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기행(虁行), 필명은 白石(원래는 白奭)
1935년 조선일보사에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 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아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는 한편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하는 등 북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35년 6월경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연히 박경련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박경련은 통영 출신의 이화고녀 학생이었으며 둘은 결혼에는 실패 했지만 첫사랑의 여인이었다.
그 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은 기생 진향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긔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이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 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백석은 진향에게 子夜란 호를 지어 주었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나 다름없었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시를 쓰는,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두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는 그들을 용납해 주지 않았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아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초례를 치르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여람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 만주로 떠나고 자야는 경성에 남았다. 자야는 백석이 또 태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때 자야가 살고 있는 청진동 집에 使童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 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 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백석은 학교 출근을 위해 함흥으로 떠났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을 펴냈다. 이동순 교수는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이동순 교수는 김영한(자야)으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김영한은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인 이동순 교수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 많은 지난나를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이동순 교수는 자야가 글 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의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자야)은 1995년 <내 사랑 백석>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동순 교수는 “백석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면서 “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출제되었다는 것은 ‘월북시인’에서 ‘재북시인’으로의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백석이 월북작가에서 재북작가로 정정되자 자야는 사재를 털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천억 원대의 대원각(성북구 성북동 소재)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를 세우게 하였다. 또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카이스트에 나머지 재산을 모두 희사하였다.
자야는 ‘수천억의 돈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했으며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1일이면 밥한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했는데 이는 백석에게 상을 차려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 했다. 한 여인의 지조와 사랑의 크기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 글은 내가 현재 재직중인 현대고교 교사를 역임한 심재방 시인이 저술한 '시인'이라는 책속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자야와 백석 그리고 길상사 - 대원각>
이곳은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다.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불명 吉詳華)이 죽기 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자리에 세워진
사찰인 길상사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吉詳華)에서 따서
길상사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김영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극락전이라 한다.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환 보살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대원각의 모든 것을 시주하려고 하였지만
무소유를 강조하며 실천하는
법정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번의 간곡한 요청으로 법정스님은
'길상사'라는 절을 세워 마음의 도량을 세운다.
김영환 보살은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향 기생으로 시작하여 어느 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인 백석(白石)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기나긴 사랑의 기다림을 가진다.
그녀는 명문가였던 백석 집안의 반대로
인연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져 있으며,
시인 백석을 내 사랑으로 간직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기린다.
하룻밤의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간직한 채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한지에 써서
편지와 함께 남기고 홀로 월북의 길을 떠나간다.
당나라 이태백의 중국의 변방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등장하는 '자야오가(子夜五歌)'라는
시에서 이름을 따 왔다는 자야(子夜)는
길상사라는 절을 열 때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받아든다.
백석과의 못다 한 사랑을 간직한 채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인 지금의 터에서
'첨암정'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한다.
수많은 정치인과 단골의 구애를 뿌리치고
첫사랑을 기다리며 다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다.
백석이 북으로 떠나면서
그와 이별한 그녀는
백석을 잊기 위해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고,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래서 폐암이 발병하고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이 운영하던 시가 1천억 원의 요정은
절에 무보시 시주하였다.
또한, 자신이 모았던 2억 원의 현금은
생전에 기리며던 백석 시인을 위하여
'백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창작과 비평>을 출간했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사랑의 그리움만 간직한 채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죽기 전날 그녀는 목욕 재계하고 절에 참배하고
하룻밤을 길상헌에서 자고 임종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84살의 적지도 많지도 않은 일생을 살다간
자야의 하룻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첫사랑으로 간직한 젊을 적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가진 것 없이 모든 것을 희사한 무보시를 한 기쁨으로
가볍게 이승을 훌훌 털고 생을 마감했으리라.
첫댓글 대원각에서 길상사 까지의 사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잘 보았습니다 ㄳㄳ합니다
적라라한 길상화 보살에 대한 고증입니다.게재해준 물길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귀한 글을 물길선생 덕분에 읽게 되었네요. 가슴이 찡하네요.
진향 [子夜] 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와 더블어 천억대 의 기부와 카이스트에 나머지 재산을
희사했다니 훌륭한 여장부 이네요.~~좋은 기사 아주 잘보았습니다
길상사의 사연은 귀하게 잘 보았습니다. 전 재산를 카이스트와 길상사에 희사한 진향[자야]와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 진것인가요?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것을 알게 되었군요.수고 했습니다.
좋은 자료 고마습니다. 복사하여 두고 보겠습니다.
요정 대원각에서 길상사로 바뀐 사연은 구전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물길님이 이런 자세한글을 올려줘서 이젠 확실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