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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BS드라마 서울1945 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시사논객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는데, 친일파란 일본과 친한 사람들이란 뜻인데,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일본에게 나라가 멸망되는데 협조한 사람은 몇 명 안 되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일본에 협조한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하여 발표하였다.
1910년 이후의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김일성을 비롯한 친소파(親소련파)가 악질이다.
1945년 8월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김일성 세력은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만들고 후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고, 북조선공산당을 북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만들었고 후에 박헌영 세력의 남조선노동당의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만들었다.
조선노동당의 총비서가 된 김일성과 그 추종세력이 친소파(親소련파)이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여 수상이 되었고 남쪽에서 월북한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이 부수상 겸 외상 이 되었다.
박헌영은 조선공상당의 총비서 였는데 1947년 조선공산당(박헌영)과 신민당(백남운), 그리고 인민당(여운형)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한 후 남로당의 부위원장(위원장은 허헌)이면서 실력자 였는데, 월북하여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데 협조했다.
친소파인 김일성은 북한에서 공산주의 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다.
친소파인 김일성은 38도선 남쪽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도록 선동을 했고,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은 남한의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로당의 빨치산들에게 살해 되었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빨치산이 아닌 선량한 양민(良民)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1948년 5월10일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든 제헌의회 의원 선거를 하여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UN(국제연합)이 결정 하였는데 소련군정과 친소파(親소련파)인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선거를 거부했고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주석” 인 김구 선생은 친소파(親소련파)는 아닌데 이 선거를 거부했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5.10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로당의 제주인민해방군이 일으킨 폭동으로 5월 10선거가 무효 처리된 제주도의 선거구 3개 중에 2개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남한의 국민들이 198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을 선출했다.
이 제헌의회 의원들이 대한민국의 헌법 초안을 만들고 심의하여 1948년 7월 17일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헌법(大韓民國憲法)을 제정하였다.
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서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를 선출하였고, 7월 24일에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세계에 선포했다. 국제연합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했다.
친소파인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8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을 확정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여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 겸 외상에 박헌영으로 하는 친소파인 김일성세력과 월북한 남로당 세력이 합작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1948년 9월 9일에 창건하였다.
친소파(親소련파)인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설되기 전에 1948년 2월 6일에 소련군정의 후원을 받고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후원으로 1947년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정권장악을 다져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친소파인 김일성은 20만 명의 조선인민군을 거느리고 남한으로 침공해 왔다.
6.25 남침하기 전에 친소파인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의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며 소련의 수상인 스탈린에게 남침할 것을 승인받아 두었다.
미국의 조지아대학(The University of Georgia)의 홈페이지 http://www.uga.edu 에 있는 한국전쟁에 관한 Phil Williams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또 미국의 Yahoo에서 William Stuek을 검색하면 다음 내용이 있는 글을 볼 수 있다. )
번역문 뒤에 영어원문이 있다.
“침공(공격-한국전쟁에서의)은 조셉 스탈린( Josep Stalin)에게 승인을 받았고 공격하라고 독촉 받기까지 했다, 설혹 소련의 군부대들이 전쟁(한국전쟁)에서 제한된 부분만을 수행했고 그것도 매우 뒤 늦게 했다. (전쟁말기에) ”
Though the attack on June 25, 1950, came as a surprise to American and South Korean troops, it should not have, said Stueck. There were numerous warnings that an attack might have been imminent, but South Korea was simply unprepared.
(The attack was approved and even urged by Josef Stalin, though Soviet troops played only a limited part in the war and that much later.)
대한민국 즉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 세력들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여 미군 철수를 주장하였고 드디어 국회는 미군철수를 결의했고,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 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군은 10만 명 정도 이었고, 무기도 초라했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인민군이 침공한 지 3일 만에 대한민국은 서울을 빼앗겼고, 드디어 대구와 부산을 비롯한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지역들을 김일성의 인민군이 점령하였다.
남한의 국민들이 약탈 당하고 젊은이들은 조선인민군으로 입대가 강요 되었고 전선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조선인민군으로도 죽었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은 남한의 점령지역에서 그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인 남조선 노동당 세력과 합작으로 인민재판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병사들로 구선된 UN군이 맥아더 장군(Douglas Mac Arthur)의 지휘 하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을 하였고 이어서 9월 28일 서울을 탈환 하였다.
이에 당황한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은 후퇴를 하면서 대한민국의 국민 즉 많은 남한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
가요에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꼭꼭 묵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절름거리며) 끌려가신 이 고개야 한 많은 미아리고개 ”라는 가사처럼 비참하게 끌려갔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김일성의 조선인민군 그리고 나중에 참전한 중국의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대한민국의 국군이 15만 명이 전사했고, UN군 병사들도 수만 명이 전사했다. 남한의 민간인들도 수십 만 명이 죽었다.
사관학교 한국전쟁사에는 남한의 민간인의 피해를 사망 23 만 명, 실종 29 만 명, 북한의 학살 12 만 명이라고 하여 사망자가 35 만 명이 된다.
