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에서 조선 건국부터 태종 시대까지는 '창업의 시대'라 부르고, 세종시대부터는 '수성의 시대'라고 부른다. 특히 세종조는 조선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과학이나 문화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다. 더구나 함흥 이남에 불과하던 영토를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까지 확대시키므로써 지금의 우리나라 영토를 확정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세종 대왕은 수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3대 치적으로 구분했다. 첫번째 치적이 바로 4군 6진을 통한 영토 확장과 왜구 정벌, 두번째 치적이 집현전을 통한 문화 창달, 훈민정음, 세번째가 장영실, 이천등 과학자를 등용한 활자나 측우기, 앙부일귀등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를 하면서, 병권은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따라서 군권은 태종에게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 정벌은 세종이 아니라, 상왕이었던 태종의 구상이었다.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왜구 침략은 그야말로 절정을 이루던 시대였다. 고려 멸망 중 하나가 왜구들의 기승이라는 점을 들때, 왜구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위화도 회군의 명분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1388년에는 박위를 중심으로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기도 했다.
조선 초에도 왜구가 극성을 부려서, 태조때는 문하우정승 김사형을 시켜, 대마도 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1418년 기해년에 왜구가 또다시 비인과 해주를 공격해 왔다. 이에 상왕이었던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다. 이때의 기록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대마도는 전에 신라에 속했던 땅인데 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 세종 기해년 5월에 왜선 30여 척이 비인ㆍ해주 등지에 노략질하러 왔었다. 임금께서는 이틈을 타서 무찌르시려고 영의정 유정현을 도통사로, 최윤덕을 도절제사로 명하시고, 몸소 한강까지 납시어 전송하셨다. 그리고 경상ㆍ전라ㆍ충청도 등지의 병선 327척에 17,000명을 내어 65일치의 양식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대마도의 두지포에 다다랐다. 적들은 모두 도망갔으므로 적선 129척을 빼앗고, 적의 소굴 2,000 군데를 불태우고, 적의 우두머리 200여 명을 목베었다. 이 전역(戰役)은 5월 스무하루에 출정하고 6월 열이레에 닿을 올려서 7월 초사흘에 돌아왔다. … 이로써 조종(祖宗) 때의 병력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
윗 기록에서 보다시피, 대마도 정벌은 (음)6월 13일에 시작되어, 7월 3일날 끝났다. 그렇다면, 한달도 채 못되어 끝난 것이었다. 아무리 대마도가 조그만 섬이라고 하지만, 한달 가량의 정벌로 가지고는 왜구를 정벌하기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음력 6월 1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하순정도이고, 음력 7월 3월이면, 8월 중순 정도이다. 일본은 그때 태풍이 한창 밀려올때였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러 갔을때, 태풍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아, 결국 일본 정복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때의 밀려온 태풍을 신풍이라 부르고, 태평양 전쟁때 자살특공대를 신풍, 즉 가마가제로 불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조선 정벌군는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배가 태풍에 의해 피해입어서, 돌아가지 못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더구나 패배한 왜군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이상 머물러야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대마도주가 항복을 청해오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던 조선 정벌군은 이에 응하고, 회군하게 된다.
하지만, 왜군의 뿌리를 완벽하게 소탕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를 소탕해야 한다고 논의가 되었다.
이를 강력히 주장하던 인물은 바로 박은이었다. 하지만, 우의정 의원은 "예기가 쇠하고, 선박의 장비가 파손되었으며, 날씨가 나빠져, 정벌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옳은 말이라, 태종이 박은에게 말하니, 박은은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면서,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결론이 나지 않는 판국에 결정적으로 정벌이 재차 추진되는 것이 중지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정박중이던 선박이 태풍을 만나 침몰한 것이었다.
대마도 정벌로 인하여, 백성의 피해는 심각했다. 한창 농사철이던 음력 6월에 정벌을 추진했으니, 농사를 제때 짓지 못하여, 흉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염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조정에서는 정벌군으로 참전한 사람에게 염전을 받지 않도록 명을 내렸다.
백성은 전쟁에서 승리해도, 패배해도 피해보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조선 역사에서 거의 드문 정벌의 역사중 하나인 대마도 정벌, 그 뒤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눈물이 숨겨져있는 것이다.
대마도 정벌이 태종의 구상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태종의 업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흔히 세종의 치세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태종의 업적이라고 봐야 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 정벌 과정에서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지시를 내린 사람은 이 당시 병권을 쥐고 있던 상왕 태종이며, 이것은 그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할 때 발표한 교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병권이 없었던 세종은 단지 태종의 명을 받아 병조와 각 군에 태종의 명령을 전달하고 장수들을 위무하는 2인자 역할에 그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