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사자가 어제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가이사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27:21-26) 알렉산드리아호에 승선한 사람들은 갑자기 불어닥친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속에서 모든 통제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들은 여러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어느 방향으로 휩쓸려 가는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항해의 어려움 속에서 지키려 했던 재산도 그들의 통제 밖에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전복을 막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물들을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지마 죽음의 광풍은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심중에서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모조리 증발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날 같은 희망마저 놓아버린 채 죽음의 절망 속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알렉산드리아호에 그들만 타고 있었다면 그들의 인생은 죽음의 광풍이 몰아치는 지중해 한 가운데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에는 사도 바울도 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황제의 법정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서야 할 바울이 그 배에 타고 있는 한 죽음의 광풍도 바울이 타고 있는 배를 삼켜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통제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죽음의 절망 속에 빠져 버린 그 순간 바울만은 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안심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유뒤메오'는 본래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희망의 끈 마저 스스로 놓아버린 채 죽음의 절망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바울이 그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덕분이었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라고 해서 죽음의 광풍이 바울 만을 비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죽음의 광풍에 휩쓸리며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광풍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만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아무리 죽음의 광풍이라 할찌라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과 함께 하는 한 이 세상의 그 어떤 죽음의 광풍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로마로 향해 가는 바울의 앞 길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음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은 먼저 하나님을 내가 속한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은 아득히 멀리 계시는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내가 속해 있는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바울의 자기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증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23절을 다시 보면 바울에게 내게 속한 하나님은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속함과 섬김은 동일한 의미가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이땅에 보내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판단을 더 섬긴 결과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유대인의 혈통에 속해있었지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이처럼 속함과 섬김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바울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이었습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섬김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는 예배하다, 경배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배와 섬김은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경우에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섬김의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됩니다. 예배의 결과가 섬김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섬김은 예배당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배와 섬김의 출발지는 예배당 안이지만 그 완결지는 예배당 밖 삶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 예식으로 드려진 예배와 섬김이 예배당 밖에서 삶의 예배와 섬김으로 완결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예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와 섬김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면 예배당 밖에서 삶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와 섬김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섬김은 반드시 예배당 밖 삶의 현장에서 사람에 대한 섬김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교도들 처럼 예수를 부인하면서 교회를 짖밟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예배하고 섬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에 의해 조작된 하나님의 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 바울은 그동안 그릇 섬겨오던 하나님의 허상에서 벗어났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보니 그동안 자신이 부정해왔던 예수님이 자신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그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예배와 섬김은 언제나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임하신 주님에게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때까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이 박해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 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세 차례나 지중해 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것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섬김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