인민재판으로 죽은 사람들과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죽은 사람들이 35 만 명이 된다는 것이다. 행방불명자 29 만명 중에 북한으로 납치 되어간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조지아 대학의 홈페이지 http://www.uga.edu 에 Phill Williams가 쓴 한국전쟁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어원문은 번역문 뒤에 있다.
<“130 만 명의 한국인들이 죽었고, 이에 더하여 100 만 명의 중국인들, 약 50 만 명의 북한사람들, 5만 4000 명의 미군 병사들이 죽었다.” >
While the battlefield of the Korean War was regional, the war was seen as a threat to U. S. credibility and to the viability of the United Nations. The conflict eventually included 20 governments from six continents. Some 1.3 million South Koreans died, as well as 1 million Chinese, about 500,000 North Koreans and some 54,000 American troops
다음은 http://www.moreorless.au.com 에 있는 20세기의 영웅들과 살인자들 (heroes & killers of the 20th century) 가운데 20 세기의 살인자들에서 김일성에 대한 자료의 일부이다. 영어원문은 번역문 뒤에 있다.
<약 300 만 명이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60만 명과 100만 명의 북한사람들이 김일성 정권의 경제적 유산 때문에 불필요 하게 굶어 죽었다.>
moreorless : heroes & killers of the 20th century
killer file
Kim Il Sung
AKA 'Great Leader', AKA 'Eternal Leader', AKA 'Suryong' (Supreme Leader).
Country: North Korea.
Kill tally: About three million killed in the Korean War. Between 600,000 and one million North Koreans needlessly starved to death due to the economic legacy of Kim's regime. (Some reports claim that as many as three million starve.)
물론 UN군과 대한민국의 국군은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을 38도선 북쪽으로 몰아 내었는데, 드디어 멸공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북진을 했으며,평양을 점령하고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친소파인 김일성은 만주로 피신했고 UN군이 만주까지 쳐들어와 중국의 모택동 공산당 정권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정권은 중국인민군 100만 명을 한국 전쟁에 투입시켰다.
UN군과 대한민국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또 다시 서울도 빼앗기는 곤경에 처하였다가 현재의 휴전선에서 1953년 휴전하게 되었다.
중국의 인민군도 UN군의 공격으로 90 만 명이 전사했으며, 김일성의 조선인민군도 수십만 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은 친소파인 김일성이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남침했기 까닭이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집권하여 1994년 7월 8일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공산당인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이 일당 독재하면서 그리고 정권을 인계받은 그 아들 김정일과 함께 수백만 명의 북한 동포들을 굶어 죽게 하였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악질적인 죄악보다 더 악질적인 죄악이 어디에 있는가?
한인들이 일본군의 병사로 전사한 사람들과 징용으로 가서 죽은 사람들과 기타 일본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많은데 친소파인 김일성 때문에 죽은 한인들 500만 처럼 많지 않고 몇 만명 수준일 것이다.
이 때는 일본의 식민지여서 한인들이 (한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이) 강제로 일본국민이 되어 있어서 일본제국의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 6.25 전쟁에서 한국군 15만 명 전사, 인민재판에서 살해된 사람들, 북한으로 납치 및 살해, 된 사람들, 북한의 인민군병사 수십만 명 전사, 북한의 민간인 수십만 명, 이들을 합치면 200만명 더 된다.
그리고 북한에서 굶어죽은 동포들 300만 명을 합치면 그러면 500만 명이 된다.
친소파인 김일성과 함께 한인들을 죽인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을 먼저 하여야 하는 것이 역사의 엄숙한 명령인데 이를 어기는 의도가 무엇인가?
친북파(親北派)의 명단을 발표하는데, 아북파 다시 말해서 북한에 아부한 사람들과 구별했으면 하는데 북한의 동포들이 불쌍해서 식량이나 의약품 등을 보낸 사람들을 친북파로 보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부하 같은 자들로써 북에 아첨한 사람들을 아북파( 阿北派)로 했으면 한다.
만주에서 광복투쟁을 했던 광복군처럼, 혹은 독립운동을 평생 동안 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처럼 모든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으나 한반도에 있으면서 땅을 지키고, 농사도 하여야 하고, 공장이나 기업도 지키려면,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광복군처럼, 혹은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처럼 저항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처럼 독립운동 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윤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못했던 것을 했기 까닭에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국민들이 잘못해서 대한 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고, 일본의 국력이 당시 대한제국보다 강했고, 일본의 지도자들이 오만불손해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지도자들이 국력을 다시 말해서,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 과학적 지식과 응용력을 기르지 못해서 국력이 비참할 정도로 낮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도 친일파라고 할 것인가?!>
민족문제연구소의 관계자들의 부모님들을 조사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거의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의 관계자들 가운데 1945년 8월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일본식 이름인 창씨개명 된 이름이 있을 것이다.
1945년에서 1950년대에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 한 이름으로 일본 등에서 대학생 혹은 전문대학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선생님들이었고 그들에게 배웠다. 창씨개명 한 그들을 친일파라고 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1인당 GNI 14,000 달러가 더 되고 GNI 7000 억 달러로 세계의 11위의 나라가 되었는데, 친소파인 김일성이 창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인당 GNI 750 달러, GNI 198억 달러 대한민국의 32분의 1수준이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대한민국의 최초의 헌법안을 만든 사람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서울대학교의 전신)의 수재 유진오 전 고려대학 총장이었다.
