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
1. 연등불에게 꽃을 바치는 전생의 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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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전생에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연등불(燃燈佛)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동(儒童, 당시의석가여래의 이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연등불이 오시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등불에게 무엇을 공양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한 처녀가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동은 그 처녀에게, 연등불을 바치고 싶으니 그 꽃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그랬더니 처녀는 꽃을 주는 대가로 내세에는 자신을 부인으로 맞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유동은 기꺼이 승락하고, 그 꽃을 받아 처녀와 함께 연등불 앞에 나아가서 오화(五華) 연꽃을 연등불에게 바치고 절을 하였다. 그리하여 내세에는 부처가 되리라는 구체적인 수기(授記)를 받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orilife.pe.kr%2F3.jpg)
2. 성도(成道)를 방해하는 마왕
태자는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서 내심(內心)의 깊은 성찰에 몰두하여 모든 것이 연기(緣起) 한다는 도리를 관찰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생성된다는 것인데, 이 절대적인 진리가 연기의 법칙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려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온 세상이 기뻐하고 경축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마왕 파순(波旬: Mara papiya)만은 태자이 성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태자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의 수하의 마군(魔軍)을 태자가 수행하고 있는 보리수 밑으로 보내어 태자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태자는 태산반석과 같은 태도로 끄덕도 하지 않고 마군을 물리쳤다. 일차 방해 공작에 실패한 파순은 이번에는 부하들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둔갑시켜 태자 곁으로 보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온갖 교태로 태자의 성도를 방해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도 역시 실패하고, 태자는 드디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고 성불하였다. 그리하여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 되었다.
3. 물병을 움직이려는 마군(摩軍)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orilife.pe.kr%2F5.jpg)
보리수 밑에 정좌한 태자는 도를 깨치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 성도(成道)할 시기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이것을 안 마군들은 태자의 성도를 방해하려고 태자 곁에 몰려들어 온갖 못된 짓을 행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수행을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태자는 작은 물병 하나를 무릎 앞에 세워 놓고 미친 듯이 날뛰는 마군들에게 말하였다.
" 이 물병을 움직여 보아라. 만일 너희들이 이 물병을 움직일 수 있다면 너희들의 뜻에 따라 성도를 포기할 것이고, 만일 움직이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내 뜻에 따라 즉시 물러가서 다시는 내 수도
를 방해하지 말라."
마군은 그까짓 물병 하나쯤이야 하면서 서로 달려들어 손으로 잡고 움직이려 했으나 물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물병에 밧줄을 걸고 수많은 마군이 일제히당겨 보았으나 물병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겁을 잡아먹은 마군은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더니 도망쳐 버렸다.
4. 석가모니에게 흙을 공양한 아이
석가모니가 기원정사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제자들과 성 안을 돌아다녔다.
도중에 길가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두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나뭇잎으로 반찬도 만들고
흙으로 밥도 지으며 놀던 아이들은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그들 곁에 누가 오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두 아이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석가모니가 옆에 와서 그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아이들은 황급히 석가모니에게 절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꿉장난으로 지은 모래 밥과 나뭇잎 반찬을 석가모니에게 바쳤다. 석가모니는 웃으면서 그들이 바치는 모래 밥과 나뭇잎 반찬을 기꺼이 받았다. 한 아이는 그 공덕으로 나중에 왕이 되었고, 또 다른 아이는 후일에 유명한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5. 난타(難陀)의 출가
석가모니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난타(Nanda)라는 이름의 그 동생은 가비라성의 왕자였으며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손타라'하는 아주 아름다운 아내
가 있었는데 난타는 아내를 무척 사랑해서 늘 아내 곁에 있기 만을 좋아했다. 석가모니가 출가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난타는 아내가 그리워서 출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난타를 데리고 극락세계로 갔다. 그리하여 극락세계의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삶을 일일이 구경 시켰다. 그리고 지옥에도 데려가서 지옥에서 고통 받는 많은 죄인들의 처참한 모습도 구경 시켰다.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온 석가모니는 난타에게 출가해서 도를 닦으면 극락에 태어나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고, 출가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떨어져서 무한 겁 동안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친절히 일깨워 주었다. 그리하여 난타는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게 되었다.
6.머리카락을 잘라 공양한 여인
석가모니가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설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다투어 석가모니 앞에 나아가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공양했다.
그때 쇼우군성 밖에 '마리카'라고 하는 한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씨가 무척 착해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비심을 발휘하여 무엇이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모두 도와 주었다. 그래서 마리카는 항상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있었으니 한번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마리카는 석가모니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석가모니께 공양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마리카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공양할 물건들을 사서 정성껏 갖추어 석가모니 앞에 바쳤다. 이것을 본 석가모니는 "정성 없이 바치는 풍부한 물질보다 마리카가 바치는 정성스런 공양이 더욱
빛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리카는 이 공덕으로 다음에 쇼우군 대왕의 왕비로 태어나서 행복하고 부유한 일생을 살게 되었다.
