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별곡
김 계 순
겨울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양력 동짓달 중순 새로운 풍경에 신기한 마을 주민들은 신나는 이야깃거리와 행복한 마음을 맘껏 발산한다. 열엿새와 열이레 양일간 우리 마을에는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싱싱 고향별곡」 촬영을 하는 날이다.
진행자인 기웅 아재와 단비가 사람 사는 맛을 구수하고 진솔하게 그려내는 이 프로그램은 효도와 효자 프로그램으로 우리 지역에선 인기가 있다.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이 대부분이 어르신인 우리 마을에 활기가 넘치는 시간들이다.
맨 처음 순서는 팔순이 넘어도 청년처럼 사시는 교촌댁 이야기다. 연상인 부인과 맏이로서 어르신 모시고 아이들 잘 키우면서 없는 살림 일구어 오느라 힘이 들었지만, 지금은 부러울 거 없이 너무도 알콩달콩하게 잘 살아온 구수한 얘기를 아직도 청년처럼 활기차게 주저리주저리 풀어낸다.
다음은 지난해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면서 주위에서 화가로 불러주는 잉꼬부부 송촌댁 이야기다. 아저씨는 귀가 어두워 큰 소리로 고함치며 대화를 하거나 나갈 때는 호루라기를 이용해 불러야 한다. 마음이 답답한 부인에게 늘 혼나는 듯 보이지 아저씨는 언제나 부인이 하자는 대로만 다 하는 거 같다. 만능 재주꾼인 수다쟁이 송촌댁은 아직도 손을 꼭 잡고 잘 만큼 사이가 좋다고 한다. 그분들이 있는 자리는 늘 싸우는 듯 보여서 싸우는 잉꼬부부라 부른다.
이번엔 여러 해째 행방을 모르는 아들을 찾기 위해 방송에 나가고 싶다는 수원에서 이사 온 이 씨 아저씨 차례다. 그는 전날 자그마한 증명사진 한 장과 신상 명세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며 이걸 가지고 방송에 좀 내주면 안 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안쪽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지의 가장자리는 닳아 있었다. 순간 가슴이 찡해 왔다. 직접 그 사연을 말씀하시는 게 훨씬 좋겠으니까 직접 출연하시라고 말씀드렸다.
단 하나 핏줄인 아들을 찾고 싶어 속이 재가 되어버린 그분은 전단을 만들어 사방천지 다 수소문하면서 경찰에 실종 신고까지 내었다고 한다. 수없이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여태까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아들 생각에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사를 하면 아들이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봐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사정상 집에도 못 가고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가서 촬영하며 아들을 애타게 찾는 하소연을 해야 하는 수원 아저씨의 사정을 헤아리며 모두 안타까워한다.
이번에는 육이오 때 이북에서 내려와 집성촌에 정착하여 두 부부가 열심히 살아오면서 아들딸 여덟을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감산댁 차례다. 있는 대로 다 내놓은 의자에 두 줄로 앉아도 빠진 사람이 많은 팔 남매의 집엔 지금 왁자지껄 북적인다. 엄마 슬하에 증손까지 40명이 넘는다는 이 댁은 한 번씩 모이면 아예 소를 잡아야 할 만큼 대가족이다.
마침 어머니 생신을 맞아 아들 집에서 모두 모여 축하 잔치를 하고 어머니가 사는 시골집으로 다시 모였다고 한다. 모두들 부러워할 만큼 우애들이 아주 깊은 모범 집안으로 화목이 넘쳐 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훈훈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눈물 반, 웃음 반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잊고 있었는지, 차마 꺼내지 못했는지 털어놓지 못한 사연 하나를 숙제처럼 풀어냈다. 없는 살림에 총총 낳은 아들에 여덟 번째 아들을 또 낳았는데, 힘들어하는 사정을 듣고 서울 어느 부잣집에서 아이를 사러 왔더란다. 동생을 또 업어 키워야 하는 딸 중 하나가 갓 태어난 동생을 팔자고 떼를 쓰며 울어도 차마 못 팔고 그냥 돌려보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다.
워낙 잘 생기고 착실한 중년이 다 된 그 청년을 보면서 동네 어르신들은 웃으면서 재미있게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 일은 차마 꺼내지 못할 아프고 슬픈 기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요즘 핵가족으로 단출해진 집과는 달리 뭔가 푸근한 느낌을 주는 집안이다.
이어서 젊은이가 귀한 마을에 보석처럼 귀촌한 청년이 어머니를 위해 새로 집을 지어 꿈을 키워가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싱싱 고향별곡」 촬영을 구경하느라 마을 분들은 방해될까 조심하며, 코로나로 인해 더욱 힘든 이 시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숨을 죽이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다 보이진 않지만 선하게 웃는 눈빛만으로도 행복의 깊이가 충분히 가늠된다.
방송 촬영도 조심스러워 예전 같으면 마을 잔칫날이 되고 한껏 들뜬 날들이 되었을 텐데,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제작진들은 마을에 일절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지나다니면서 시골의 살아가는 실제 모습들을 상큼하게 생동감을 그대로 그려내려고만 애썼다. 마을 분들도 알아서 척척 눈치 보며 코로나 안전 수칙을 지킨다.
마을에는 이제 한동안은 신선한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각자 마음에 작은 행복 하나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포근한 추억을 하나 더 쌓아 밝고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