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발명진흥제도의 도입 우리나라 발명진흥제도의 시원은 1882년 지석영이라는 28세의 젊은 유생의 상소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종두를 시행해 수많은 생명을 천연두로부터 구한 것으로도 유명한 지석영은 수신사 일행으로 직접 일본에 가 선진문물을 체감했다. 이때 산업 발전이 국가부강의 원천임을 깨닫고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 지석영은 이 상소문에서 나라가 발전하고 부강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하나의 원(院)을 설치해 새로운 서적을 구입하고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기기들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해 과학기술 교육을 받게 하고 이들 가운데 재능이 있어 기계를 만들거나 발명하는 자에게는 전매 특허권을 주도록 하며, 서적을 저작 간행한 자에게는 출판권을 주도록 해 과학기술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실행방안까지 제시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공업소유권제도의 주창이었다. 특히 이 상소는 특허제도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정책적으로 육성해 나가야 한다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고종은 이 상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를 의정부에 내려 즉시 반포 · 시행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지석영의 상소로 건의된 특허제도는 실제로 실행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고, 국가가 주체적으로 정책을 펼칠 만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지석영의 상소가 비단 실행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씨앗뿌림은 우리나라 특허제도가 발아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졌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새로운 관제가 발표되면서 8개 아문(衙門) 중 하나인 농상아문(農商衙門) 아래 장려국(獎勵局)이 설치됐다. 이 장려국의 분장업무에 ‘식산(殖産)의 장려 흥업 및 전매특허의 사무를 관장한다’고 돼 있었는데, 이는 특허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과 산업 발전이 미흡해 그 실행은 이뤄지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특허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1908년 8월 12일 일본에 의해 ‘한국 특허령’등이 칙령 196호로 공포 · 시행되면서부터였다. 이에 따라 1908년 통감부에 특허국이 설치됐는데, 당시 조선위수사령부(현재 중부세무서 자리)에 설치된 특허국은 이름뿐이고 실제 특허사무는 일본 오사카에 있던 부청에서 취급했다. 특허국은 구한국 정부기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통감부의 직속 기관이었다. 일제가 특허기구를 서둘렀던 것은 일본의 공산품을 보호하고 외국의 특허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장악하려던 속셈에서였다. 한편 1908년 처음으로 특허제도가 실시된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취득한 발명특허 1호는 정인호의 말총모자(등록번호 제133호)였다. 이즈음 신학문의 유입과 더불어 발명을 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십중팔구는 공상적인 것이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았다. 무한동력을 연구하다가 패가망신을 했는가 하면, 알 값 20전이 없어서 아내의 치마를 팔아서까지 실험을 하다가 불이 나 타죽은 일도 있었다. 특허제도는 1910년 한일병합 후 칙령 335호로 폐지됐지만 한일병합조약에도 국호 변경 다음으로 특허국의 폐지를 삽입하고 있어 일제가 얼마나 공업소유권을 중시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발명단체의 발족과 활동 가. 