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 창녕인물비사㉙>
고려 충신 직제학 성사제의 두문지의杜門之義
고려 말의 문신이며 충의지사 두문자 성사제杜門子成思齊(생몰연대 미상)는 두문동杜門洞 72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사제는 창녕현 조산리 출신으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봉선대부 흥위위 보승호군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정4품)이었던 고려말의 문신이다. 그는 이성계에 의해 1392년 고려 왕조가 망하자 새로운 왕조에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개성 외곽 산천에 은거 숨어 들었다. 그러자 태조가 불렀으나 불사이군이라 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은거지 그곳이 후일 만수산 두문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개풍開豊 광덕면 광덕산 골짜기였다.
두문동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겠다.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녕)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했다. 이어서,
“이제 나는 곧 죽게 될 것이니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 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 하는 말을 남겼다.
조선이 건국하자 고려를 섬기며 벼슬하던 관원들과 선비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고 하여 끝까지 고려에 대한 의롭게 지조를 지키기로 맹세하며 많은 지사들이 모든 명예와 영화를 버리고 심심산골로 숨어 들었다. 전국 곳곳에 옛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
개성 외곽 광덕산 골짜기로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숨어들면서 몸을 씻은 샘을 세신정洗身井이라 불리었으며, 그들이 머물던 곳을 두문동으로, 그들의 충의를 두문지의杜門之義라 하였다. 새 왕조에서 과거를 시행하며 이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출사하지 않았기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게 되었다. 심지어 조선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며 두문동에서 고사리만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여러 가지 구전口傳을 종합하면 72인이 마을에 들어와서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서 문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두문동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 새 나라를 세운 태조가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에서 친시親試를 열었는데 태학사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고개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리었다고 전해온다.
결국 회유를 못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주장에 따라 사람들이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러 마을을 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아 화염 속에서 다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사제도 두문동에서 순절하였다. 이들을 두문동 72현賢이라 하는데 성사제 외에 임선미·조의생·박문수·민안부·김충한·이의 등등 여러 사람이다.
두문동 72현의 순절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영조 1740년(영조 16)으로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 추모하기 위한 비석을 세워주면서이다. 그 뒤 정조 1783년(정조 7)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였다.
그 외 여러 고사가 전해오는데 고려 유장遺將 48인이 몸을 씻고서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한 골짜기란 곳에 세신정·회맹대會盟臺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또 태학생太學生(성균관 소속의 생원, 진사의 총칭) 69명이 분신자살했거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굶어 죽었다고도 한다. 또 두문동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궁녀동宮女洞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고려의 궁녀들이 의롭게 죽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벼슬아치, 선비 199명에 궁녀들을 합하면 200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외의 수는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두문동이 아닌 명산대천을 헤매다가 죽거나, 벼슬하지 않고 산림에 숨어 의義를 지켰던 사람이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인근 함안군 산인면으로 낙향한 성균관 진사 모은 이오李午가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고자 고려의 신하라 주장하며 마을을 고려 유민 거주지라면서 “고려동학”이라 하였다. 훗날 그가 살던 동리를 <절의지향節義之鄕 고려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오는 고려 유민의 거주지라 하며 마을 둘레에 담장을 쌓고 자급자족하니 고려동 바깥 땅인 조선에서 생산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조 계묘에 부조현에 표절사를 짓고 성사제 등 두문동 유현을 배향하였다.
성사제의 딸이 함안 사람 집현전 직제학 어변갑과 결혼해 아들을 낳으니 이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낸 어효첨魚孝瞻(1405, 태종 5~1475년)인데 외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제의 외아들 이름을 '두杜'라 부르니 곧 두문의 뜻이 담긴 자者란 뜻이라 한다.
1812년에 성사제의 후손들은 무덤이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창녕읍 조산리의 부인 성산 이씨 묘 좌측에 망제단望祭壇인 망송각望松閣을 세우고 춘추로 합향하였다. 망송각 아래쪽에 신도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최근 창녕 성씨 시조묘가 있는 대지면 왕미동 입구 대지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겼다. 신도비는 경남 문화재사료 제34호로 보존되고 있다.
고종 8년(1871)에 정절공貞節公으로 증·시호 되었다.
청백수절왈정淸白守節曰貞。호렴자극왈절好廉自克曰節。
청백하게 절조를 지킨 것이 정貞이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사욕을 버리는 것이 절節이다.
창녕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
<창녕신문> 2026년 7월 14일 연재분
첫댓글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가장 무서운 칼도 나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나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기르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웃음은 나에게 밝은 햇살이 되고
웃음이 나에게 흐르는 기쁨의 샘이 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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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번밖에 없다.
그리고 전생애에서 오늘 하루도 한 번 밖에 없다.
오늘 24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
시계가 가는 소리는 '상실, 상실, 상실'이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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