1. 석존의 출가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불타(Buddha) 즉, 깨달은 사람(覺者)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이 있는데, 이를 불성(佛性)이라 한다.
저마다 불성을 간직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첫째 부처님의 생애를 알고 그 삶대로 사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진리를 깨쳐 부처님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불자로서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은 바로 부처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는 것은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그 교조를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부처님이 된 삶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부터 우리도 부처님 같이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불교를 믿고 행한다는 것은 결국 '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같이 살고 싶은 이에게 부처님의 생애는 다시없는 인생의 귀중한 나침반이다.
1. 석존의 출가(석존은 왜 모든 것을 버렸는가?)
- 출가의 동기 -
석존의 탄생과 일생에 관해서 우리는 비교적 신빙할 수 있는 많은 역사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절대적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신비화시킨 흔적도 엿보이지만 신화는 하나의 상징이므로, 그 상징을 통해 역사적 인물이었던 석존의 일생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석존의 생애를 알려 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로는 아함부 계통의 여러 경전 중 특히 [불소행찬], [석가보], [상응부 경전] 등이 있습니다.
또 석존의 일생을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도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룸비니(네팔의 다라니지방)에는 기원전 250년 경에 아쇼카왕이[여기서 붓다 석가모니가 탄생하다.]라고, 새겨서 세운 돌기둥이 남아있습니다.
석가족은 사성계급 중의 크샤트리아(무사계급)로서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태양의 후예라는 부족집단로, 코사라라는 대국과 인접한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대국에 속해 있었지만 민주적인 공화체제 아래 평화롭고 자유로 왔던 그 나라의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석존은 성장하였습니다.
석가란 그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Muni라는 말을 옮겨 쓴 것으로 성인(聖人)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에서 나신 성인]이라는 뜻으로서 그 분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 분은 고오타마 싯타르타라는 태자로서의 이름이 있었고, 대각을 이룬 후에는 [불타] 즉 [깨달은 분]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석존께서 부처가 된 뒤 비구들에게 지난 날의 왕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는 매우 행복했었다. 정원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연못이 있었고, 내 방에는 늘 카시국에서 나는 전단향의 향기가 그윽했었다. 내가 밖에 나갈 때나 비나 추위 그리고 더위를 막기 위해 백산(白傘)이 받쳐졌고 계절에 따라 지내는 별장이 따로 있었고...]
이런 안온과 풍요로움 속에서 왕자로서 갖추어야 할 무예와 학문을 익혔고, 17살 때 코리족의 선각왕의 딸인 야수다라와 결혼하였으며, 라훌라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석존은 이와 같이 상류 계급의 귀공자로서 축복받으며 탄생했으나 7일만에 생모와 사별하는 슬픔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소양도 갖추었고 한 여성과의 사랑을 나누는 등 인간으로서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모두 겪는 실인생(實人生)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늘 일말의 우수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궁전 안의 화사한 환락보다는 나무 그늘에 조용히 앉아서 사색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색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석존이 후일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듯 나의 출가 전의 생활이 행복했지만, 그것이 참된 행복, 즉 궁극적으로 고(苦)가 없는 그런 행복은 아니었다.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을 피할 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남의 늙음. 남의 죽음을 보고도 자신의 늙음. 죽음은 생각지 않고 혐오하고 비웃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또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이다.]
그래서 싯타르타는 청춘에 대한 교만은 사라지고 병. 죽음이라는 무거운 테마를 안고 우수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경전에는 도성의 4대문에서 각각 노인과 병자와 장례행렬 그리고 출가 사문(沙門)을 보고, 마침내 사문이 되어 고가 없는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출가를 결심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래서 싯타르타는 부모, 처자 그리고 부귀영화 등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버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문제, 즉 고(苦 : 生. 老. 病. 死)를 극복할 수 있는 길-진리-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또 싯타르타가 출가를 결심한 데는 당시 인도의 사회 여건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당시 크샤트리아 계층 청년들의 꿈은 왕이 되어 영토를 넓혀 강력한 왕국의 대왕이 되거나 아니면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출가해서 정신세계에 군림하는 성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싯타르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크샤트리아의 청년들이 우러러보는 대왕이 되려면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침략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석가족은 더무 무력했으며 또 그런 침략주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므로 싯타르타가 갈 길은 정신적인 성자(聖者)의 길 뿐이었습니다. 생, 로, 병, 사 와 현세의 고뇌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성찰(省察)한 싯타르타는 인간이 바라는 최고 최상의 이상 추구에 온 생애와 정열을 바치기로 마음에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싯타르타의 출가는 개인적인 고뇌의 해결이나 현세적인 인간 고뇌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정열적인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