부가 벗겨져 지도를 그려놓은 듯 빨갛게 되어 있었다. 나중에 다른 트럭에 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다른 트럭에서도 서너 명씩은 족히 죽어나왔다고 했다. 처음에 연행되었던 사람들은 108명이었는데, 그 뒤로도 계속 잡혀들어 왔으므로 이송 당시의 전체적인 숫자는 더 많았다. 차에서 내린 장소는 교도소 면회실 근방이었는데, 우리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원산폭격' 기합을 받았다.
차에서 죽어나온 시체들은 옆으로 차례로 눕혀졌고 공수들은 주전자로 물을 붓거나 오줌을 싼 뒤 시체의 얼굴을 군화발로 문질러 씻었다. 그리고 공수 한 명은 시체들의 가슴 위에 일련번호를 쓴 판(나무판 혹은 합판)을 대었고, 다른 한 명은 뒤따라가면서 시체 하나하나를 카메라로 찍은 뒤 가마니로 덮었다. 우리가 원산폭격 자세로 있으면서 고개를 약간 돌려 이 광경을 보려고 하면, 공수들이 군화발로 눈알을 찍었다. 군화발과 M16 개머리판으로 허리, 어깨, 머리 등을 가리 지 않고 아무 데나 찍어대는 등 무차별 구타가 가해졌다. 나는 팔이 부러졌던 상태였으므로 그것을 핑계로 픽픽 쓰러지면서 시체에다 일련번호 매기고 사진찍는 것을 눈여겨 봐두었다.
구타당하던 중 매에 못 이긴 한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돈으로 안 될 게 뭐 있느냐. 돈 먹어라!"
라고 소리치면서 자기 옷 속에서 만 원짜리 묶음 4뭉치를 꺼내어 확 뿌렸다. 지폐들이 원산폭격 자세로 있는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공수대 여섯 명이 그 사람에게로 달려들어 M16 개머리판으로 짓이기자 그 사람은 이내 쭉 뻗어버렸다. 그리고 원산폭격 자세에 있는 우리 머리 위로 총성과 함께 총알이 핑핑 지나갔는데, 총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시체처리 장면을 못 보게 하기 위한 위협사격인 듯하였다.
갈증으로 오줌을 마시는 사람도...
그런 후 우리들은 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사형집행자 대기실)에 수용되었다. 며칠째 물 한모금 입에 대보지 못했으므로 탈진상태에 빠진 우리가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자 공수 한 명이 "야, 오줌 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수 한 명이 즉석에서 물컵에다가 오줌을 싸서 주었다. 한 사람이 그걸 덥썩 받아 마치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받아마셨다.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그 때 느꼈던 치욕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창고에 수용된 후에도 무릎을 꿇은 채 대검, 곤봉, 총 개머리판, 군화발 등으로 매일 수백대씩 구타당했다. 이러한 살인적인 구타는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공수들이 우리에게 행했던 잔혹행위 중에도 '눈동자 고정시키기'를 하다가 눈동자가 약간 돌아가면 피우고 있던 담뱃불로 눈동자를 지져버리거나 뒷짐을 지고 가슴을 내밀게 해서 가슴을 곤봉으로 구타했다. 그때 '퍽, 퍽' 하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교도소에 도착한 다음날은 잡혀왔던 예비역 해병 중사(본인이 그렇게 신분을 밝혔음)가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나 죽여라."
하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오냐, 죽여주마."
하면서 5, 6명이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또한 그들은 작전 나갔다가 대원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그 시체를 갖다놓고, "너희 같은 놈들이 죽였다. 너희들도 이렇게 죽어봐라." 하면서 짐승을 잡듯이 두들겨패서 한 명씩 한 명씩 죽였다.
그들은 또한 그야말로 광적으로 대검을 휘둘렀는데, 한 사람에게 대검으로 머리를 치자 대검이 머리 끝에서 튕겨져 나가면서 그 사람의 머리껍질 한쪽이 벗겨지고 하얀 해골이 나왔다. 그 부위에 빨갛게 피가 몰리다가 다시 새하얗게 해골이 보이는 식으로 반복되다가 결국 죽었다.
