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킹 목사-투투 주교에 영향
‘고백교회’ 설립, 히틀러에 저항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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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회퍼는 뉴욕 할렘의 한 흑인교회 주일학교에서 근무하며 소수인이 겪는 사회적 불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됐다. |
1960년대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준 영국 성공회 주교 로빈슨(J. A. T. Robinson)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자 셋으로 루도르프 불트만, 폴 틸리히, 디이트리히 본회퍼를 들었다.
1960년대에 『세속도시』라는 책을 써서 신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현 하버드 대학교 하비 콕스 교수도 본회퍼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 하나다.
미국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남아공 인권운동가 데스몬드 투투 주교도 본회퍼로부터 영감과 용기를 얻은 이들이다.
한국에서도 본회퍼가 쓴 책이나 그에 관한 책이 20여권 출판되어 있다.
정신과 의사 대신 목사의 길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여자 형제 사비네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의 신경과 및 정신과 교수, 베를린 병원의 정신 병동 과장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훌륭한 가문의 딸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자녀들을 학교 대신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신과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의 기대와 달리, 열네 살 되었을 때 자기는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리라 공언했다.
그의 형이 “교회처럼 보잘것없고, 허약하고, 재미없고, 쪼잔하고, 브르조아적인 기관에서 평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당부하자, 그는 “형이 말한 것이 진짜라면, 내가 그걸 개혁해야지.”하고 대답했다.
본회퍼는 튜빙겐 대학에 입학하여 일 년 다니다가 로마를 방문하고 1924년부터 그 당시 아돌프 폰 하르낙 같은 신학자들이 주도한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지 베르린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거기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생겨난 신정통주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저서를 읽었다.
하르낙은 본회퍼에게 “과학적 신학을 경멸하는” 바르트의 사상을 경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성을 감지하고 그 약점을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보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가 현대 세계의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는 하르낙의 입장과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주의적이어야 한다는 바르트의 주장을 절묘하게 종합해서 자기 신학을 구성했다.
본회퍼는 1927년 베르린 대학을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 21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서 그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는데, 바르트로부터 ‘신학적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2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인 교구로 가서 1년간 봉사했다.
여기서 투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국제 금융시장에서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9년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와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에 끼친 초월주의 철학의 영향력을 밝히는 논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목사로 안수 받을 나이가 되지 못해 1930년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신학이 없다.”고 할 정도로 미국 신학이 독일 신학의 수준에 미흡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그는 그의 삶을 바꾸는 경험을 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 밑에서 공부하며 같이 공부하던 흑인 학생 프랑크 피셔를 만난 것이다.
피셔는 본회퍼에게 뉴욕 할렘에 있는 한 침례교회를 소개하고, 본회퍼는 그 교회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미국 흑인들의 영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 교회 목사가 사회정의를 외치는 설교를 들으면서 흑인 등 소수인들이 겪는 사회적 불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이런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 사물을 ‘억압 받는 자들의 시각에서’ 보기 시작하고, “여기야 말로 죄와 은혜와 신의 사랑에 대해 진정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했다.
나중 이 때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나는 말장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유대교 박해-독재에 투쟁
1931년 본회퍼는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 조직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그리스도교의 이론적인 면만을 천착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는 행동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1931년 11월 15일 드디어 25세의 나이로 베를린에 있는 성 마태 교회에서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33년 1월 30일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평탄하던 본회퍼의 삶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은 이틀 후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을 ‘잘못 인도할 지도자(Verführer)’가 될 수도 있는 ‘지도자(Führer)’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방송은 도중에 끊겼다.
그해 4월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비판하면서, “교회는 바퀴에 깔린 희생자에게 반찬고나 붙여주는 일에 만족하지 말고 바퀴 자체의 바퀴살을 틀어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본회퍼는 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나설 때 그의 동료들과 함께 ‘고백교회’를 설립하여 나치정권에 대항했다.
