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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필의 문체와 문장
8) 수필의 문체(文體)
문체란, 문장이 지닌 개성적 형태를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 글을 쓴 사람의 사상, 개성이나 특성 등이 그 글의 문구 속에 표현된 독특한 성질 또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문장도 여러 가지 문체로 나타난다.
이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완전히 똑 같은 사람은 없다.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쌍둥이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마다 그 사람이 쓰는 글이나 글씨는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타고난 기질이나 습성, 손재주, 생각이나 가치관, 자라온 환경, 교육수준, 글이나 글씨에 대한 재능, 표현방법, 글씨체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태도, 인격 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반영하는 글이나 글씨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글에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문장이나 문체, 또는 표현방법이나 수법, 묘사력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글 속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의 특성이나 개성 등이 잘 나타나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글 속에서의 문장은 단지 단어의 나열이나 생각의 표현으로만 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문체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문체는 대략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지는데, 이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요소나 특성 등에 의해 분류된다.
① 문장 구절이 길고 짧음에 따라 간결체와 만연체로 구분할 수 있다.
② 표현이나 묘사 등에 있어 그 표현방법이나 성격이 강한 편이냐 또는 약하거나 부드러운 편이냐에 따라 강건체와 우유체로 구분한다.
③ 문장을 아름답게 꾸며서 표현하거나, 또는 그러한 수식이나 미사여구를 피하고 그 내용이나 요점, 의사표시 등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화려체와 건조체로 구분할 수 있다.
⑴ 간결체(簡潔體)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요점만 간추려서 간결하게 압축시켜 표현하는 문장의 스타일이다. 즉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하고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는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러한 글은 대개 문장의 길이가 짧고 접속사나 수식어, 또는 반복 어구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전달이 빠르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우며 경쾌한 느낌이 든다.
반면에 너무 간결하고 의미전달에만 비중을 두게 되면 무미건조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또 문학작품에서 멋과 향기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멋진 표현”이 상실될 염려도 있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서영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 아는 여인들이 인사 대신으로 웃는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이 글은 피천득의 수필”나의 사랑하는 생활”의 일부다.
어머니의 발을 본 것은, 돌아가시고 난 뒤의 일이다. 살아계셨을 적 맨 살의 발을 본 일이 없다. 팔십 평생 버선만 신으셨다.
그러나 수의를 입힐 적에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 본 발이 얼마나 작았던지 삼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내게 충격으로 남아있다. (생략)
이 글은 유경환의 수필”발”의 일부다.
⑵ 만연체(蔓延體)
간결체와 반대로 반대로 구절이 길고, 많은 어휘나 수식어 또는 반복이나 긴 설명 등이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만연체의 글은 자연히 장문이 많기 마련이다. 만연체에는 필요 없는 말 없어도 되는 말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문장이 길면서도 그 체계나 흐름이 분명하고, 의미전달이나 묘사가 확실하며, 거기에다 문학성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l 만연체 문장의 특징을 지닌 예문을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아도 눈[雪]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 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 아니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여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나, 부드러운 설편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인지 부지중 온화하게 될 마음과 인간다운 색체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목례(目禮)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는 백설,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의 강설에 의해서 멀고 만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지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이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을 탈하고 현란한 백의를 갈아 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도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을 것이지만 이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 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을 일시에 원시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한다.
온 천하가 얼어 붙어서 차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 글은 유명한 김진섭(金晉燮)의 백설부(白雪賦)라는 수필의 한 부분이다.
눈에 대한 작가의 깊은 상념과 겨울의 서정과 낭만을 유려한 필치로 잘 묘사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수필을 읽노라면 밤새 흰 눈이 소복소복 내려온 천지를 통해 하얗게 만든 겨울날 아침의 그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정경이 눈앞에 저절로 펼쳐지며, 자못 감상적이고도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이 수필은 눈 내린 날의 풍경과 서정, 그런 날의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또한 문장이 길고 수식어가 많으면서도 그것이 산만하다거나 쓸데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흔히 만연체의 문장이라면 내용이 산망하고 복잡하다는 느낌이 들기 쉬운데 이 수필은 분명히 만연체에 속하면서도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문장이 길면서도 그 내용이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 강건체(剛健體)
어떤 사람이 쓴 글이나 문장에는 문세 또는 필세라는 게 있다. 글이나 문장 속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의 기질이나 문장의 기세,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나 심리상태 등이 담겨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이 바로 문세 혹은 필세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글이나 문장 속에 호방한 기운이 넘치며, 강인한 의지나 신념, 굳센 결의와 각오, 거센 저항의식이나 격렬한 분노심, 여러 사람들에 대한 촉구와 외침 등이 강하게 담겨있는 글을 보통 강건체 문장이라고 한다.