발명학회 경성공전 요업과 1회 졸업생인 김용관은 우리나라 발명운동의 선구자였다. 졸업하자마자 일본인이 경영하던 도자기회사에 다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초기 요업 전문가였던 그가 발명운동에 발을 디딘 것은 1923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가장 먼저 설립된 발명특허단체인 발명학회 설립에 나선 것이다. 조선인에게 제조공업에 대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성부 인사동에 사무실을 두고 1923년 6월 1일 발명학회 설립허가를 당국에 신청했으나 자산부족으로 각하되고 말았다. 그 뒤 1년여 동안 진전이 없다가 이듬해인 1924년 8월 3일 경성부 장사동 동양염직주식회사에서 설립준비위를 개최했다. 이어 그해 10월 1일 경성부 장사동에 있던 동양염직공장 사무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발명장려단체인 발명학회를 설립했다. 공업계의 젊은 엘리트들이 주머닛돈을 털어 발명학회를 창립한 것은 3 · 1운동 이후 발명으로 자활해보자는 민족운동의 하나였다. 발명학회는 조선인으로서 과학기술 내지는 산업기술을 진흥시키겠다는 사명감이 강했다. 발명학회는 최초 규약을 통해 ‘회원의 공업적 지식의 보급과 발명적 정신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했다. 학회의 사업은 과학적 발명과 공업의 장려를 목적으로 잡지 및 도서 발행, 공예 강의록의 발행, 공업에 관한 질의에 응답, 강연회와 강습회 개최, 품평회 개최 등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처럼 ‘조선인의 발명을 고취시키고 진작시키자’라는 원대한 포부 아래 발명학회가 출범했지만 재정난으로 활동은 지지부진했다. 발명학회는 1933년 6월 10일 기관지 <과학조선>을 창간해 1940년까지 발간했으며, 1934년에는 과학지식보급회를 설립했다.<과학조선>은 발명과 과학에 관한 내용을 게재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과학정신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했다. 이와 더불어 전 사회적으로 과학지식 열기를 고취하고자 보다 광범위하고 대대적인 과학 보급과 발명 장려를 위해 1934년 2월 ‘과학데이 실행회’를 조직한 데 이어 4월 19일을 ‘과학데이(과학주간)’로 정했다. 이 밖에도 발명학회는 과학 및 공업에 관한 도서의 출판, 판매, 공업공장의 설계, 공업·원료의 감정, 공업품 제조 및 판매, 광업권의 출원 및 이전 등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같은 달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나. 조선발명협회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은 모든 분야에서 일제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과학기술을 촉진해야 할 발명장려활동도 자주적으로 펼치기 어려웠다. 일본 기업들이 대거 조선에 진출해 경제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민족기업들은 명맥을 이어 가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주도로 1924년 7월 9일 총독부에 조선발명협회 인가를 신청하면서 조선발명협회가 설립됐다. 총독부는 조선발명협회에 대한 보조금을 창립 이듬해인 1925년부터 일부 지원했다. 따라서 조선발명협회의 창립은 조선인에 의해 자체적인 의지보다는 일제가 조선의 발명특허를 장악하고 일본인의 발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고 할 수 있다. 조선발명협회는 1926년 10월 신발명품전람회를 개최했다. 조선 내 각 소·중등학교 학생의 고안으로 제작된 작품과 현상모집을 통해 조선과 일본에서 등록된 신안품을 수집해 전시했다. 조선발명협회는 또 특허, 실용신안의 공보연락 등을 시행했다. 이와 함께 기계 · 화학 · 전기등의 각 전문기사에 의한 발명고안의 시험과 연구를 수행했다. 일본발명협회에도 가입해 조선발명협회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도쿄에 송부해 그곳에서 연구하도록 했다. 협회는 회원으로 유지하고 월 50전 정도의 회비를 받았다. 발명 전문가와 변호사를 자문위원으로 두기도 했다. 조선발명협회는 일본발명협회, 제국발명협회 등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조선발명품장려전람회 등을 개최하는 등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전까지 활동했다.
