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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끝나지 않은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터사랑(김승규)
▲ 망월동 5.18 국립묘지(사진 : http://dcinhyu.net/ 에서 가져 옴) 바윗돌 - 정오차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세상 만사 야속타고 주저 앉아 있을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안개낀 아침에는 고독을 삼키고 세상만사 야속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정오차는 81년 바윗돌로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았으나 얼마 후 방송출연 중에 ‘그해 광주에서 죽어간 친구들을 추로하여 곡을 만들었다’는 수상 소감 때문에 금지곡이 되고 가수의 길도 접은 비운의 가수입니다. 81년 대학가요제 당시의 실황영상을 올렸습니다. 2부 동영상 중에서 약 29분 부터 나오고 마지막에 대상 수상 때에 다시 나옵니다. 동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로그인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파일변환이 안돼서... 바윗돌 - 정오차 ▶1981 MBC 대학가요제 1부
▶ 1981 MBC 대학가요제 2부 의심나면 검열하고, 수상하면 족쳐라 최세진 著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중에서 7,80년대 우리가 모르는 곳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며,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맑스의 좌우명을 지침으로 삼고, 포이에르 바하에 대한 11번째 테제를 받들어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고 검열'이라고 주장하는 이 땅의 검열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20세기 초반 금지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아리랑>과 <봉선화>였습니다. 그 이유는 잘 알다시피 민중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로 시작하는 <황성옛터>도 금지곡이었는데, 작사가와 작곡가는 순사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땅의 노래 검열은 '정치적 검열'에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던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다 기차안에서 급사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덕분에 <비 내리는 호남선>(<남행열차>와 헷갈리지 마세요)이라는 노래는 난데없는 된서리를 맞고 금지곡이 되어버립니다. 그 노래가 신익희 후보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노래로 포장되어 전국 각지에서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 노래가 해공 신익희의 미망인이 작사 했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작곡가 박춘석, 작사가 손로원, 가수 손인호은 이승만 정권에 줄줄이 소환되어서 조사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해공 신익희 관련 자료를 보다보면 <비 내리는 호남선>을 언급하지 않은 자료를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 비 내리는 호남선 중 일단 학생들이 좋아하던 노래는 무조건 금지곡이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입니다. 김민기 본인은 그 노래를 '아침 산책을 하다가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며 삶의 덧없음을 떠올려 만든 노래'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노래는 1974년 박정희 정권이 수여하는 '건전가요상'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시위에서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로 자리잡게 되면서 그 이슬이 꽁꽁 얼어붙어 버립니다. 검열의 된서리를 맞은 거지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 중 '태양, 묘지, 붉게'의 의미가 뭔지 문제삼기도 했답니다. 72년도에 이미 대학내 공연으로 한차례 문제가 되어 레코드를 전량 수거당한 경험이 있던 김민기는 그 뒤 전면적인 금지대상이 되어, 아예 '금지곡 목록'에도 오르지 않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것은 한대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 좀 주소>라는 노래가 중앙정보부의 '물고문'을 비꼰 것으로 소문나면서 그의 모든 노래를 금지당했는데, '모두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고 노래한 <행복의 나라>는 '그렇다면 지금 불행하다는 말이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버렸습니다. 황당하지요. 그 뒤 그의 모든 노래들은 김민기와 마찬가지로 '금지곡 목록'에 조차 올라가지 않는 불가촉 금지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들의 유치함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신중현은 나중에 '신중현과 엽전들' 음반을 내며 <지키자 우리나라 우리 모두 지키자>같은 소위 '건전가요'를 많이 싣기도 했지만, 이 노래들 마저 나중에는 금지곡으로 분류되어 매장되고 맙니다. 그 검열주의자들이 '엽전들'이라는 이름이 가진 자괴감을 이해했을리 없지만, 괘씸죄는 참으로 오래 기억되는 범죄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노래 <미인>은 '가사를 퇴폐적으로 바꿔 부른 것이 단속 대상'이 된 이유였습니다. <미인>의 가사 중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학생들이 박정희 장기집권 야욕에 빗대어 '한 번 하고 두 번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불렀다는 것이 금지 사유가 된 것입니다. 박정희 때는 '노래가 인기를 얻는다 => 사람들이 많이 부른다 => 학생들 입에 오른다 => 금지곡이 된다'는 이상한 공식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70년대의 많은 인기곡들이 금지곡이 되버린 배경에는 그런 군바리 공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추자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고 불릴 정도로 한 때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역시 검열의 드센 칼날에 사라집니다. 