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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통(중국어: 劉福通, 1321년 7월 8일 ~ 1363년 2월 23일)은 영주(지금은 안후이성) 출신 인물이다. 중국 원 시대 말기 홍건도의 두목이었다.
생애[편집]
1351년 (지정 11년) 5월, 원나라 순제가 황하 치수공사를 위해 대규모의 양민을 부역시키자 이를 계기로, 유복통과 한산동의 지휘 아래 백련교도들은 영주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홍건(紅巾)을 이름으로 삼았다. 미륵불을 신봉하며, 홍건적을 조직해 원군에 대항하였으며, 안휘성 하남지구를 공격하였다. 이에 원말의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1355년 (지정 15년)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대한송제국 황제로 세워 소명왕(小明王, 또는 소명제(小明帝))이라 칭하고, 보저우(亳州)에 도읍을 정하였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카이펑을 점령하는등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며 홍건적의 고려 침공이 발생하였다.
1363년 (지정 23년) 2월 23일 초봄, 장사성이 여진(呂珍)을 보내 안풍을 포위 후 공격하여 유복통을 참살하였다.
이 때 주원장이 구원을 와 여진(呂珍)을 물리친 후 한림아를 구출해내어 저주(滁州)로 맞아들였으나 1366년 (지정 26년), 주원장은 한림아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松京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사데이터베이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어디에도 중국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오며,명사.청사에도 안나오는데 혹시 松京이 중국과 관련된 자료 보신 분 계신가요?홍건적이 바다와 육지를 통하여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DCI]ITKC_JT_S0_A10_01A_19A_00010_2005_008_XML DCI복사 URL복사
. 임금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왜서계(倭書契)의 진위(眞僞)는 어떠한가?”
하니, 김석주가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바다 만리를 건너서 남의 나라를 친다는 것은 사리(事理)가 반드시 어려울 것이고, 또 청인(淸人)이 이미 오삼계(吳三桂)를 멸망시켰고, 또 해구(海寇)와 서로 치므로 정금은 바야흐로 청인을 막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우리 나라까지 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근년에 남이성(南二星)이 연경(燕京)에 사행(使行)하였을 때에 우연히 정금의 글을 베낀 것을 얻었는데 ‘돛 하나만 달면 고려(高麗)까지 갈 듯한데, 어느 땅엔들 나라를 세울 수 없겠는가?’ 하였고, 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 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첫댓글 최영장군은 화주.사주.고우성 전투등 29회의 천투에서 승리하고, 회안성 전투에서 적선 8000척을 물리치고 1355년에 귀국합니다.
서달이 장사성을 잡는데 8개월동안 100만명을 투입하였다는데, 이것이 말이 될까요? 물론 오왕 장사성은 1385년에 살아서 고려의 해안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글씨가 왜 이리 못 쓸까요.홍재전서의 반에 반반반도 안되네요. 참고로 松江은 강남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