다. 고려발명협회 일본인 주도의 조선발명협회에 반해 조선의 발명가를 육성하고자 1928년 12월21일 고려발명협회가 창립됐다. 오화영 등은 조선의 과학보급과 발명장려를 위해 조선인 주도의 발명 민간단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오화영, 명제세, 유광렬, 이준열, 박길룡, 주이회, 백홍균, 정수일, 김용관 등 20명의 발기인은 1928년 12월 7일 경성부 경운동 조선물산장려회관에서 고려발명협회 발기인회를 열었다. 오화영의 사회 아래 회의를 진행해 준비된 규약을 제정하고 창립준비위원을 선임했다. 1928년 12월 21일에는 조선일보사 2층에서 고려발명협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는 개회사, 취지 설명, 경과 보고, 축사와 축전축문 낭독을 하고 규약을 통과시켰다. 이어 장두현, 명제세, 김종협, 양정식, 박천병, 정세권, 이인영, 유광렬, 문완석, 이준열, 박길룡, 유두찬, 주이회, 백홍균, 이용규, 이종태, 정수일, 김용관, 강찬격 등 이사 19인을 선임했다. 사무실은 경성부 익선동 조선물산장려회 내에 마련했다. 조선인 발명가들과 지도급 인사들로 조직된 고려발명협회는 1929년 1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발명사상보급 대강연회를 시작으로 수시로 대중강연회를 개최, 일반의 과학적인 생활방식과 발명의 중요성을 고취했다. 특히 고려발명협회의 주요 간부들은 과학지식보급회에서도 활동하며 일제 강점 하에서 우리민족의 과학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1932년 12월 창립 4주년 기념식 이후 활동상황이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한편 1925년 4월에는 일본유학생들이 중심이 돼 도쿄에서 과학문명보급회가 탄생해 활동을 했으며, 1927년 5월에는 조선발명협회 탈퇴회원들이 발명장려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최초의 과학잡지 <과학조선> 발간 1910년부터 1934년까지 24년간 한국인이 획득한 공업소유권은 모두 17건밖에 되지 않았고, 공상적인 발명품이 많이 속출했다. 공상발명의 대표적인 것은 영구기관(무한동력) 문제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925년에 출원된 영구기관은 52건, 1926년에는 51건, 1927년에는 34건, 1928년에는 39건, 1930년에는 50건이 출원됐다. 이러한 때, 1924년 발족 이후 9년간 활성화되지 못했던 발명학회가 1933년 6월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송진우, 김성수, 이인, 여운형, 방응모, 박흥식, 김지태 등 뜻있는 이들의 후원을 얻어 2대 이사장에 이인을 추대하고 상무에 김희명을 선임, 공평동 119번지 중국호떡집 2층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재출발했다. 당시 200여 명의 회원을 뒀던 발명학회는 경리, 출판, 법리, 영업광무 등 5부서를 두고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법리부는 특허 수속을 대행했고, 학회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영업부를 따로 둬 해수욕복, 등산기구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특히 발명학회 출판부에서는 1933년 6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 <과학조선>을 창간했다. 편집겸 발행인은 이승학이었으며, 원고 대부분은 김용관이 집필했다. 27면의 소규모 잡지였지만 발간되자마자 매진돼 재판을 발행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창간호에서 김용관은 ‘과학조선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쟁을 찬양할 바는 아니나 과학의 영지에 있어서 임진란의 큰 수란은 조선 사람의 독창성과 발명력을 증명했다. 패전의 군사를 싸워내려 한 이순신은 거북선을 창조해 상대진중을 자유로 다니었다. 진수성 · 정평구의 비차는 비행기이 시초요, 변이갑의 화차는 탱크의 원조였다(중략)’고 한국인의 과학적 재능을 격찬했다. 또 ‘조선의 과학계는 적막하고 그의 생활화를 도모하는 발명계는 더욱 요요하다.(중략) 그러나 우리는 요사이 와서 종종의 좋은 소식을 듣는다. 평양 송찬용 씨의 빙상스키, 경성 김한경 씨의 혼로, 재령 황이선 씨의 공기총, 인천 최장남 씨의 자동차 제니기(중략) 등 발명은 기쁜 일이다. 과학조선이 바야흐로 발흥할 때가 아닌가’하고 과학과 발명에 힘쓰자고 강조했다. 또 창간호에는 발명학회의 초대 이사장이었던 박길용, 의학박사 윤치형의 창간을 축하하는 글과 ‘발명문명의 기초’, ‘특허제도의 남상’등을 게재했다. 