1933년 9월 아리안(독일인종)이 아니면 교회를 맡을 수 없다는 법령이 채택되고 본회퍼에게 베를린 동쪽에 있는 어느 교회를 맡으라는 제안이 왔을 때 그는 이것이 인종차별 정책이라 비판하면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치 정권에 협력하는 독일 교회에 실망한 본회퍼는 영국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 둘을 2년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1933년 가을 독일을 떠났다.
1935년 영국에서의 계약이 끝나고 인도 간디 아슈람에서 간디의 지도로 비폭력 저항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주 좋은 기회였지만 독일에서 고백교회 목사들을 훈련할 지하 신학교를 이끌기 위해 독일로 돌아왔다.
그가 할 일은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자금을 모으는 일이기도 했다.
이 신학교를 도와준 후원자 중에는 룻 폰 클라이스트-레쪼우라는 여자도 있었는데, 본회퍼는 후에 그 여자의 손녀 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하고, 약혼한지 석 달 만에 나치 정권에 의해 체포되었다.
1937년 9월 게스타포는 신학교를 폐쇄하고 11월 27명의 목사들과 졸업생들을 체포했다. 다음 2년간 본회퍼는 나치의 눈을 피해 작은 마을에서 불법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신학 교육을 계속했다.
이때 본회퍼는 그의 신학교 지도 경험을 기초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 『제자됨의 값』과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내었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풀이한 처음 책에서 그는 도덕적으로 해이하면서도 용서를 받는다는 생각의 ‘값싼 은혜’를 공격하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은혜,’ ‘제자됨의 값’을 강조했다.
본회퍼는 평화주의자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도 없었고, 나치 정권을 위한 군복무에 임할 수도 없었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에 속했다.
본회퍼는 도저히 독일에 계속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1939년 6월 유니온 신학교의 초청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으로 온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라인홀드 니버에게 쓴 편지에서 “제가 미국으로 오기로 결심한 것이 실수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독일 국민들과 함께 독일 역사에서 이런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내야 합니다.”고 하고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에 돌아온 본회퍼는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이 금지되고 정기적으로 그의 활동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에는 인쇄매체로 글을 쓰는 것도 금지 당했다.
그러면서 그는 1938년부터 매형을 통해 알게 된 반나치 저항 운동에 가입했다.
이들은 결국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본회퍼도 이런 생각에 동조했다.
그는 암살 음모에 가입하는 것을 구차스럽게 정당화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단 그 죄를 다른 사람과 다음 세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주로 해외연락 책임을 맡았다.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등을 다니며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1943년 4월 6일 본회퍼와 그의 매형 도나니가 체포되었다.
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은 아니지만 조사 도중 도나니가 14명의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켜 준 것이 드러나고, 이어서 그의 사무실을 뒤지다가 본회퍼의 국외활동과 반나치 단체의 암살 음모에 관련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옥중에서 형장의 이슬로 최후
본회퍼는 재판을 기다리며 테겔 군용 감방에 18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거기 있으면서 저작활동을 계속했다.
그에게 호의적인 간수의 도움으로 그가 쓴 것을 그의 친구 에베르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 등에게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후에 『옥중서간』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1944년 7월 20일 본회퍼가 속해 있던 반나치 단체의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 음모와 관련된 문서들이 발각되면서 본회퍼의 관련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1945년 2월본회퍼는 그 동안 지내던 테겔에서 떠나 몇 군데 중범자 감옥을 거쳐 플로센버그에 있는 수용소로 옮겨졌다.
1945년 4월 8일 증인도, 재판기록도, 변호인도 없이 사형선고가 내리고, 4월 9일 새벽 교수형으로 39년 2개월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들어오기 3주전, 나치 독일이 무너지기 한 달 전이었다.
그의 형과 두 매형들도 얼마 뒤 다른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의사가 한 말이다.
“나는 본회퍼 목사가 바닥에 꿇어 앉아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에 더할 수 없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너무나도 경건한 모습으로 하느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사형장에서 그는 다시 짧게 기도하고 교수대 계단을 올랐다.
당당하고 침착하였다.
몇초 후 그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의 50년 가까이 의사로 일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이처럼 전적으로 순복하면서 죽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