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부동산정책 이야기
편집과 글쓴이: 전준우(韓國不動産競賣硏究院 院長)
그 후 포항제철은 오년 만인 1978년12월8일 제3기 증설로 연산 550만 톤 규모를 갖추었다. 이어서 그의 후임자 전두환 대통렬이 취임할 무렵인 1981년2월18일엔 제4기 증설로 850만 톤 규모로 커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예언했던 대로 제5공화국 정부는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여 1990년대에는 연산 2000만 톤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차 국제시장에서 철강 산업이 호황산업으로 각광을 받을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일찍 예측하고 제철소부터 건설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더 잘사는 민족이 될 것이라는 것임을 예측한 것은 때는 1964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제철소를 세울만한 자금이 없었기에 1966년 12월에 이른바 KISA(대한 국제 제철 차관단)을 구성하여 미국에 달려가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에게 여러번 설득하였으나 IBRD가 미국의 수출입은행에게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내 놓았기 때문에 포이 회장으로서는 한국에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적합하다는 말만 할 뿐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의 전권을 위임받은 박태준의 청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박태준은 가난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철소가 필요하다고 역설을 했지만 포이 회장의 반대로 좌절이 되었고, 그 때 당시 일본정부와 교섭 중에 있었던 대일 청구권자금으로 포항제철설립자금으로 하자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로 가서 야하타제철소의 사장인 이나마야 요시히로와 후지제철소의 나가노 시게요에게서 포철의 건립과 기술이전약속을 받아냈고 1억불의 청구권자금은 반드시 농업발전용으로만 쓰이도록 돼 있었던 조건부자금의 전용을 끈질긴 설득의 성과로 마침내 아이치 외무장관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1억달러를 재정차관으로 제공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고 발표하도록 한다. 그러자 오오히라 통산성장관이 농업자립화자금으로 조건부자금이기 때문에 비료공장,농기계공장부터 세워야 한다는 반대 이론으로 진통을 겪게 되면서 당시의 정부를 대표하는 박태준 등은 "제철소건설의 목표는 국가안보이고 한국은 여전히 전시상태이기 때문에 안보를 고려할 때 제철소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한국이 공산화 되면 일본도 좋지 않을 것이다."라는 논리로 그를 설득하자, 김 학렬 부총리에게 보고하자 김 부총리는 구두로는 안 돼고 문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박태준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3대 철강회사의 협조각서를 받아온다.
< 울산시 태화강의 개발 전의 모습>
1969년 8월 26일, 도쿄에서 열린 제 3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일본측은 포철건립에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일본 철강연맹과 상의한 후 자세히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이에 김학렬은 단상에 올라가 그 각서를 들어 보이며 "여기 3대 일본 철강사들의 협조 각서가 있다. 이것은 한국의 100만 톤 규모의 제철소가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라고 일본 각료들을 추궁했고 더 이상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일본의 각료들은 마침내 포철 건립을 지원한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공장을 설리할 공장용지인 부동산과 자금을 확보했으나 일본의 기술이전을 위해 일본의 철강회사를 설득해 기술이전을 요청했고, 마침내 신일본제철이 기술이전을 하기로 결정이 났고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 4월 1일 착공식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은 "선조들의 피의 댓가이다. 이돈으로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제1고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왔고, 포철은 설비가동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흑자를 기록한다. 첫해에 242억 원의 흑자를 기록한 이래 포철은 2004년까지 단 한해도 예외 없이 흑자를 기록했었다. 1973년 이래 설비와 자산규모는125배로 성장하고, 매출액은 287배로 성장하고. 순이익은 239배로 성장했다. 당시 103만톤의 조강능력은 2003년에는 2800만 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이 이루어낸 영일만의 기적이요 부동산 개발의 신화를 이루어 낸 것으로 외국 원조로 국가를 운영하던 나라에서 1970년대에 비로서 국민 기업의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되고도 35배나 GNP가 껑충 뛰는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 포항제철의 이야기: 포스코 사이트 참조>
필자도 포항종합제철에서 포스코가 된 이후 그 곳에서 강의를 했던 사람으로 남다른 감회가 있는 기업이다. 포스코는 2000년 10월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전량 팔아버림으로써 민영화되었고 그 주식의 대부분을 외국인이 사들여 현재 외국인 지분은 66%에 달하고 있다는 볼멘 이야기와 대일청구권(금원)으로 세운 이회사의 원 주주는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본 우리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사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세간의 논객들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어볼 일이나, 세상의 일이 어디 모두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그리 얼마나 있는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갈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여기서 다만 포항종합제철공장이 개설 된 것은 포항의 모래밭만을 일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업불모지를 일구게 된 것이었고, 우리나라 수도권 축과 국토의 남단 부산 축을 연결하여 있게 한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21세기 우리나라가 환태평양시대를 열수 있는 유라시아의 입지한국을 구축하게 된 개기에 대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오게 한 것이 포항개발에 따른 입지요건의 변화가 그 주축을 이루게 된 점이다.
