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마리안)".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샤를 10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의 특권을 회복시키고 의회를 해산시키자 프랑스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1830년 그린 그림으로 "프랑스 7월 혁명"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유의 여신은 밀로의 비너스를 모델로 삼았으며, 잔 다르크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La Tricolore,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를, 다른 손에는 총검을 휘두르고 있다. 여신 왼편에 씰크햇을 쓰고 장총을 든 사람은 들라크루아 자신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혁명적 낭만주의)를 이끈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였으며 이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1824년 그린 또 하나의 작품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위해 혁명을 도모했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으로 살육한 사건이 "키오스 섬의 학살"이다. 1861년 그린 "대천사와 야곱의 싸움"은 그의 영적인 유언이었다.
※ 스페인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드 고야" 역시 낭만주의의 선구자이다. 인간의 숨겨진 감정을 그린 낭만주의 선구자 고야의 대표작 "옷 입은 마야"와 "옷 벗은 마야"는 어느 날 알바 공작 부인의 부탁으로 그리게 되는데 알몸의 그림을 완성하려던 그때 부인의 남편이 화실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누드화에 옷을 입혔다. 남편이 돌아간 후 다시 한편의 누드화를 그렸다. 고야는 46살에 귀머거리가 되는 시련을 겪었는데 이 무렵 알게 된 사랑이 미모의 알바 공작 부인이었다고 한다. 한편 알바 공작의 집안에서는 자꾸만 소문이 떠돌자 부인의 무덤을 파해치는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공작 부인의 체형과 골격을 비교해서 그림의 모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스페인 재상이었던 "마누엘 고도이"의 애인을 그렸다는 소문도 있다. 고도이는 이 그림을 자신의 집에 걸어 두고 즐겼다고 한다. 보통때는 옷을 입은 장면을 보고 있다가 벽을 한 바퀴 툭 쳐서 돌리면 벗은 장면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814년 그린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 식민시절 스페인 사람들의 민중 봉기를 그린 그림으로 프랑스 점령군이 5천 명의 스페인 시민을 학살한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그림이다. 낭만주의는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고 강력한 감성을 표현했다.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친분이 있어, 폐결핵으로 지중해 마르요카 섬으로 휴양 가 있는 쇼팽을 방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