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4. 성황신과 무사귀신(無祀鬼神) 그리고 여제단(厲祭壇)
송은석(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2025년 10월 18일, 대구 북구 읍내동 ‘구수산(龜首山) 여제단’에서 고유제가 봉행됐다. 구수산 여제단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 여제단으로 국내에서 유일한 여제단이며, 여제단 복원 사례로서도 국내에서 유일하다. 흔히 ‘역병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잘못 알려진 여제단. 과연 여제단이 어떤 곳이며, 조선시대 이곳에서 행해진 여제라는 제사가 어떤 제사였는지 알아보자. 동시에 국내 최초 복원, 국내 유일의 구수산 여제단에서의 전통 여제 봉행이 갖는 현대적 의미도 함께 알아보자.
여제를 모시는 제단, 여제단(厲祭壇)
조선시대에는 전국 330여 모든 고을에 ‘3단(壇)1묘(廟)’를 설치했다. 3단은 토지신과 곡식신 제단인 ‘사직단(社稷壇)’, 고을 수호신인 성황신 제단 ‘성황단(城隍壇)’,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무사귀신 제단인 ‘여제단’이다. 1묘는 향교에 있는 공자 사당 ‘문묘(文廟)’다. ‘3단1묘’는 도성을 비롯한 전국 모든 고을에 반드시 설치해야 했던 국가공인 제사 공간이자 그 지역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런 만큼 고을 수령은 부임 초기 먼저 ‘3단1묘’를 찾아 살펴야 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는 수령의 주요한 책무였다. 이처럼 ‘3단1묘’를 설치하는 이유에 대해 『중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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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제사는 만물이 땅에서 살며 곡식을 먹기 때문이고, 문묘의 석전(釋奠)과 석채(釋菜)는 옛 성인과 성현이 백성들을 위해 가르침을 세웠기 때문이며, 성황단과 여단은 (고을을 지키는) 성황신에게 발고(發告)하여 제사 없는 귀신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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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단은 사직단과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이는 여제단을 ‘영성단(靈星壇)’과 같게 하라는 조선시대 ‘단묘(壇廟)’ 규정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단묘는 대부분이 가운데 정사각형 제단이 있고, 제단 주위에 남북으로 조금 긴 직사각 형태의 낮은 담장인 유(壝)가 있으며, 유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는 각각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불쌍한 혼령 ‘무사귀신(無祀鬼神)’을 위로하는 제사, 여제(厲祭)
무사귀신은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사람신’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무사귀신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세상에 남아 있으면, 산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이러한 무사귀신을 위로하는 제사가 바로 여제다. 여제는 중국에서 유래됐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여제는 명나라 초에 이르러 유교식 제사의 모습을 갖췄다. 이때 여제의 대상이 되는 무사귀신은 ‘12위’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조선 세종 때 기존 12위에 3위가 더해져 무사귀신이 모두 ‘15위’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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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칼에 맞아 죽은 자, ②맹수와 독충에 해를 당해 죽은 자, ③수화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④얼고 굶주려 죽은 자, ⑤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⑥전투에서 죽은 자, ⑦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⑧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 ⑨형화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자, ⑩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 ⑪천재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 ⑫죽은 뒤에 자식이 없는 자, ⑬난산으로 죽은 자, ⑭벼락 맞아 죽은 자, ⑮추락하여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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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행해진 수많은 국가공인 제사 중 여제는 좀 특별난 제사였다. 여제가 무사귀신을 막고 쫓아내는 제사가 아니라, 반대로 그들을 적극적으로 불러 위로하는 제사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백성뿐만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도 다 임금의 백성이니, 임금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는 여제에서 무사귀신에게 읽는 ‘제문(祭文)’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여제에서는 ‘축문’이 아닌 ‘제문’을 읽는다) 또한 도성에서 지내는 여제에서는 제문을 ‘제문’이라 하지 않고 임금이 내리는 ‘교서(敎書)’라 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제에서는 다른 제사에서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절차가 있다. 바로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란 절차다. ‘성황발고제’는 여제 3일 전 해당 고을 성황단에서 행하는 일종의 고유제(告由祭)다. 앞으로 3일 뒤 여제단에서 여제를 올릴 계획이니, 성황신이 여제의 대상이 되는 무사귀신 15위를 모두 여제단으로 불러 줄 것을 청하는 절차다. 이는 여제의 대상이 되는 무사귀신 15위가 모두 성황신의 통치하에 있다는 ‘성황사상’에 기인한다. 여제를 지낼 때 성황신과 무사귀신 15위의 위치도 흥미롭다. 성황신 위패는 여제단 위에 설치하고, 무사귀신 15위는 여제단 위가 아닌 여제단 아래에 설치했다.
여제 봉행 절차
여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황발고제’와 ‘여제’ 두 번의 제사로 이루어져 있다. 여제는 제사일이 정해져 있는 정기 제사로 매년 청명, 7월 보름, 10월 초하루에 지냈다. 두 제사의 봉행 절차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진설(陳設)→사배(四拜)→삼상향(三上香)→전작(奠爵)→독축(讀祝)→철변두(撤籩豆)→사배(四拜)→예필(禮畢)→망료(望瘞)
성황발고제의 핵심은 성황신에게 무사귀신 15위를 불러 줄 것을 청하는 ‘축문’을 읽는 행위다.
여제
○성황신(城隍神) : 사배(四拜)→삼상향(三上香)→초헌례(初獻禮)→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
○무사귀신(無祀鬼神) : 전잔(尊盞)→독축(讀祝)→철변두(撤邊豆)→사배(四拜)→분제문(焚祭文)→예필(禮畢)
여제에서는 ‘전폐례’(奠幣禮·신에게 폐백을 올리는 예)와 ‘음복례’(飮福禮·신으로부터 복주를 받는 예)가 없다. 전폐례와 음복례가 없는 이유는 첫째, 여제의 대상이 임금이 받들어 모셔야 하는 신령스런 신이 아니라는 점. 둘째, 여제가 신명(神明)에게 복을 바라는 제사가 아니라, 반대로 임금 혹은 임금을 대신한 고을수령이 여귀(厲鬼)를 위로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제는 혼령을 ‘떠받드는 제사’가 아니라 임금의 명으로 혼령에게 ‘위로의 잔치를 베푸는 제사’였다.
에필로그
현재도 여제(단)에 해당하는 문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전국 모든 시·군 단위에 설치되어 있는 충혼탑이 대표적이다. 우리 대구에 있는 두 번의 지하철 대참사 추모시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추모시설과 추모의식은 조선시대 ‘여제 문화’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여제는 종교나 미신이란 관점에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600년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소중한 전통문화로 바라봐야 한다. 여제는 지금이라도 누군가 계승하지 않으면 사라질 운명에 처한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다. 여제단으로서는 국내 최초 복원이자 국내 유일의 여제단이 우리 대구 북구 칠곡 구수산에 있다. 앞으로 이곳에서 고증에 충실한 전통 ‘여제’까지 행해진다면 아마도 구수산 여제단은 전국 유일의 ‘여제 문화’ 성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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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읍치의 여단은 혼령과 살아 있는 존재가 조우하고, 임금과 신료, 지방관과 지역 엘리트 및 고을 백성이 회합하는 장소이자, 중앙의 제도화한 의례가 민간신앙과 교차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읍치의 여제 의례와 여단의 장소성」, 전종한, 문화역사지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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