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개관
히브리서 1:1~3
오늘부터 우리가 수요예배에 함께 살펴볼 히브리서는 매우 중요한 서신서입니다. 이 서신서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근본적 토대를 튼튼히 하고 연약한 믿음이 분발하여 성숙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히브리서에 대하여 우리가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먼저, 이 히브리서의 형식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안부 편지의 형식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편지라면 초반에 누가 쓴다는 말이 있고, 받는 사람이 특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사말도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그러한 것이 없이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히브리서가 일종의 신학적 논문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용이 심오하고 체계적인 면도 있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구체적인 신앙적 위기에 직면한 성도들에 대한 목회적 적용의 의도가 있기 때문에, 담백하고 학문적인 논리만 가득한 논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 히브리서는 무엇이라고 그 형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히브리서는 편지의 형식이 가미된 목회적 설교, 권면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히브리서 13장 2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저자는 ‘권면의 말’ 곧 설교로 생각하고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신앙을 위하여 권면의 말을 글로 쓴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글로 쓴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히브리서는 누가 쓴 것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는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사도 바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썼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참으로 방대하고 깊은 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기에, 이 견해도 매우 유력하게 믿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바나바는 원래 레위지파 출신이므로 히브리서에서 자세하게 피력되고 있는 성전 제사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고 판단하여 바나바가 저자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라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이차 전도여행을 마칠 때쯤에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열정적인 교사입니다. 그는 성경에 박식한 자요 예수에 대하여 가르침에 능한 자였다고 누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하기도 하였던 당시 젊은 사람이었기에, 충분히 히브리서의 저자로 여기기에 족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3절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한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영향권 아래 함께 동역했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 서신의 저자로서 가장 근접한 견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주님을 직접 본 세대는 아니고, 사도들에게 전해들은 복음을 듣고 배운 자입니다. 히브리서 2:3 말씀에,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이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호가증한 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저자는 예수님을 직접 뵙지 못하고 사도들에게 전해 듣고 믿게 된 세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가르침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 대단히 영적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단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성전 제사 문제들에 대하여 큰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성전 제사 제도를 지켜야 하는지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이 편지에 자세히 성전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간의 대조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가르친 것을 보아도 유대인 그리스도인 성도들을 향하여 쓴 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는 히브리서 13장 24절 말씀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본 것처럼, 이달리야에 거주하는 유대인 성도들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이달리야의 수도 로마 시 안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유대인들 이민자들이 많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중에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서신을 받는 대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를 써 보낸 저자의 기록 목적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도들의 박해를 위로하고 인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10장 32절 이하에 이르기를,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2~36)
그들은 로마의 강력한 압제와 핍박을 받았었습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당하는 당시에도 그러한 영적, 물질적, 신체적, 환경적 신앙의 핍박을 계속하여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위로와 권면과 소망이 필요했습니다. 편지의 저자는 그들에게 그러한 시련의 시기에 믿음의 인내가 헛되지 않음과 곧 다가올 영광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일깨워주면서 더욱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도들의 신앙의 안일함을 경고하고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게 하려 함입니다.
히브리서 2장 1절로부터 3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쓸 시기를 대체로 주후 60년에서 주후 70년 사이로 봅니다. 사도들이 대부분 순교하기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에 30년, 40년이 지나가는 때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도들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채 전해 들은 전도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어느 틈엔가 믿음이 시들해지고 세상의 유혹에 연약해지는 신앙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죄와 싸움에서도 철저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타협하려는 경향이 교회 공동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모이기를 게을리하고, 봉사에 대한 열정도 식어가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쓴 저자는 점점 믿음 생활에 활력을 잃어가는 안일한 성도들에게 경고와 격려와 심판적 위기 의식, 혹은 주님 앞에 장차 설 때의 귀한 상급의 소망을 증거함으로써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열심을 내게 하고자 힘썼습니다.
“하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히 6:10~12)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라는 말씀이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일에도 성장해야 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13)
때가 오래 되었다는 말은 신앙 연조가 오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신앙 성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말씀의 초보적 단계부터 새로 배워야 할 만큼 연약한 상태에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의 영적, 지식적, 신앙 생활적, 봉사와 예배와 모임에 대하여 많은 지도와 격려와 경고를 이 서신서에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면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으로 절실히 필요한 권면들이라 생각합니다.
셋째, 유대인 성도들이 성전 제사 방식의 신앙 생활로 되돌아가려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10:1~4 말씀에,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서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이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서신에 매우 자세하게 구약 율법과 구약의 성전에서의 동물 제사의 한계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모세 율법의 언약이지만, 그것들은 단지 그림자였습니다. 본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여 반복적으로 율법의 규정들을 주석하고 해설하면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진정한 속죄의 완성을 이루었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이러한 구약 제사장의 불완전한 제사와 우리 구주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를 끊임없이 비교하여 말씀함으로써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2말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으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할렐루야. 그 때 당시에도 예수님을 완전한 구주로 모시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라는 사실에 대한 불신과 의심과 유혹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너희는 흔들리지 말라”는 경고 말씀처럼, 우리도 오직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오직 주님만을 향하여 우리 믿음의 시선을 고정합시다.
이 히브리서를 받는 그 당시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영적 상황은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영적 상황과 많이 비슷합니다. 처음 사도들이 체험적 신앙으로 여러 이적과 기적으로 예수님을 직접 본 확실하고 확신에 가득찬 증거의 시대가 지난 후에 이제 우리는 기록된 증언들을 통하여 신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과 혹은 핍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여러 미혹된 해석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신앙 연조가 많으나 세속적인 유혹과 안일과 타성에 젖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어린아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 히브리서는 좋은 자극과 격려와 경고와 힘을 줄 것입니다.
앞으로 이 히브리서 내용을 깊이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크고 성숙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다다음 주부터 구체적으로 이 성경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