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0 : 1 - 5절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성탄절도 공휴일이고 석가탄신일도 공휴일입니다. 기독교나 불교가 국교가 아닌 나라에서 두 개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참 대단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49년 미군정 시대에 미국의 영향으로 성탄절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공휴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20여 년을 보내면서 불교계가 발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2여 년 정도 소송을 하고 법적 다툼을 벌이다가 1975년에 가서야 초파일도 공휴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이 우리나라에서는 공휴일이고 큰 의미가 있는 절기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은 성탄절을 공휴일로 보내고 있지를 않습니다. 극동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을 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지내고 있는데 기독교 인구가 20%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한 종교의 특별한 날이 이렇게 한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 안보다 교회 밖이 성탄절이 더 요란스러울 정도인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을 보다 더 쉽게 증거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다가 성탄절의 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국가 공휴일로만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성탄절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정확히 모른 채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에 같이 휩쓸려서 보내는 모습들이 있기 때문에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세상과 무엇이 다른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찾아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날이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날이 우리에게는 특별한 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며칠 전 영상 하나를 보니까 독일 여성 분이셨는데 결혼해서 부모님을 떠나 한국에 들어온 지 5년 정도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남편에서 어머니 한 번 보러 독일에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남편에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남편은 그 말을 듣기 전에 독일에 있는 장모님을 초청한 상태였고 불과 며칠 후 문밖에 서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놀라서 우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행복한 시간이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날이 바로 오늘인데 이 날을 기념하면서도 행복하지 않고 기쁘지 않다면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성탄절이 되면 흥청망청 보내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또는 목자들처럼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동방박사들처럼 먼 거리를 여행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의 마음 문 바로 앞까지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겠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서 문을 열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들어와 더불어 먹고 즐기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이었기 때문에 오늘 말씀과 같은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구원에 대한 호소가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 5절에도 “하나님이여 속히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2, 3절에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이유가 나와 있는데 대적들이 득세를 하고 조롱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4절 말씀인데 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윗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구원을 받기 원한다면 다윗의 이 고백을 주의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절 전반부에 보면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이런 표현이 있는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내려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또는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들처럼 먼 거리를 찾아 나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을 돌고 돌아 어렵고 힘들게 예수님을 만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온 시간과 거리에 비교하면 자신의 공로나 수고를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거리와 짧은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를 알고서 성경 전체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 말씀에도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보고 엄청나게 수고하고 고생해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에도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복을 얻고 구원을 얻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다 제공해 주시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복이고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 찾지 않아서, 구하지 않아서 이런 복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이겠습니까?
아이들이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귀찮도록 부모를 찾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즐거움을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셔서 반드시 구원해 주시고, 풍성한 은혜를 허락해 주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찾고, 권력을 찾고, 물질을 찾는 부질없는 영혼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어린 딸이 살며시 들어와서는 아빠 앞에 엉킬 대로 엉켜버린 실 뭉치를 놓고는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동안 매듭을 하나, 하나 풀어 나갔고 마침내 다 풀어서 딸아이를 불렀습니다. “아빠, 정말 고맙습니다.” 기쁘게 뛰어나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도 이처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역시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며, 건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으로 엉킨 실 뭉치를 더욱 엉키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얼마 전에 배달원과 음식을 시킨 사람의 전화통화 내용을 들어 봤는데 아파트 9층에 사는 사람이 배달 음식을 시켰습니다. 배달음식을 가지고 왔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있었던 겁니다. 배달하시는 분이 9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어려우니 중간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그런 것 하라고 배달요금 낸 것이라며 따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배달하시는 분은 그럼 그냥 배달음식을 반납하겠다고 하니까 신고를 하겠다며 옥신각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리 배달료를 지불했다고 해도 그 정도 수고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을 알면서도 배달을 시킨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너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예수님은 우리 문밖까지 찾아 오셨는데 그 문조차도 열어주지 않아서 주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도움과 건지심의 은혜를 못 누린다면 얼마나 답답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런 억울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주를 찾는 사람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냐면 그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구원의 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필요 없으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온전히 목격할 수는 참된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는 수 만 번, 수 천 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실제 보면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살고 있고 항상 동행하고 있지 않는 모습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도 위대한 일들을 행하여 보여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온 천하를 다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5절을 통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즐거움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을 반드시 행하여 주실 줄 믿으시고, 오늘부터 이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복을 다 받아서 넘치는 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다가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