국가적으로는 가난이라는 만성적인 빈곤을 퇴치하기 위함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철강산업을 통해 세계 여러 국가에게 한국을 알리게 되어 국제적 입지도 높아지게 된 것이다. 6.25전쟁의 참화로 사람들의 인심이 이반되었고 자유당의 실정에 이은 4.19학생의거와 민주당의 연이은 실정은 국민들로 하여금 희망을 찾지 못하던 시점에 상상도 못했던 철강산업에 대한 프로젝트는 남해안이라고 하는 어떤 특정지역에 대한 부동산 개발정책 입안에 따른 실행만이 아닌 우리국민 모두가 “잘 살 수 있겠다.”라고 하는 희망과 꿈을 심어준 사실상의 부동산 개발정책에 해당 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포항지역을 필두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던 부산지역 경제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부활이 되면서 엄청난 입지변화로 양산과 김해와 마산지역과 창원지역을 아우르는 대단위 경제권역을 형성하면서 주변지역의 입지변화를 시키게 된다. 특히 태화강 주변과 울산항을 중심으로 울산석유화학단지 울산현대자동차공장과 용연공업단지 등으로 구성된 울산지역, 울산에 이은 조선산업의 번창으로 거제지역으로 까지 입지변화가 찾아왔고 대구와 구미를 거처 대전에 이르게 되는 내륙개발의 시발점이 되었고, 또한 창원과 진해 등 남해를 통해 호남의 순천 여수 및 광양지역의 전남 여천시 삼일동, 광양만 연안의 여천공업단지를 중심으로 한 공업지구의 입지를 구성하게 된다. 포항으로부터 출발하여 1976년에 단지를 조성한 뒤, 여수화력(50만 kW) ·호남화력(60만 kW) 등 대규모 화력발전소가 건설되고, 순천 이사천 용수로가 개통되어 1일 30만 t의 공업용수 공급이 이루어짐으로써 호남정유공장이 세워지고, 대규모의 관련 공장들이 들어섰던 것은 산업한국의 크나큰 변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남해안권역 일대의 부동산 개발에 따른 국격(國格) 변화를 가져다 준 대 역사요 부동산 개발사업 이었던 것이다.
1977년에는 여천배후도시 건설이 착공되어 대단위 중화학기지로 발전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포항종합제철공장은 넓게 보면 여천지역으로 이어지는 남해안 산업벨트를 형성하게 되는 전 국토(부동산)에 대한 새로운 입지를 구성하게 되는 개기기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특정지역의 국토개발 등 부동산 개발사업은 개발지인 그곳에 효과가 머물지 않고 주변지역에 또는 전국토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는 현상으로 그러한 것이 부동산의 입지조건 변화에 따른 것이다.
즉 특정지역의 경영조건이 좋아지면 뱃길이 트이기 때문에 항구가 활발하게 되어 상권이 살아나고, 수많은 산업생산품을 운반하기 위한 유통시스템의 하나로 육로를 뚫기 위해 길이 생기게 됨으로 일자리가 창출되어 노동생산성이 증가되고, 하늘길이 열려 공항이 바빠지면 수출이 늘어 는 경제구조가 개선이 되면서 경기가 순환되고 살아나면서 생상성이 향상되고 경제구조의 개선으로 경기가 부양되어 소득이 증가하게 되면서 가난을 탈피하게 되는 것임으로 부동산은 생산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하여 입지요건이 발생하여 그 가치가 상승하게 됨으로 국가ㆍ사회적으로 자산가치가 상승된다. 이러한 현상을 거의 경제고과서 처럼 보여준 곳이 부산지역의 경제상황이였고 그 중심에는 포항종합제철이 있었다.<계속>(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