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2/박노자

[벼리]

#1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장정일은 박노자를 두고 '그는 이미 우리들이 귀화 외국인에게 기대하는 고분고분한 면죄부 장수를 할 의사가 없으며, 백인에게 너그러운 대한민국이라는 온실 속에서 콤플렉스 치료사로 개업할 뜻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노자가 우리에게 먹히는(?) 이유가 그의 피부색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노자 본인도 자신의 책에서 "한국인들의 깊은 '화이트 콤플렉스'의 수혜자가 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으며 "'인종주의 타파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백 번 다짐해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구석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백인이며, 박사이자 교수다. 현 시스템에서는 일정한 권력(?)을 가진 자의 부류에 속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그가 자신이 가진 권위의 타파를 위해 쓴 소리를 내뱉는 것은 (적어도 권위지향적 사회에서 내에서는) 미처 권력을 갖지 못한 자가 내는 쓴소리보다 몇 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니 그가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종 그의 용기에 감탄하곤 한다. 내가 말하는 '용기'라는 것은 "제 주제에 무슨.."이라는 비난을 감수할 용기를 의미한다. 일례로, 박노자는 줄기차게 우리 나라의 군사적인 문화에 대해 비판했으며 이번에도 '병영국가 대한민국'이라는 섹션을 준비했다. 그런데 박노자는 한국의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며, 한국의 군사 독재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여자가 '군대'에 대한 비판을 한다면 (제 아들을 군대에 보내기 전까지는) '여자 주제에!'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들을 것이 뻔하다. 적어도 군대 및 군사 문화 비판에 대해서 박노자는 한국의 여자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처지에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가 원리원칙에 근거하여 '유승준을 보는 우리의 일그러진 눈'을 비판하고 '국적 마녀사냥을 중단하라'고 일갈할 수 있는 것은 용기가 수반되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다. 병역을 '전문연구요원'으로 마쳤다는 이유로 (그것이 전혀 불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군사문화와 그로 인해 왜곡된 시선들에 앞에서 어쩐지 주눅이 드는 나로서는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내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학의 원칙은 학생들이 모국어로 수업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고, 일반 대학생을 위한 영어 교양 과목 등은 아예 있지도 않다. 영어로 개설돼 있는 과목은 전체의 10% 이하이며, 일반 과목의 강의를 영어로 전환해주기도 하지만 모두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외국인 교수 임용 때도 이들은 2~3년만에 노르웨이어로 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경영,공학의 개별 학과들이나 단과대학들이 "한국말을 안 쓰겠다" 선언하고, 어떤 대학교는 2010년까지 모든 수업의 절반을 영어로 하겠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게 해서 '선진화'가 되겠다는 건가? 그것이 '선진화'일까? 그렇다면 영어 강의 차원을 넘어 아예 영어가 지배계급의 언어가 돼버린 말레이시아, 필리핀, 파키스탄, 잠비아, 케냐 등과 같은 미국과 영국의 옛 식민지들을 우리는 우러러봐야 할 것이다. 우리와 그들의 종이 한 장 차이라면, 그들 나라의 매판 엘리트들이 탈식민화 이후 영어 능력이라는 잣대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경계선을 계속 그어왔던 반면, 우리의 대미 예속 엘리트들은 개발독재 단계에서 언어 민족주의를 대중 동원의 도구로 썼다가 신자유주의 단게에 접어들어 '영원한 평민'으로 남아 있을 대다수의 시민을 '지배자 언어 구사'란 잣대를 이용하여 차별하는 정도의 차이다.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2", p.61-63

내가 대학원에서 들은 수업 중 몇몇 과목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수강자 명단에 외국인 학생이 있어서 그러한 경우도 있었지만, 단지 '영어 강의 과목'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도 있었다. 영어 강의의 이유가 무엇이든,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진행되는 강의는 그 이해도가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내 지도교수는 외국인 학생을 따로 불러 그들에게는 영어로 강의를 하고, 본 강의 시간에는 한국 학생만 모아 한국어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영어 강의를 원칙으로 하는 과목의 수는 점점 늘어났는데, 나는 그러한 정책이 어떠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숭미(崇美)라거나 국제화 내지 선진화의 정의(定義)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대학이 영어의 습득과 전공 능력의 습득 중 어느 것에 우위를 두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영어가 국제 표준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현실의 문제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현실을 과하게 인정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종종 주객은 전도되고 그러한 시도들은 반복되는 것 같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곧 영어 공용화를 시행한다고 하는데, 첨단 기술을 다룬다는 사람들이 단지 영어를 못해 제 기술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목표 시일을 지키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회의 시간은 길어질 것이고, 의사 전달은 분명치 않을 것이며, 그 때문에 시간과 비용의 낭비가 수반될 것인데 그것까지 고려한 정책인지 의문이 생긴다. 회사건 학교건, 영어 능력 향상을 장려하는 것과 영어 사용을 강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에도 그것을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오해 하는 것 같다. 일상에서도 주객은 전도되곤 한다. 때로 영어의 스펠링을 틀리거나 영어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비웃음을 사거나 희화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희화화는 포털의 덧글이나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데, 그러한 덧글과 연예 프로그램의 자막 안에 맞춤법을 무시한 한글들은 오히려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한글 사용이 틀렸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사회는 전 국민이 영어를 제 것처럼 사용하는 그 날을 기원하고 있는 듯하다. '전 국민적' 영어 열풍 - 사실은 '가진 자'들의 열풍이지만 미디어에 의해 '전 국민적' 영어 열풍으로 확대되었다고 생각한다 - 으로 인해 배울만큼 배웠다는 어른들보다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아이들이 나타났지만, 그 아이들이 제 나라 말로 제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논술 학원'을 다녀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3
갑신정변에 대해 다분히 '긍정적'이며 그 실패에 대해 '안타까운 시선'을 갖도록 교육받은 나는, 이 책에서 다음의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나는, 이제는 타율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옛날 사학자처럼 갑신정변(1884)이나 1894~95년 사이를 근대의 기점으로 주목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의 역사상 최초로 사론(士論)이 만들어주는 반정(反正)과 같은 절대적 명분 없이 신하로서 자신들의 주의 주장을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으로 뒷받침했다는 사실이다. 사화(士禍)라는 당파 싸움의 폭력은 적어도 나라의 가부장인 임금의 도덕적 권위로 포장돼 있었는데, 여태까지 조선사에 없었던 정변의 폭력은 살육의 논리 그 자체였다. (중략) 도덕적 명분이 필요 없는 폭력, 즉 근대적인 폭력이 한국의 정치 무대에 드디어 오른 것이다. 도덕적 명분을 애당초부터 팽개친 만큼 뒤늦은 후회도, '죄와 벌'에서와 같은 살인의 악몽도 없었다. 민씨 일파 제거에 칼을 들고 직접 지휘자로 나선 일본 사관학교 출신의 서재필이, 그 일을 언제 반성하고 후회한 적이 있는가? 죽을 때까지 혁명가임을 자랑했을 뿐이다. 문명 -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문명이라고 상상되는 것 - 을 위해서 미주의 원주민이든 인도인이든 자국의 노동자든 누구든 다 죽여도 무방하다는 식의 서구적 근대가 조선에 개선(凱旋)했다. (중략) 한국의 근대적 야만성을 극복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야만성의 원류가 한국 밖에, 한국이 속해 있는 세계 체제의 중심에 있다면, 제거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국내 문제 해결에 머물지 않고 국제적 수술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2', p.137-139

*** 당신들의 대한민국 02 / 박노자 / 한겨레출판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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