김추자의 춤이 간첩 수신호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퍼지자 실제로 중정은 그녀를 끌고가 조사한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그 뒤 그녀는 조폭들에게 폭행까지 당하면서 대인기피증세를 보이며 가요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신중현과 그녀 노래의 금지 사유는 '창법 저속', '불신풍조 조장' 등등으로 참 다양하기도 합니다. 65년 '방송윤리위원회'를 앞세워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검열은 68년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 심의로 이어지더니 70년대에는 드디어 '긴급조치'와 '공연활동정화대책'으로 대중가요를 콩가루로 만들어버립니다. 공연윤리위와 방송위의 자료에 의하면 공식 금지곡은 공연윤리위원회 382곡, 방송위원회 846곡이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충격은 '긴급조치 9호'에 의한 대중가요 대학살이었습니다. 자그마치 222곡이나 한꺼번에 금지시켰는데, 이는 나중에 '노래의 분서갱유'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송창식의 노래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나왔다가 금지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왜 불러>는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 잠깐 나오는데, 그 장면이 걸작입니다. 영화 주인공 병태와 영철이가 미팅을 나가다가 경찰의 장발단속에 걸려 도망가는데, 경찰이 '학생~~'이라고 부르자 그 노래가 나오지요. '왜애 불러~ 왜애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애불러~' 당연히 금지곡 됐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고래사냥>도 금지곡이 되었는데, 작사가였던 최인호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그 노래 가사의 '고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궁당했다고 합니다. 말그대로 의심나면 검열하고, 수상하면 족치던 시절인 거지요. 하길종 감독의 명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바보들의 행진>은 배경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도 검열의 희생물이었습니다. 가장 황당한 장면은 병태가 영철에게 어딘가를 같이 가자고 조르고, 영철은 머리를 싸안고 고민하는 장면입니다. 영화에서는 다음 장면에 '연고전 농구대회'가 나오는데, 본래의 장면은 '학생 시위'였습니다. '시위에 나갈까말까' 고민하는 장면이 '농구 구경을 갈까말까' 고민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정말 대단한 검열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우리나라 영화를 하나만 골라보라고 하면 망설임없이 <바보들의 행진>을 꼽을 겁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저주받은 명작이고 명감독이라고 생각됩니다. 개떡같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던 이 영화는 1983년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으로 다시 이어지고, 1984년 직계 자손인 <고래사냥>을 낳습니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래는 바윗돌/ 세상 만사 야속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어이타고 이내청춘 세월 속에 묻힐소냐/ 굴러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맺힌 내가슴 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웃어보자 아아~ [참고 : 정오차의 바윗돌 - 불온사상 내포죄] 그런데, 이 멍청한 군부는 <바윗돌>과 이름이 비슷한 <바위섬>을 또 놓쳐버리고 맙니다. 광주를 대표하는 문화 활동가였던 '김원중'이란 가수가 부른 <바위섬>은 광주 항쟁 후 새들도 찾아오지 않는 무인도처럼 희망을 잃어버린 광주를 위로하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그 노래는 가요톱텐에서 한동안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나중에 김원중은 통일을 노래한 '직녀에게'라는 노래까지 히트시킵니다. 그 뒤 87년 민주화 대투쟁의 성과로 대부분의 노래가 검열을 벗어나게 되는데, 당시 한동안 술자리는 무조건 '아침이슬'을 불러야 파장을 했던 것 같습니다. 87년까지만 해도 제 친구 한 놈은 까페에서 피아노를 쳐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항상 '아침이슬'을 마지막 노래로 연주했더니 경찰에서 조사를 나오는 바람에 그 자리를 잘렸던 경험이 있기도 했고, 학교앞 짱게집에서 아침이슬 부르다가 경찰 급습을 받고 2층에서 창문으로 뛰어 달아났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이 땅에서 검열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정태춘씨를 주축으로 사전 검열을 무효화하기 위한 투쟁이 어려운 승리를 쟁취해냈지만, 지금도 방송에서, 영화에서, 인터넷에서 이제는 세련되어진 숫한 검열의 횡포가 지뢰밭처럼 깔려서 표현의 자유를 죽이고, 야만적인 발톱을 감춘 '문민정부'와 '참여정부'의 또 다른 탄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그려.. <여기서 부터는 보너스 : DJ DOC> DJ DOC의 5집은 아예 처음부터 '청소년 판매 금지'로 판매를 시작했는데, 당시 언론에서 꽤 시끄러웠습니다. 5집 대표곡인 < L.I.E(에라이라고 읽습니다)>에서는 검열을 포함한 온갖 것들에 환상적인 욕다발을 안겨주는데, 욕설의 예술적 승화 그 자체입니다. [L.I.E 들으러 가기] 그리고 5집에 함께 실린 <포조리>라는 곡은 민주노총이 가투를 할 때 방송차에서 전경을 향해서 엄청 크게 틀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웃느라 정신없고 경찰들 열받아서 난리가 났었지요. '새가 날아든다~ 웬갖 짭새가 날아든다~ 새중에는 씨방새~ 날지못하는 새 짭새~' ps. 몇년전까지 저는 주변인들이 피곤해 할 정도의 '모든 검열에 대한 반대주의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검열이란 항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조금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검열 반대는 결국 이 사회에서 '발언 능력이 있는, 발언 도구를 가진 자본'을 위한 표현의 자유방임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민중에 의해 통제되는 검열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쉽게 떠오르는 건 '반 노동적, 반 여성적, 반 환경적, 반 인종적 텍스트'에 대한 반대. 그런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텍스트'에 대한 검열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 건지.. 민중적인 통제가 꼭 '검열'이라는 제도나 도구를 써야하는 건지.. 그건 저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멀리 있는 게 아니고 현재 각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매체(홈페이지 등을 포함한)에서도 필요한 시각과 원칙이라고 생각하는데, 몇 년을 고민해도 '이거다!' 싶은 답이 없네요. 결국은 함께 논쟁하며, 토론하고, 사고도 치면서 함께 배워나가야 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