이밖에 <과학조선>은 과학신문란을 만들어 해외 과학을 소개하고 문답란을 통해 과학상식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 주는 등 손색 없는 과학잡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정간을 거듭하다가 1935년 2월호부터 과학지식보급회의 기관지가 됐다. 발명학회는 <과학조선> 창간에 이어 1933년 9월 제1회 발명좌담회를 개최했다. 현상윤, 이종린, 김창제, 김종관, 이인 등 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반인에 대한 자연과학 상식 보급, 조선산업 발전의 추세와 발명장려 등을 논의했다. 그해 10월 26일에는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과학강연회를 개최했다. 과학과 인생(윤주복), 조선과 화학공업(안동혁), 신라문화의 감화(이효순), 조선인과 발명(문일평) 등 다양한 내용으로 열린 강연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한편 1933년 1월 송찬용, 윤주일, 최능진 등은 3.1재단법인을 조직하고 평양에 발명장려관을 건설하기로 했다. 발명연구실, 실험실, 과학도서관, 강당 등을 설치한 발명장려관을 마련해 조선의 발명가들이 아무 제약 없이 연구실험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해 2월 4일에는 어린 발명가들과 이들의 지도자들이 모여 ‘창조적 정신 향상에 힘쓰자’, ‘발명보급에 힘쓰자’등의 강령을 세우고 발명동우회를 창립했다. 조선발명학회 변호사 이인, 조선소년군 조철호, 배재고보 신봉조,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 등이 고문으로, 이병기가 대표로 취임했다.
과학데이의 제정 1932년 4월 19일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 사망 50주기 행사가 세계 각국에서 성대하게 열리자 조선의 과학인들이 여기서 힌트를 얻어 ‘과학데이’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윤치호, 김용관, 현상윤, 이인 등 조선의 과학인 37명의 실행위원은 ‘과학의 황무지인 조선을 과학화하자’는 모토를 내걸고 1934년 2월 28일 경성부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과학데이실행회를 결성했다. 실행회 의장에는 김창제(목사, 독립운동가), 서기는 강진두, 총무는 김용관이 선임돼 행사계획을 논의했다. 이들은 찰스 다윈이 숨진 날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기념회, 강연회, 견학단 활동 사진회와 과학지식보급좌담회 등 각종 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다. 과학데이 행사가 실행회에서 결정되자 그해 3월 5일자 동아일보는 ‘과학데이와 그 사업’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같은 날짜의 조선일보는 ‘과학과 조선’이라는 사설을 실었으며 조선중앙일보는 ‘문화를 통해 큰 도움’이라는 제목으로 “과학데이는 국민의 과학을 보급하는 데 큰 뜻이 있다”고 강조했다. 과학데이 행사는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뿐 아니라 언론인, 종교인, 문인할 것 없이 혼연일체가 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다. 실행회는 총무부, 재무부, 교섭부, 연락부 등 9개의 부서로 구성됐는데, 실행회 회원 가운데는 윤치호, 이인, 송진우, 여운형, 김성수, 김병로 등 당시 사회 유지들도 있었다. 행사에 드는 경비는 각자가 5원씩 부담하기로 했으나 인촌 김성수의 도움이 컸다.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는 포스터가 동아일보의 기증으로 경성시내에 나붙었고 김용관은 ‘과학지식보급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그해 4월 16일부터 3일간 연일 방송했다. 19일에는 김창제가 ‘과학이 가치’라는 제목으로 방송하면서 과학데이 행사는 장안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제1회 과학데이 기념식이 1934년 4월 19일 밤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되면서 우리나라 과학지식보급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어 열린 강연회에는 이정섭(언론인)의 과학의 개념, 변리사 이채호(초대 특허국장)의 산업과 발명, 안동혁(당시 중앙시험소 기사)의 화학공업의 현재와 장래 등 강연이 3시간에 걸쳐 계속됐다. 20일에는 남자 62명, 여자 53명으로 짜여진 견학단이 중앙시험소와 공장 등을 견학했다. 21일 밤 수송학교에서 열기로 돼 있던 과학에 관한 활동사진 관람은 집회를 금했던 일경의 압력으로 열지 못했다. 