대검으로 어깨의 살을 포뜨기도 했고, 무릎꿇은 자세에서 발가락을 바짝 곧추 세우고 있게 하다가 견디다 못해 발가락이 펴지면 대검으로 발가락을 짓이겨 버렸다. 일명 '닭발요리'라고 하는 기합이었는데, 말 그대로 닭발을 쪼듯이 탁탁 두들기며 짓이겼다.
피는 낭자하게 흐르고 치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희생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매일 몇 명씩 죽어 시체가 옆에 쌓였다. 헬리콥터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시체를 어디론가 싣고 갔다. 도청 진압작전이 벌어졌던 27일경쯤에는 포로가 된 우리들에 대한 고문도 절정에 달했다.
날마다 죽어나가는 사람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하루가 지나봐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리목숨보다 더 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날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켰다. 몇명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소리를 지르며 공수들에게 달려들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공수들의 손에 의해 죽어갔다. 차라리 한 사람씩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죽이기나 하면 더 나을 것 같았다. 날마다 함께 맞으면서도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 넘어지는 꼴을 보고 있자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날마다 죽어 헬리콥터로 실려나간 시체들의 숫자는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시체뿐만 아니라 중상자들도 실려나갔는데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공수들이 작전 나갔다 들어올 때는 포로들이 계속 잡혀 들어왔다. 그중에는 총에 맞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몸에 총구멍이 17개나 나 있었는데 처음에는 살아서 움직였으나 곧 죽었다. 총에 맞아 잡혀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얼마 못 가 죽었다. 총상을 입은 사람들의 상처는 금방 썩어갔고 구더기가 들끓었다.
우리는 시체들 틈에서 식사와 대소변을 봤는데 똥오줌도 잘 나오지 않아 일을 보는 도중에도 구타당하는 일이 잦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체념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보는 앞에서 대소변을 볼 수 있었다.
식사는 꽁보리밥에다 마늘장아찌(마늘 잎사귀부터 뿌리까지 절인 것)와 생된장이 전부였다. 밥 먹을 때마다 파리가 들끓었다. 시체를 비롯 대변통, 소변통, 총상입은 사람의 상처 구더기 위에 새까맣게 달라붙었던 파리들이 밥으로 날아왔다. 아무리 쫓아도 잘 날아가지도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 2층으로 한 사람씩 불려가 보안사 합동수사요원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구타는 공수부대 일등병이 맡아서 했다. 그 자가 정신봉이라는 것으로 허리 중앙을 치면서, "나가거든 성생활을 못하도록 병신을 만들어주겠다."고 폭언을 하며 심하게 구타하였다. 그때 맞은 허리의 통증 때문에 지금도 꼿꼿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장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협조는 하지 않고 오히려 반란을 일으켰다고 최초 연행자 108명 가운데 특별관리 7명(장교 출신, 현역 방위병, 전신전화국 직원 등)에 포함되어 있어서 사뭇 절망적이었다. 그러다가 비행장 방어를 목적으로 부대이동이 있어 우리를 20사단 병력에게 인계했을 때, 방금 연행되어 온 사람과 웃옷을 바꿔입고 특별관리에서 풀려났다. 20사단 병력에게 인계되었을 때는 5월 말일경이었던 듯 싶다.
공수부대 병력이 20사단으로 교체된 후 우리는, "가혹행위가 조금은 덜하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그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마치 공수부대와 잔혹성을 경쟁이라도 하듯이 이중위라는 사람이,
"우리는 최전방에서 북괴군 목을 베어오고, 우리 전우도 목이 잘리는 DMZ에서 왔다. 공수부대 그까짓 새끼들하고 우리는 질적으로 다르다."
면서 쇠파이프로 앞정강이를 까고, 허리와 무릎, 머리를 가리지 않고 구타했다. 특히 '이젠 잠을 좀 잘 수 있으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마저 허망하게 무너졌다.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눈도 뜰 수 없도록 했다. 워낙 많이 맞아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견디는 것이 우리로서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그들은 우리를 일으켜세우고 극심한 구타를 가했으며 보통 두 번쯤 구타당하고 나면 날이 새었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때문에 잘래야 잘 수도 없었으며 그저 편히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각서를 쓰고 풀려났지만
그 후 상무대로 이송되었다. 거기서도 구타는 계속되었지만 훨씬 견딜 만한 것이어서 이젠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천당에 온 기분까지 들었다. 대소변을 보러 다닐 때는 눈을 가리우고 앞사람의 뒤허리를 잡고 줄을 지어 다녔다. 석방되는 6월 4일까지 교도소에서 벗겨진 머리, 얼굴, 팔, 다리, 몸통, 가슴, 허리 등의 외상을 치료하면서 지냈다.
