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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칠과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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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에 굴복하자 영국은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남았다. 승리를 얻기 위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도움이 필요했던 처칠은 백악관으로 가서 목욕을 한 뒤 벌거벗은 채 루스벨트를 만났다.
“나는 숨길 것이 없소이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두 정치 지도자 사이에 있었던 협상과 교류, 치열했던 외교전에 대해 적고 있는 이 책의 원제는 ‘프랭클린과 윈스턴(Franklin and Winston)’이다.
저자인 존 미첨은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 29세의 나이로 미국 굴지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편집장에 오른 화제의 인물. 그가 지난해 발표한 이 책 또한 발간 후 몇 달 사이에 20만부가 팔려나간 화제의 책이다.
자유진영의 두 거두가 2차 대전을 두고 벌인 외교전을 다루면서도 저자는 두 사람의 성(姓) 대신 이름(名)을 제목으로 쓰고 있다.
‘두 사람이 어디서 회담을 가졌고, 무엇을 합의했으며, 어떤 군사작전을 벌였는가’라는, 이미 다 아는 공식적 기록보다는 두 사람이 왜 만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났으며, 그 만남을 통해 어떤 서로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인간적 교분을 쌓았는가 등 정치 외교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과 영국의 총리라는 신분보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윈스턴 처칠 두 사람의 인간적 면모가 만들어내는 전시 외교가의 풍경, 두 사람의 만남이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그 후 연합군의 승리에 끼친 영향 등을 분석한 것이 흥미롭다.
저자는 먼저 처칠과 루스벨트의 대조적인 성격부터 비교한다. 두 사람은 평상시라면 친구가 되기 어려운 대조적 성격과 성장배경을 갖고 있었다.
처칠은 불같이 화를 잘 내고, 감성적이며, 눈물을 보이는 데 인색하지 않은 솔직하고 호방한 인물이었던 반면 루스벨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2차 대전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화 통화와 서신교환, 대서양을 오가는 만남을 가졌다.
물론 그 만남은 정치적 상황이 만든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 후 그들이 전쟁 막바지까지 나눈 이른바 ‘우정 비슷한 교류’도 국익과 여론의 향배라는 계산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당연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성격은 그들의 외교 스타일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루스벨트는 계산적이었고, 처칠은 저돌적이었다. 처칠은 미국을 2차 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해 루스벨트를 ‘보스’라고 부르고 ‘대통령의 부관’이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루스벨트는 국민과의 노변정담에서 보여준 다정다감함을 처칠에게도 보여줬지만 유럽구출보다 국내여론을 더 중요시했다. 루스벨트는 참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국내의 반전 여론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술꾼 처칠’에 대한 신뢰도 그리 크지 않았다. 처칠이 영국의 총리가 됐을 때 루스벨트는 “처칠이 하루 중 반나절은 술에 취해 있지만, 그래도 그가 영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비꼬았다.
저자는 루스벨트가 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배경에는 독일이 향후 미국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국익적 판단과 함께 처칠의 ‘인간적 외교 스타일’이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 계산적인 루스벨트를 움직이기 위해 처칠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1941년 백악관을 방문한 처칠은 목욕을 끝내고 벌거벗은 채로 거실을 거닐고 있었다.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오던 루스벨트가 처칠의 알몸을 보고 “실례했다”며 다시 나가려 하자 처칠은 “보십시오, 대통령 각하. 저는 당신에게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로 루스벨트를 웃겨버렸다.
루스벨트에게 전쟁 지원을 요구하는 애절한 편지를 쓰고는 속이 뒤틀려 “저 못된 양키들에게 편지를 보내라”며 화도 냈다.
그러면서도 우방인 프랑스가 독일 점령하에 들어가자 영국 공군기로 프랑스의 군함들을 폭격하는 비장한 군사작전까지 감행함으로써 “미국만 도와주면 영국은 독일에 결사항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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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8월 처칠은 극비리에 대서양을 건너 루스벨트와 만났다. 처칠은 이 만남에서 루스벨트의 호감을 사기 위해 진력했다. 사진은 8월 10일 오전 영국군함 프린스오브웨일즈호 선상에서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예배를 드리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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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루스벨트와 미국의 참전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극비리에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던 처칠은 선상에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넬슨 제독으로 나오는 ‘해밀턴 부인’을 보다가 넬슨이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남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만큼 영국은 위기상황이었고, 처칠은 쉽게 참전하지 않는 미국 때문에 애가 탔다.
전쟁을 둘러싼 두 사람의 줄다리기 속에 감춰진 비화들도 재미있다. 1941년 8월 뉴펀들랜드의 극비 회동 사실을 아내에게까지 숨겼던 루스벨트가 정작 먼 친척인 데이지에게는 “미국 언론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스릴을 느끼게 한다”는 고백편지를 보냈다.
그 회담에서 소아마비였던 루스벨트는 대서양을 건너온 처칠을 서서 맞이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마침내 의자 대신 보조기구를 다리에 달고 서서 악수를 나누었다.
당시 건강이 악화됐던 처칠의 아내 클레멘타인은 회담장의 남편에게 “저는 마사지도 받고 있다”며 “당신이 집에 돌아오시면 다시 회춘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달라진 암고양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격려 편지’를 보냈다.
안하무인으로 부하들로부터 원성을 많이 샀던 처칠이 “사랑하는 윈스턴, 제가 보기에 당신의 그런 태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아내의 질책성 편지를 받은 뒤 면모를 일신, 그의 측근들이 평생을 ‘처칠의 사람’으로 남게 됐다는 얘기 또한 대정치가의 인간적 내면을 들춰보는 재미를 준다.
이 책의 매력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는 데 있어 두 정치 지도자가 국가를 위해 어떠한 인간적 고민과 선택을 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성격이 딴판인 두 사람이지만 독일과의 강화를 요구하는 자국 내 일부 목소리에 대해 단호한 거부의지를 표명하고 나치 응징을 선택한 것은 인상적이다.
신중하면서도 나치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줄 알았던 루스벨트의 리더십도 가슴에 와 닿지만, 지정학적으로 약소국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독일을 물리칠 힘을 얻기 위해 루스벨트에게 간이라도 꺼내 보일 것처럼 철저하게 접근해 간 처칠의 분투가 더 절실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