제1회 과학데이는 일반에게 과학을 인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저명인사들이 참가한 과학지식보급회가 결성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과학지식보급회가 1934년 7월 창립총회를 열고 과학지식 보급운동을 벌이기로 하면서 1935년 4월 19일의 제2회 과학데이는 더욱 성대하게 개최됐다. 부민관(옛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기념회가 열리기 직전 ‘과학데이’ 깃발을 앞세운 54대의 자동차가 경성 시내를 행진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경성뿐 아니라 과학지식보급회의 지부가 있었던 평양, 원산, 신천에서도 과학데이 행사가 열렸는데, 제2회 과학데이부터는 김억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과학의 노래’가 등장하기도 했다. <과학조선> 6월호의 기록을 보면 이 행사에 든 경비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약 890원이었으며 윤치호, 이인, 박길룡의 회사 외에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의연금과 상회, 약방, 광업사 등의 회사금으로 800여 원이 걷혔다. 1936년에도 제3회 과학데이를 맞아 전국에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일제가 과학데이를 핑계로 민족운동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1937년 과학데이 행사의 옥외 개최를 금지하고, 1938년에는 김용관 등을 투옥시켰다. 한편 1939년에는 제6회 과학데이를 맞아 용산 철도국공장과 영등포에 있는 기린맥주와 경성방직 등을 견학했다. 하지만 1940년에는 또다시 일제의 탄압으로 과학데이를 개최하지 못했다.
과학지식보급회 결성 1934년 과학데이 기념행사 일환으로 4월 22일 개최된 과학지식보급 좌담회에서 과학지식 보급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조선발명학회 이사와 경성에 소재해 있던 중 · 고등학교 교사를 중심으로 발기인들이 모여 1934년 9월 5일 경성부 공평동 태서관에서 과학지식보급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의장은 윤치호가 맡았으며 조만식, 여운형, 송진우, 이상협 등을 고문으로 추해했다. 주요한, 조동식, 이극로 등 지식인들도 대거 임원으로 참여했다. 김용관은 전무이사를 맡았다. 과학지식보급회는 경성뿐만 아니라 1934년 9월 22일 평양에서의 지회 창립총회와 1935년 2월 27일 황해도 신천에서의 지회창립총회를 비롯해 개성, 원산, 신의주로 확대됐다. 과학지식보급회는 창립 이후 1935년 제2회 과학데이 행사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과학지식 보급에 힘썼다. 1935년 2월 22일에는 백합원에서 과학발명회의를 개최했다. 또 조선발명학회가 발행하던 <과학조선>을 인계받아 기관지 성격으로 1940년 6월호까지 발간했다. 과학지식보급회는 강연회, 좌담회 등을 통해 이화학 교육을 일상생활에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주부, 아동에게까지 과학적인 이해와 실습을 하도록 했다. 학생에게는 자연과학연구회를 조직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발명 관련 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나라는 발명활동의 부흥기를 맞았다. 1934년 6월 2일 평양의 자연과학동우회와 발명학회가 공동으로 자연과학대강연회를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개최했으며, 발명학회는 1935년 3월 평양지회 사무소를 설치했다. 또 그해 6월 조선발명협회가 전조선발명가 포창식을 거행하기로 하자 최석환(쇄광기), 강동수(등사기용 잉크공급장치), 이덕균(진흑판), 김영배(보온기를 비한 열기난로), 김규병(화물운반구) 등 각지의 발명가들이 발명품을 잇달아 제출했다. 이듬해인 1938년 5월 발명특허출원 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35년 3월 발명장려부를 설치한 조선공업협회는 1937년 10월 19일부터 25일까지 상공장려관에서 발명전람회를 개최했다. 출품물은 대부분 일본에서 출품했으나 조선의 발명품도 일부 출품했다. 이어 대구상공회의소가 1937년 11월 6일부터 5일간 전조선발명전람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발명진흥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면서 발명활동도 활성화됐다. 1936년 1월부터 1937년 6월까지 특허와 실용신안으로 등록된 것만도 특허 41건, 실용신안 222건에 달했다. 출원인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라는 것은 괄목한 만한 일이었다.