유진오 박사도 친일파라고 하면서 유진오 박사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자들은 김일성을 찬양하여 김정일에게 충성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친소파인 김일성은 소련의 비밀경찰의 두목 베리아의 후원으로 조선공산당 총비서 였던 박헌영도 재판을 통해 살해했고 월북한 남조선노동당 당원들을 집권과정에서는 이용하고 나중에는 많이 죽였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이 남침했을 때에 이를 물리친 것은 UN군이었지만 대한민국의 국군도 크게 기여했는데, 국군의 장교들이 일본 군대에서 배운 군사지식이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백선엽 장군, 정일권 장군 등이 일본 군대에서 배운 군사지식이 대한민국을 보호하고 한국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지켜주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군 장교들을 친일파라고 규탄하는 자들은 김일성이 남한을 공산화 시키는데 방해했다고 이들을 증오하려는 것인가?
2차 세계대전에서 (아시아에서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군인을 비롯해서 일본의 민간인이 310 만 명이 사망했고 매해 이 310만 명을 위하여 일본의 천황과 일본의 수상 등이 참가하여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일본의 군인이었던 한인들이 얼마나 전사했는지 정확한 수자는 아직 알 수 없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죽은 한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만주에서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한 한인들이 있는데,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에게 죽은 사람들과 굶어 죽은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500 만 명이라면 만주에서의 전사한 광복군은 몇천 명 전후가 될 것이다.
광복군의 숫자는 naver 백과사전에는 3,782 명이다. 다음은 naver 백과사전의 기술이다
<광복군 지방 영장은 제1영장에서 제6영장까지 두었고, 그 아래에 다시 제1영 대대장 이하 제7대장까지, 제2영 대대장 이하 제7대장까지, 6개 영에 3,782명의 군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 지가 발행하는 월간지 제군의 2005년 8월호의 106쪽에 좌담회에 참가했던 야기히데쓰구 교수(高崎經濟大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공산주의 흑서(共産主義 黑書)” 의 6,500만 人이라고 하는 이것은 약간 적을 듯한 수자입니다만 중국의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의 실태를 알지 못합니다.>
야기히데쓰구 교수(高崎經濟大學)는 (제군의 2005년 8월호의 101쪽에 )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는 뉘른베르크(Nuremberg) 재판(히틀러등에 대한 재판)의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라고 하는 관점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행상을 판가름한 것이다.
그 결과 구 소련은 나치스의 만행 이상의 잔학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다.
저자는 각국별로 사자를 분류하고 예를 들면 강제노동에 의한 죽음, 반란의 항쟁에 의한 죽은, 굶어서 죽음(아사) 등의 숫자를 여러 가지 자료로 부터 파악하여 바란스 시트(balance sheet- 결산공고)를 작성하고 있다.
죽은 사람들(사자)의 수자만을 인용하면
<소련 --- 2,000 만 人 , 중국 --- 6,500 만 人, 베트남 -- 100 만인, 북조선 --- 200 만 人 , 캄보디아 -- 200 만 人, 동구 --- 15만 人, 남미 --- 15 만 人 , 아프리카 --- 170 만 인, 아프카니스탄 -- 150 만 인 이렇게 되고 있고 공산주의에 죽은 인구는 1 억 人 가까이 추측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6,500 만 명을 소련공산당이 2,500 만 명을 집단학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미국의 하바드대학교 홈페이지 http://www.hup.harvad.edu 에 있는 공산주의의 흑서 The Black Book of Communism 을 소개하는 글의 일부이다.
전 소비에트 연방(the former Soviet Union)에서 2,500 만 명 그리고 중국에서 6,500 만 명이 죽었다고 하고 있다.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Stéphane Courtois, Nicolas Werth, Jean-Louis Panné, Andrzej Paczkowski, Karel Bartosek, Jean-Louis Margolin
Edited by Mark Kramer
Translated by Jonathan Murphy
As the death toll mounts--as many as 25 million in the former Soviet Union, 65 million in China, 1.7 million in Cambodia, and on and on--the authors systematically show how and why, wherever the millenarian ideology of Communism was established, it quickly led to crime, terror, and repression. An extraordinary accounting, this book amply documents the unparalleled position and significance of Communism in the hierarchy of violence that is the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소련의 전투에서만 2,000만 명이 죽었다고 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5,000만 명의 세계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처럼 대량으로 사람들이 죽는 전쟁은 없었으나, 중국에서의 국민당 정권과 공산당 정권의 전쟁, 한국전쟁, 월남전쟁 같은 제한전쟁(limited war)들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승리했고, 월남에서 월맹공산당이 승리했는데 한반도에서는 북한공산당이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에 이르러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친소파 김일성이 세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GNI의 32분의 1 정도밖에 안되고 완전히 패배했다.
그리하여 친소파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추종세력들이 발광 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