이런 류의 글은 특히 연설문이나 호소문, 결의문이나 신문의 사설이나 논설, 시평, 권두언이나 서문, 평론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의 의지나 뜻을 강하게 나타내는 편지나 건의문, 또는 좀더 강한 의사표시를 나타내고 강한 효과를 주기 위한 안내문이나 광고문 등도 이런 스타일의 글이 쓰인다.
이와 같은 강건체의 문장은 수필문학작품에서도 더러 쓰인다. 특히 작가의 뜨거운 열정이나 강인한 신념 등을 표시하고 여러 사람을 향해 각성을 촉구하며, 보다 강력한 전달 효과를 얻고자 할 때 이와 같은 강건체 문장이 많이 나온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이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울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거선(巨船)의 기관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은 얼마나 쓸쓸할까?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피고 새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리!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러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 )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까지 찾아 다녀도 목숨이 있는 데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일 뿐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零落 )과 부패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 글은 잘 알려진 민태원(閔泰瑗)의 “청춘 예찬”이란 수필작품이다.
특히 이 수필 작품은 청춘의 끓는 피와 청춘의 아름다움, 청년의 위대한 힘과 뜨거운 열정,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 굳건한 의지와 신념, 사랑의 열정 등을 짧은 글 속에서 아주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게 표현한 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 “청춘 예찬”이란 수필을 읽으면 누구나 청춘의 끓는 피와 아름다움 등과 같은 것들을 실감하면서 뼛속 깊숙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4) 우유체(偶有體)
강건체처럼 단정, 주장, 설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하는 말처럼 부드럽게 쓰는 문체다. 따라서 문장의 성격이 순수하고 부드럽고, 우아하며 지적이기보다는 정적이다. 수필을 말할 때 흔히 정의 문학이라 함은 다분히 우유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품 전체가 서정성이 짙고, 정적이어서 문장의 흐름이나 분위기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우유체의 문장은 조용하고도 부드럽게, 또는 온화하면서도 잔잔하게 독자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 있다. 또한 독자들은 이러한 문체로 쓰여진 글에 대해 친밀감과 편안함을 느끼며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우유체의 문장은 강력한 설득력이나 호소력, 박력이 적은 편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강인한 의지나 신념, 열정이나 분노심의 표현, 많은 사람들을 향한 역설이나 외침 등에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선언문이나 결의문, 논설이나 사설, 호소문 등과 같은 글에 우유체의 문장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유체로 쓴 글 중에는 미문의 색체를 띤 글들도 적지 않으나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비유나 은유, 또는 화려한 묘사나 멋진 표현, 여러 가지 수식어 등을 많이 쓰지 않은 우유체 문장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곳은 내 고향에서도 물맛이 으뜸인 옹달샘이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그 샘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더욱 목이 타서 발을 동동거렸다.
그때 하얀 수염이 풍성한 노인이 나타나 지팡이로 샘을 치며 주문을 외우자 생수가 솟구쳤다. 생수는 금새 샘을 가득 채우고 넘치었다.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려는데 뜰 그릇이 없다. 두 손으로 떠올려도 입에 가져갔을 때는 이미 다 새어버려 안타까워하다가 꿈을 깨고 말았다……
…….고향집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곳 ‘서당몰’이라고 하는 언덕바지에 옹달샘이 있었다. 언덕에는 큰 바위가 산을 떠받치듯 버티고 있는데 바위틈에서 한 살배기 오줌줄기 같은 물줄기가 가뭄도 타지 않고 한결같이 흘러내렸다. 이 물줄기 아래 두 길쯤 되는 길이의 샘에는 바닥에 깔린 굵은 모래가 환히 들여다보이고 맑은 물이 항상 남실남실 넘치었다.