일제시대 발명가들의 활동 발명학회, 과학지식보급회 등의 활약이 한창 두드러질 무렵인 1935년을 전후해 우리나라는 발명활동에 있어 많은 성과를 거뒀다. 1932년에는 안복평의 고량전분정제법 등 5건, 실용신안은 16건, 1933년에는 오영수의 간유가공법 등 2건과 14건이 등록됐다. 1934년에도 특허 2건 실용신안만 14건이 등록됐으며 1935년에는 예년보다 훨씬 많은 특허 11건, 실용신안 67건이 등록됐다. 이 시기에는 발명으로 가산을 탕진한 이들도 많았지만 발명품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손창식이었다. 관립동경고 공예 출신인 손창식은 17세 때 측량기 등 2~3종을 발명하는 등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발명을 통해 신문에서 ‘천채소년 발명왕’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발명인 ‘만년필IR'을 비롯해 문지기, 풍력 투완구, 야간사격장치 등 발명특허와 실용신안이 46가지에 이르렀다. '만년필IR은 이리듐을 펜 끝에 달아 촉을 닳지 않게 했던 것인데, 이 특허는 일본을 비롯해 구미에까지 수출되며 인기를 모았다. 손창식을 천재적인 발명으로 1927년에 동아일보 표창, 1931년에는 동경부지사 표창, 제국발명협회 표창을 받았고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광화정밀공장장으로 임명돼 정밀가공업으로 성공을 거뒀다. 또 이화여전과 중앙가정여숙(현 중앙여고), 광주의전(현 전남의대)에 거금을 희사할 정도로 발명을 통해 큰 재산을 모았다. 손창식과 같은 시대에 이성원은 고무접착제인 ‘만역호’를 발명해 기업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선호익은 송풍구(풀무)를 발명해 김천에서 성공을 거뒀다. 또 문용채는 인조피혁, 여과기 등을 발명해 기업을 경영했고, 이덕균은 등사판 잉크 공급장치를 발명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심승택은 1929년 18세 소년으로 수중동력기를 발명해 당시 신문의 사설로까지 취급되는 등 관심을 모았으며, 그가 발명한 전기신호장치는 특허등록이 되자마자 기업가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50원에 팔리기도 했다. 또 여류 발명가 이소담은 조선재단기를 발명해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 전규의 보온기, 김영배의 흑판닦이, 동경고사 출신인 송필수의 포키트용 사진구, 서병훈의 행시계전 장치(라디오의 청취시간을 맞춰놓는 장치) 등이 당시 주목을 끌었던 발명품이었다. 한편 최재념은 1935년에 고압기체발생기와 회전원동기를 발명했는데, 일본의 비행기 제작소와 중공업 업체에서 특허권 사용 교섭이 올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다. 특히 연전을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수학하던 송기주는 42개의 키를 가진 한글타이프라이터를 개발했는데 1933년에 언더우드 사에서 대량생산해 적지 않은 화제를 일으켰다. 한글타자기는 이보다 20년 전에 이원익이 85개의 키를 가진 것을 발명했는데, 송기주는 이것을 42개와 2개의 이동키를 갖춘 편리한 타자기로 개발했다. 이밖에 이광숙의 정미기와 한수경의 고려자기 제조에 관한 특허는 당시 과학자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1936년 신동아 1월호에 의하면 미국으로 건너간 권영호(응용화학 전공)는 비행기에 관한 연구로 국내 발명계의 관심을 모았다. 