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東宮) 권역의 자선당과 비현각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와을 이을 왕세자의 거쳐로 정사를 돌보는 근정전, 사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되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한 만은 역사를 지닌 동궁전은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고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소주방은 현재 복원 중에 있습니다.
1930년대 사진입니다.
현재의 동궁전 권역의 자리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이 보입니다 이건물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미술관으로 건립되었고 동궁권역 복원사업을 위해 1998년 철거되었습니다.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은 왕세자 및 세자빈의 처소로 자선(資善)이란 어진 성품을 기른다.』 자선당은 세종 때인 1427년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자선당의 첫 주인은 세종의 아들인 당시 왕세자 문종이었으며 문종은 왕에 즉위까지 20년을 이곳에서 생활했으며 문종이 세자시절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해산한 곳이기도 하며 해산 이튼날 산욕열로 이곳에서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단종이 왕위에 오른 뒤 숙부인 세조에게 다시 왕위를 물려 주고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쫓겨 나간 곳이기도 한데 당시 궁녀들 은 이곳 자선당을 앵두궁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문종이 왕세자 시정 세종이 앵두를 무척 좋아하여 자선당 둘레에 온통 앵두를 심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선당 유구에 대하여......
자선당은 세종 때 세워 졌으나 여러 차례 차례 소실되고 다시 중건을 거듭하다가 고종 때인 1888년에 중건되었는데 당시 왕세자인 순종이 이곳에서 거처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에게 주권을 모두 빼앗긴 1914년에 근정전 앞에 조선 총독부와 박람회장을 짓는다는 이유로 궁궐을 일본 사람들 마음대로 뜯어댔는데 이때 광화문은 지금의 민속박물관 정문 앞으로 이전되었고 자선당은 경매를 붙여 일본인에게 넘겨졌는데 일본사람 오쿠라 기하치로라는 자가 자선당의 돌과 목재 등을 모두 일본으로 싣고가 1916년9월 오쿠라의 저택에 이건한 후 성대한 낙성식을 갖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잘 보존되던 자선당은 긴토 대지진 때 불에 다 타버리고 검게 그을린 유구(기초가 되는 장대석)만 남게 되었는데 이유구는 1996년 80년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99년 자선당 복원 공사를 할 때 원래 자선당 유구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여러 차례 협의 했으나 검게 그을린 점과 안전상의 이유로 원래의 기단석을 사용하지 않고 현재 건천궁 부근에 기단만 쌓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가 인접하고 있으므로 자선당 유구를 보관하고 있는 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에 있으므로 이러한 시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는 문화재청과 청와대 경호팀이 출입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협의를 해 공개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애석하게 느끼는 것은 1999년 자선당을 복원할 때 검게 그을린 유구를 그대로 사용하므로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후세들에게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산 교육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
뒤로 북악산과 청와대 일부가 보입니다.
유구 뒤로 건천궁이 보입니다.
검게 그을린 장대석이 슬픈 우리의 역사를 말해 줍니다.
새로 중건한 자선당의 거실입니다.
거실 천장의 단청 문양입니다.
내부의 모습
동궁 내전이며 침전인 자선당은 사정전 동쪽에 있으며 창건 년대는 확실치 않은데 세종11년인 1429년 이곳에서 세종임금이 정사를 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복궁의 여러 건물 중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과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쳤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고종4년 경복궁 중건 때도 건재하였다고 하는데 일본강점기 때인 1915년 박람회를 개최 한다는 명목으로 철거하였던 것을 1999년 복원하였습니다.
『선을 도움 받는다.』라는 뜻을 지닌 현판은 1999년 복원당시 오옥진이 쓰고 새겼습니다.
중광문(重光門)
자선당의 첫 번째 남쪽문으로 고종4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졌는데 고종실록에 기록된 위치와 복원한 현재의 위치가 다르며 중광이란 『빛나는 덕을 거듭 밝힌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진화문(震化門)
『왕세자가 변화한다.』는 뜻을 지닌 진화문은 중광문을 지나 자선당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고종실록에서 말하는 중광문의 위치인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문은 1999년 복원 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숭덕문(崇德門)
『덕이 있는 이를 높임』이라는 뜻을 지닌 숭덕문은 근정전에서 동궁전으로 가면 맨 처음 만나는 문으로 언제 만들어 졌는지 알 수 없는데 고종7년에 숭덕문에 대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성문(美成門)
미성이란『세자의 아름다운 덕은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미성문은 자선당 서쪽에 있는 문으로 건립연대는 미상이며 현재의 문은 1999년 복원 할 때 만들어 졌습니다.
삼비문(三備門)
자선당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삼비란 『3가지를 갖춘다』는 뜻으로 3가지란 왕세자가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3가지 덕목으로 1.신하입장에서 임금을 섬기는 일 2.자식입장에서 부모를 섬기는 일 3.어린사람입장에서 어른을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비현각(丕顯閣)
세자가 공부하던 곳으로 자선당 동측에 있으며 비현이란 『덕을 크게 밝히다』라는 뜻으로 현판은 1999년 설치하였으며 오옥진이 쓰고 새겼습니다.
구현문(求賢門)
비현각의 동쪽문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1999년 복원 시 만들어졌으며 구현이란 『어진 이를 구한다.』뜻으로 “현인을 구하여 임금의 덕을 기르고 정사를 시행함에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극문(貳極門)
동궁권역 동측 행각 남측에 있는 문으로 고종4년인 1867년 경복궁 중건 시 세워졌으며 1999년 복원되었으며 이극을 직역하면 『두번째 북극』이지만 여기서 북극은 북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북극성은 임금을 의미하니 두 번째 북극이란 세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모문(貽謨門)
비현각의 첫 번째 남쪽문으로 자선당의 중광문과 비유되는 이 문은 경복궁 중건시 만들었으며 현재 문은 1999년 복원한 것으로 이모란 『선대 국왕이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을 의미합니다.
길위문(吉爲門)
자선당의 중광문과 진화문 사이 우측, 비현각의 이모문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문은 자선당과 비현각을 잇는 문이며 기위란 『선한 행동을 하다』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