석방되던 날 나와 내 가족에게까지 협박하여 각서를 받아갔다. 각서의 내용은 둘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결코 그동안 겪었던 것, 보았던 것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발설하면 그때는 죽을 줄 알라고 위협했다. 석방 후 몇 년간은 매월 어김없이 자필진술서를 받아가는 등 감시를 받아왔다.
회사에서는 연행기간 동안을 결근 처리하였으므로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많이 망가져 버렸다. 지금은 고문 후유증으로 두통, 빈혈이 심하고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으며 양쪽 코가 잘 막혀 호흡장애가 심하다. 또한 어깨 통증, 오른팔 근육파열, 왼쪽팔 골절, 왼쪽 갈비뼈 2개 골절 등으로 양팔이 마비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가끔씩 '재털이 만들기' 고문(담뱃불로 눈알 지지기)과 '닭발요리' 고문을 당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나면 잠자리에서도 깜짝깜짝 놀라고 하루에 소변을 수십 번 보아야 하는 등 견딜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가슴과 머리를 곤봉으로 구타할 때 나는 '퍽퍽' 소리의 환청이 들린다. 지금에 와서도 부도덕한 일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서, '나 같은 동물이 간섭할 일이 아니지.'라고 자조하다가 순간적으로 후회감이 들면 한없이 슬프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힌다. 술을 마시면 아무렇게나 타락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석방 후에 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함께 고통당했던 동료들 중 상당수가 아직까지 병원 문 앞에도 못 가보고 자가치료를 하면서 두려움 때문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죄스럽고 가슴 아프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진단서도 없어 보상문제에 있어서 더욱 불이익이 클 것 같다. 내가 신고를 하고 부상당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해도 당시의 충격 때문에 "조용히 살고 싶다"고만 말하며 움츠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능력을 잃은 채 시름시름 8년째 앓고만 있다.
나는 지금 5·18 부상자협회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당시 공수부대의 유중령(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알았음) 등 장교들의 대화 속에서,
"전라도 새끼들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
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사건(5·18)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광주를 공격대상으로 삼았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들은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던 나를 '자가용을 몰고 시위대를 진두 지휘한 김대중의 심복'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김대중이가 네 애비냐?"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
"김대중이가 빨갱이인 줄 몰랐냐?"
라는 말을 수없이 퍼붓었다.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공수부대의 강창수 상사인데, 그는 우리 앞에서
"내가 강창수 상사다. 나는 월남전에도 나가봤고 부마사태 때 진압도 나가봤다. 부마사태 때 스크럼을 짜고 데모하는 동아대학생들 속에서 맨 앞에 있는 내 동생을 보고 그놈부터 잡아 족치려고 달려갔으나 동생 놈은 놓치고 동생 친구들만 잡혀서 그놈들을 영도 앞바다에 던졌다. 또 그날 저녁에 민간인 한 명을 검문했는데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라는 신분을 밝혔다. 그래서 내가 '이 새끼, 정신 없군. 어디를 얼씬거리고 돌아다녀?' 하면서 개패듯이 패주었다"
고 하면서 자기의 악랄함을 과시하였다.
또 하나 알고 있는 사람은 김성곤 중위인데, 이 자는 당시 대민선무 방송을 하고 다닌 자로서 대검을 빼들고, "너희들 중에서 주먹으로나 칼로나 나를 당할 자 있느냐?" 면서 아무 힘도 없는 포로들을 위협하였다. 그의 형인 '김영곤'이 나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몇년 전 그 친구가 간경화로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더니 바로 그자가 대위계급을 달고 휴가를 나와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때 자네가 맞지? 기억하나?"
하고 물었더니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찰을 보니 김성곤이었다.
1980년 이후 몇 년 동안 사찰이 있었다. 매달 정보과 형사가 직장으로 찾아와 "내가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하는 내용의 '자술서'를 받아갔다. 주소, 생년월일, 식구 이름, 직업 등 지극히 형식적인 내용들을 매달 쓰라는 것이었다. 그런 것에 시달리느라 특별히 어느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지는 못했다.
(조사.정리 김혜형)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