산에서 소나무뿌리에 걸리고 각종 약초뿌리를 씻어 내린 약수가 바위틈서리에서 샘 바닥에서 솟아나는 생수와 만나서 이 샘물을 이룬다.
이 샘물은 맛도 좋지만 머리를 감으면 머리 결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빗이 사르르 내리고 빨래를 빨면 백옥 같다.
일손이 바쁜 농촌에서 샘을 앞에 두고 그곳까지 머리를 감으러 다니는 것이 사치로 보일까 봐, 내가 처녀시절 사촌과 함께 사람들 눈을 피해 해거름에만 다녔다……
…….고향의 그 샘이 있는 서당몰 언덕에는 가을이면 억새꽃이 하얗게 피고 빨갛게 익은 땡감줄기가 억새와 어울려 언덕을 덮었다.
그 언덕에서 보면 왼쪽은 푸른 산이 있고 오른쪽은 서해바다가 출렁이었다. 우리가 머리를 감거나 가벼운 빨랫감을 가지고 갈 때는 해질녘이어서, 석양에 비친 오랜지빛 황혼은 아름다운 언덕과 옹달샘과 조화가 되어 미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러기에 그 시간에 그곳에 가면 머리 감는 걸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유동림(柳東林)의 “고향의 샘물”이란 수필작품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작품 역시 우유체로 쓰여진 작품에 속한다.
(5) 건조체(乾燥體)
비유나 수식이 별로 없고, 아름다운 표현이나 미사여구 또는 문학적 예술적 표현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직접적인 의사전달에 더 치중하고 내용상의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문체이다. 또 실리적, 실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지나친 수식어나 불필요한 묘사 따위는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건조체의 글은 인간적인 따스함과 정감을 느끼기 보다는 삭막하고 무미 건조하여 딱딱한 느낌이 드는 수가 많다.
불필요한 묘사나 미사여구 등을 배제하고 요점과 내용중심으로 꼭 필요한 말만 최소한으로 쓰는 것이 건조체 문장의 특징인 만큼 대개 문장이 짧은 편이다.
이런 수필은 전문직종과 관련되는 것이나, 학문의 여적(餘滴) 같은 학술적인 것이 내용이 된다. 전문적 학술이 드러나는 글이므로 예술적 향기는 없어도 가치 있는 내용으로 무게가 있다.
이런 장점을 지닌 반면에 자칫하면, 지식을 기록한 백과사전 같은 글이 되기 쉽다. 따라서 식견이 얕은 사람이 쓸 때, 잘못하다간 아는체한 글이 된다.
구미네 부인네들이 한국에 와서 얼마 동안 머물게 되어 본국으로 돌아갈 때 토산품을 사가기도 하지만, 간혹 한복을 맞추어 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외국의 부인네만이 아니라 우리네 신식 부인네들도 사철의 나들이 한복을 몇 벌쯤씩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잘 입지 않고 마냥 양장차림이다. 개중에는 한복차림이 예쁘고 좋기는 하나, 더럼이 잘 타고 바느질을 하거나 삯 내기가 귀찮고 불경제라 해서 양복을 입기 버릇한다는 것이다.
외국 부인네들이 외국의 옷을 구한다는 것은, 이국의 풍속이나 정취에 대한 호기심에서 그러하다고 보아 넘기면 그만이겠지만, 필자가 아는 어느 미국 부인의 감상을 빌면 이렇다.
그야 아랍이나 인도 등지에 오래 나가 있던 외교관이나 시빌리언들의 부인네들은 그 고장의 부인네들의 의상을 호기심이나 취미로 사는 수가 더러 있고, 더욱이 일본여자의 의상을 즐겨 사기도 한다. 물론 각기 특색이 있어서 우열을 따지기는 어려우나, 한복은 우선 청초하게 보여서 좋다는 것이다. 청초하다는 뜻은 위아래가 다 백색이어서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청홍(靑紅)에 찬란한 무늬가 놓여있어도 청초하게 보인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따져 불을 터수가 못되기도 했고, 물어보아서 내가 만족할만한 해답을 얻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복이 청초하게 보인다고 할 때 색체가 필수요건이 되지 않고도 그러하다면, 그것은 그 조형에 특색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여자 한복의 조형이 어떻게 되어있기에 청초하게 보이느냐 하고 따져 묻는다면, 나 역시 명확하게 확답할 수가 없겠다. 어렴풋이나마 잡혀있는 이미지를 그런대로 풀이해 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우선 보기에 좋기로는 주름이다. 이것이 아랍, 인도계통의 치마에도 없고 일본 여자 옷에는 있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공통하기는 오히려 동구 남구 서구와 미주에서다.
