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자牧者로 불리운 키루스 2세
“정복지의 문화, 역사, 종교 포용 정책 펼쳐”
이사야 49장 6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를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성경에서 예언된 키루스 2세
이렇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였듯이 기원전 539년 10월 11일에 키루스 2세(The Great Cyrus Ⅱ, 558-529 BC, 개역성경은 ‘고레스’)가 바빌론 제국을 정복한 후 그해 10월 29일 2시에 무혈입성하였다. 이로써 키루스가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이때부터 바빌론에서는 고달픈 유민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향을 그리워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키루스 대제는 유대 유민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을 발표한 바 있다(대하 36: 22-23).
키루스가 바빌론 전국 각지를 진격할 때마다 모든 성읍들이 그에게 통치권을 이양하였다. 당시 섭정왕으로 있던 벨사살(Belshazzar)은 페르시아 군인들이 바빌론으로 입성할 때에 죽었다.
바빌론의 통치자 나보니두스(Nabonidus)의 통치 기간동안 그의 절대종교정책으로 말미암아 바빌론은 분열될 위기 속에 있었다. 왜냐하면 나보니두스는 달신 난나(Nana) 만을 인정하였고 태양신 마르둑(Marduk)을 경멸하는 종교정책을 지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바빌론 제국 내에서는 종교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고, 이것은 키루스의 바빌론 정복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는 동기가 되었다. 반면에 키루스는 여러 도시들이 주신으로 삼았던 마르둑(Marduk) 신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바빌론의 상류계급을 페르시아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537 BC). 이렇게 해서 키루스는 바빌론에서도 그 정통성을 인정받은 제왕이 되었다.
이처럼 키루스의 관용정책(Cosmopolitanism)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이러한 정책적 종교관용주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정체성을 일깨우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후 키루스 대왕의 정복전쟁은 계속 확장되어 갔다. 박트리아(Bactria)와 스키타이의 지역까지 정복지를 확대하였다.
키루스 2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과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 제10권에 ‘답사’라는 소제목이 붙은 제1장에 크로에소스와 키루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 기록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극히 단편적인 내용들이 그리이스인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역사 제4권에는 미트라다테스의 집에서 보냈던 키루스의 소년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가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가 낳았다고 하는 출생의 내용 등 오랜 전승을 근거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 사후 1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자료들을 수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자료는 그리스 궁정 의사였던 크테시아스의 단편적 기록이 있다. 그는 다리우스 2세와 아드닥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Ⅱ, 404-359 BC) 밑에서 일했던 인물이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17년 동안 살면서 왕실 기록을 접하였던 사람으로 페르시아의 역사를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분실되고 일부만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키루스가 크로에수스와 나보니두스를 정복한 사실보다는 제국의 동방 지역들과 벌였던 전쟁을 훨씬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밖에 키루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는 9세기 비잔티움의 대주교 포티우스가 남긴 작품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리이스 원전들은 라틴어로 번역되고 주석이 달려있다.
키루스 대왕은 그의 통치력의 비범함을 바탕으로 군사 전략가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메디아를 정복한 키루스는 제국을 더욱 확장시키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나갔다. 아나톨리아의 리디아(Lidia)를 정복할 때에는 페르시아 군대의 낙타부대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크로에수스(Croesus)의 기병대를 물리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우수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키루스는 에게해의 그리이스 도시 국가들을 차례대로 정복하였고 동쪽으로는 박트리아(Bactria)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정복한 나라들을 다루는 데도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키루스는 포로로 체포한 바빌론의 왕 나보니두스를 정중하게 예우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나보니두스(Nabonidus)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국장을 치러 예우해 주었다.
키루스는 유대 유민(Free Man)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바빌론이 탈취하여 왔던 성전 기물들을 되돌려 주었으며 성전 건축 비용까지 아끼지 않고 국고에서 충당하여 주었다(스 6:13-15). 이러한 키루스를 유대인들은 해방자로 여겼다.
키루스의 또 다른 탁월한 리더십은 그가 정복한 정복지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종교를 페르시아보다 우월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는 승자의 언어와 종교를 피지배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각 지역의 토속신 숭배와 종교적 제의를 경외하였고 그들의 통치적 가치관을 역시 존중하였다.
메디아에서 도입한 사트라프(Satrap: 총독)가 통치하는 체제에 대하여는 메디아의 방식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앗시리아의 필경사(서기관)들의 전문 지식인들을 활용하는 정책과, 페르시아의 국방전략을 정책에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던 인물이 키루스 대왕이었다.
그는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면서 측근들을 적재 적소에 등용하였는데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또한 키루스는 상대의 약점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소아시아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지역 관리들의 타락을 역이용함으로써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다민족 포용하는 리더십 발휘해
키루스는 또한 이란 남부의 일부인 수사와 파사르가대와 같은 새로운 수도를 지명하면서도 메디아의 옛 수도인 엑바타나도 수도로서의 중심 도시 기능을 상실하지 않도록 번영하게 하는 정책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