권영호는 1929년 ‘화이어리스’ 모터를 미국에서 개발해 무신기 제작에 성공했고, 2년 전인 1927년에는 직상직하 비행기(지금의 헬리콥터)를 발명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서 외면을 당해 햇빛을 보지 못하자 제작회사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제국발명협회의 한반도 침투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물적 · 인적 양 부문을 총동원하며 군수상 필요한 신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발명활동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발명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37년 6월 26일 일본 제국발명협회가 조선지부를 창립했다. 제국발명협회는 조선지부 창립 기념으로 그해 10월 11일부터 11일간 상공장려관에서 발명문화전람회를 개최했다. 제국발명협회 조선지부는 1938년 8월 발명상담소를 설치했으며, 9월에는 발명간담회를 개최했다. 이어 그해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공예품, 완구, 기타를 망라한 아동작품전람회를 개최했다. 조선과 일본 아동의 작품뿐 아니라 만주의 아동 작품도 전시됐으며, 기간 중에 조선 발명자 표창과 함께 강연회 및 좌담회를 개최했다. 1938년 10월 8일 제1회 발명장려금을 지급한 제국발명협회 조선지부는 그해 11월 20일 현상논문 ‘조선에 있어서의 발명의 진흥방안’을 모집해 54편의 응모작 중 1,2등 없이 3등을 최고상으로 선정했다. 한편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제국발명협회의 조선 기구를 강화하기로 하고 1939년 4월 1일 조선지부를 조선본부로 승격시켰다. 이어 경성지부를 비롯해 경남지부, 평양지부 등을 순차적으로 신설했다. 총독부는 제국발명협회의 보조금도 종래 2만 원에서 3만 5,000원으로 증액하기로 했다. 제국발명협회 조선본부는 조선발명장려전람회를 1939년 5월 18일부터 24일까지 발명장려관에서 개최했으며, 제2회 조선인 소 · 중학교 창안 현상모집을 실시하고 1939년 12월에 입상품 수여식을 가졌다. 한편 1938년 조선의 특허출원건수는 300건에 달해 1935년에 비해 85건 증가했으며, 등록건수는 1937년 20건에서 1938년에는 28건으로 증가했다.
대용품 개발 독려 만주사변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제는 외래품의 수입 금지, 국내품의 소비 제한 등으로 인해 발생한 물품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대용품 개발을 독려했다. 적은 생산비와 적은 노력으로 사용상 또는 외관상 종래 사용하던 물품과 차이가 없는 대용품을 만들어내 일반에게 쓰게 할 것인가가 당면한 문제였다. 이에 중소공업 진흥을 위해 1938년 8월 공업조합령을 공포했으며, 1939년 8월 공포해 9월 5일 실시된 총동원시험연구령의 측령을 1940년 1월 16일 조선에서도 실시하는 동시에 총독부령 제3호로 총동원연구령시행규칙을 발표했다. 이는 총동원법 제25조의 규정에 의해 총동원 물자의 생산 수리를 그 임무로 하는 자나 시험 연구기관에 대해 총동원 물자에 관한 사항, 기타 국가 총동원상 필요한 사항의 시험연구를 명하는 것이었다. 사설기관은 물론 공공기관에도 역시 총동원 물자의 생산에 관한 연구를 명령하는 동시에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총동원시설연구의 명령에는 시험연구의 항목, 방법, 규모, 주된 담당자, 기타 필요한 사항을 기재한 시험연구명령서를 교부해 실시했다. 따라서 시험연구의 명령을 받은 자는 그 시험 연구를 마쳤을 경우 연구성적을 총독에게 보고해야 하며, 시험연구에 관한 발명이나 고안에 대해 특허출원이나 실용신안의 등록출원을 한 경우 역시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출처 : 한국발명진흥회 40년사 |
첫댓글 WIVPriLGGQzcrFNLaLVxnApknnHGECxwWd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