여자 치마에 주름을 잡지 않으면 아랍인이나 인도인처럼 둘러 휘감아 입거나 일본여자들처럼 내리닫이 식으로 통으로 걸쳐 앞을 덮어 싸이도록 하는 수밖에 없거나, 아니면 구미식으로 타이트한 스커트가 되어서 보행을 불편케 하기 마련일 것이다. 치마에 주름을 잡게 되면 치마 폭이 여섯 아닌 열두 쪽이라도, 마전 하나에 끈만 달아 입으면 휑 둘러싸이게 된다. 말하자면 주름을 잡으면서 되레 관할(寬闊)하게스레 마련되는 것으로 신축 자재한 조형이라 하겠다.
이상은 기거좌와(起居坐臥)와 보행의 편의를 보아서 그렇다고 하겠거니와 그런 것이 어찌하여 청초하다는 미감을 주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본다.
조형적 상식이거나 좌우로 가로 끄는 수평선은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을 느끼게 하고 따라서 방향적인 애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수평선이 너무 넓어지면 벌판 같은 야비(野卑)를 느끼게 한다.
이에 비겨서 상하의 수직선은 그와 반대로 그 직경(直徑)한데서 숭고와 향상을 느끼게 하며, 그 선이 굵으면 장엄해지고 가늘어지면 청초하게 보이게 마련이다. 우선 초조하다는 ‘楚’자(나무들이 총총히 섰다는 뜻)만 보더라도 짐작이 갈 줄 안다. 예컨데 대나무 하나를 보라. 얼마나 청초한가, 대나무가 많아 대숲을 이루어도 청초한 풍경을 잃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열두 폭 치마라도 주름이 제대로 잡히면 청초한 풍경엔 변함이 없다(생략)
오종식의 ‘한복의 조형미’란 수필이다. 이 예문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문체의 특징은 작가의 전문적 식견과 교양과 지식의 깊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전문적이고도 폭넓은 지식이 없으면 쓸 수 없는 내용들이다.
(6) 화려체(華麗體)
화려체는 건조체와 반대되는 개념의 문체로서 말 그대로 문체가 화려한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건조체가 수수하거나 좀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화려체는 아주 화려하게 장식한 옷차림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체의 글을 살펴보면 직유나 은유 등과 같은 비유가 많고 여러 가지 수식어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비유가 많고 여러 가지 수식어가 많이 붙다 보니 자연히 문장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화려체의 글 중에는 미문(美文)이 많다. 아름답고 화려한 글을 만들기 위해 가꾸다 보니 자연적으로 미문이 되기 쉬운 것이다.
화려체로 쓴 글들 중에는 그 표현이나 묘사가 아름답거나 문학성, 예술성을 지닌 표현이나 묘사가 많은 편이다. 또 아름답거나 멋진 표현이나 묘사, 문학적이거나 예술적인 표현이나 묘사 등을 위해서는 화려체의 문체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유가 너무 많거나 중복되어 있고, 지나치게 수식어가 많으며, 단지 문장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애쓰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비유나 수식어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문장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에만 역점을 둔다면 자칫 내용이 소홀하거나 부실해질 수 있고, 진실성이나 깊이는 부족하여 겉만 반지르르한 글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즉 알맹이는 부족하고 포장만 화려하게 장식된, ‘빈 껍데기’뿐인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화려체의 글들 중에는 알차거나 진실한 내용은 부족하고 것만 그럴듯하게 꾸며진 것들이 많이 있다.
오월 따사로운 햇살의 덩굴이 온 천지에 내려 퍼지듯 둥근 심장을 닮은 호박잎들이 땅을 뒤덮기 시작한다. 개굴창가 울타리, 잡초 무성한 밭둑, 돌비얕, 채전밭 가장자리,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까탈부리지 않고 호박덩굴은 손길을 낮게 재뻗어 울창한 삶을 성큼 장만하고 꽃을 피운다. 봇물 터지듯 노오란 함성으로 피어난 호박꽃 초롱, 이세상 어떤 노란 빛깔이 이보다 노랄 수 있을까.
어느 날 고향집 채전밭 울타리에 눈 멀듯 만발한 호박꽃은 내겐 하나의 경이로움이었다. 골방 시렁 위에 겨우내 버려진 채 뒹굴던 늙은 호박 하나가 이렇듯 노란 초롱불의 눈부신 세상을 이룰 수 있다니 놀랍게도 퀘퀘한 골방의 늙은 호박은 화사한 꽃천지의 시간을 그 작은 씨앗 속에 비밀하게 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호박꽃을 따서 빠금사리를 하거나 귀에 대고 꽃 속에 갇힌 꿀벌들의 징징거리는 소릴 들었다. 그것은 마치 꽃잎이 목청을 떠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밤에도 집집마다 호박꽃잎 같은 봉창이 하나씩 피어나던 마을, 척박한 땅에서도 호박 잎처럼 도란도란 어우러져 살아가던 그 옛날 고향 사람들의 소탈한 웃음은 내 마음속 그리움의 덩굴에 맺힌 또 다른 호박꽃이기도 했다.
화단마다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이 오월엔 문득, 허접쓰레기 쌓인 고터 어디에서라도 개밥바라기처럼 피어 있을 호박꽃을 보고 싶다.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씨앗 하나로 버려져도, 묵묵히 저 혼자 덩굴을 뻗쳐 마침내 온 세상 노란 초롱 밝히듯 은은히 피어난 호박꽃 같은 사람 문득 만나고 싶다.
이 글은 시인 유 하가 쓴 “마침내 노란 초롱 밝히듯”이란 글인데, 한눈에도 화려체 글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글은 화려체의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는 미문으로 쓰여진 화려체에 속하는 글이다.
(7) 미문체(美文體)
미문체는 화려체와 비슷하게 미사여구로 꾸민 글이다. 이 문체의 명칭은 고유명사로, 근래에 와서 수필에 많이 쓰이는 문체다.
미문의 미는 아름다운 것[嘉] 예쁘고 좋은 것[好] 맛이 난다는 것[甘], 즉 감미(甘味)롭다는 뜻을 지닌다. 이 세 가지 중 미문의 풀이는 감미롭다는 뜻으로 기우는 말이다. 미문의 개념은 수사적 방법에 의해,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지금은 변질되어 추상적, 상직적, 관념적 언어로, 화려체와 함께 말장난의 대표적인 문체다. 말하자면 알맹이 없이 공허하고 삶의 실체가 담겨지지 않은 글이다.
문장이란 문인이 쓰는 글을 말한다. 고전적 풀이로 보면 문인이란, 문덕(文德)이 있는 문사(文士)요, 문덕이란 교화 선행의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장이란 인간의 실체를 떠나서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작가만의 넋두리가 되는 기록일 수는 없다.
깊어가는 가을 밤엔 부르고 싶은 마음으로, 내 영혼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싶습니다. 모질게도 맵고 추운 오동지 섣달에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언 손을 녹이고, 시린 무릎을 덥히고 두 눈 가득히 더운 눈물을 채우고 싶습니다.
이 예문은 일간신문 광고란에 실린 글의 일부다. 글의 인상을 말해본다면 작가의 나이가 20대 미만의 미숙한 세대라는 인상과 나열된 언어들이 매우 감상적이어서 측은하기까지 하다. 실체가 없는 나약한 관념어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글에, “우리가 화려한 수사적인 장치들을 걷어낸다면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남을 것인가” 하고 평론가 홍정선(洪廷善)은 지적한바 있다.
그러나 작자를 대변해서 말한다면 독자가 있는 이상 글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환각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수필은 산문정신에 의해 쓰여지는 글이다. 산문정신이란, 사실개념에 바탕을 두고, 분석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이와 같은 공허한 문장은 산문정신이 추방된 상태에서, 미문이란 이름으로 상업주의에 업혀 미숙한 독자를 오도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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