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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8경 청간정, 과장이 심했다
나그네에게 단골집이 있다는 것은 얼핏 모순일 수 있다.
정처 없는 길손에게 정처가 있다면 길손이라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그네에게 단골이 없다는 것은 결과일 뿐 숙명은 아니다.
떠돌기 때문에 갖지 못할 뿐 무소유 처럼 없어야 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집을 일부러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으므로 가는 집을 단골로 정의한다.
시각과 감각에 익숙하니까 편하고 안정감을 갖게 되며 단골은 그래서 좋다.
속초의 해수피아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다 해도 풍기팀과의 한계령 도킹 예정시간은 10시다.
그 사이의 황금시간을 무위로 보낼 수는 없기에 청간정 가는 첫 버스(05:35)에 올랐다.
청간정에서 동해의 일출을 감상하고 속초시계까지 진출한 후 한계령으로 가려고.
일출시의 날씨가 썩 좋지 않아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동해상으로 떠오르는 해와
함께 나그네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고셩(高城)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三日浦)랄 차자가니,
- 고성은 저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
단셔(丹書)난 완연(宛然)하되 사션(四仙)은 어대 가니.
- ("영랑의 무리 남석으로 떠나가다"는) 붉은 글씨는 바위에 뚜렷한데,
사선(영랑, 남랑, 술랑, 안상)은 어디로 갔는가 -
예 사흘 머믄 후의 어대가 또 머믈고.
- 여기에서 사흘동안 머문 후에 어디 가서 또 머물었던가 -
션유담(仙遊潭) 영낭호(永郞湖) 거긔나 가 잇난가.
- 선유담, 영랑호 거기에나 가 있었던가 -
쳥간뎡(淸澗亭) 만경대(萬景臺) 몃 고대 안돗던고.
- 청간정, 만경대 등 몇 곳에 앉아 놀았던가 -
세 글자가 들어있을 뿐인데 도유형문화재제32호, 관동8경과 고성8경의 하나인 청간정.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1607~1689)·이 썼다는 현판은 사라졌고 우남(雩南/이승만)의
현판과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옛누정 위 과연 관동의 빼어난 경치로다.(嶽海相調
古樓上果是關東秀逸景)" 당시(庚申/1980년) 대통령 최규하의 글이 걸려 있다.
5. 18광주민중항쟁의 와중에도 청간정을 찾아 글을 남기다니....
택당은 간성현감 때 방문했던가 청간정 시를 남겼다.(택당집5권)
天敎滄海無潮汐(천교창해무조석) 창해에 밀물 썰물 없음은 하늘의 뜻이렸다
亭似方舟在渚涯(정사방주재저애) 방주 닮은 정자 하나 물가에 있네
紅旭欲昇先射牗(홍욱욕승선사유) 아침 해 불끈 솟기 전에 노을이 창에 뻗치고
碧波纔動已吹衣(벽파재동기취의) 푸른 물결 미동에도 옷자락이 나부끼네
童男樓艓遭風引(동남루접조풍인) 사내아이 배 순풍을 탄다 해도
王母蟠桃着子遲(왕모반도착자지) 왕모의 반도(不老不死의 복숭아)는 지체되는 것 같다
怊悵仙蹤不可接(초창선종불가접) 선인의 자취 밟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倚闌空望白鷗飛(의란공망백구비) 난간에 기대어 백구 날으는 하늘만 바라보네.
운석외사(耘石外史)에 실렸다는 다른 청간정기(記)도 있다.
이조 후기의 문신 운석 홍경모(冠巖洪敬謨/1774~1851)도 다녀갔나.
내로라 하는 시인묵객 모두 거쳐 갔을 청간정.
관동별곡의 선유담은 공현진리에서 언급했거니와 청간정과 함께 만경대도 있었다.
만경대뿐 아니라 만경루도 있었단다.
한데, 지금은 단애에 자리잡고 있지만 1928년 이전에는 저 아래 해변, 군부대 안에 있었
으며 그곳에는 만경대와 만경루도 함께 있었다는 것.
1928년 일제강점기 때에 토성면장(金溶集)의 발의로 현 위치에 옮기게 되었다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천학정과 겨룰만한 위치지만 예전의 자리는 별로 였다는 뜻이다.
그런 위치였는데도 다녀간 모두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띄운 까닭이 무엇일까.
백두산, 금강산을 비롯해 많은 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는 특수층이었다.
소위 풍류를 안다는 상류 사람들인데 과장이 심했다.
이즈음에는 아무나 해외 드나들기를 이웃집 마실가듯 해서 시들해졌지만 해외여행이
용이하지 않았던 때는 하나같이 외국 자랑에 몰입하는 관광사대주의자들이었다.
예전의 8도를 유람하던 시인묵객들처럼.
설악산 등산과 탈북예술단 공연 관람
고산자의 대동지지에는 청간창(倉)과 청간역이 있었는데 확인하기를 포기하고 간밤에
군부대 때문에 차단되었던 청간리 해변을 돌아본 후 남하를 이어갔다.
군부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지역이다.
천진천 하구를 군 순찰용 구름다리를 이용하여 건넜다.
민간인에게 허용된 다리가 아닌 듯 한데 늙은이를 어쩌랴 하고 막무가내로.
지뢰 공포가 없으므로 때로는 길을 만들며 갔다.
토성면 소재지인 천진리(天津).
건진리(乾津里)로 불렀던 마을이 천진으로 바뀐 내력이 있단다.
잦은 천재지변에 시달리던 마을민들은 재해의 까닭을 마를'건(乾)'자 탓이라 하여 하늘
'천(天)'으로 바꿨다는 것.
방풍조림사업을 하는 등 자구 노력으로 발전된 반어반농 마을이란다.
해안길은 지방어항 천진항과 천진해수욕장, 마을을 지나 봉포리(鳳浦)까지 순조롭다.
해변의 광포(廣浦)와 산너머 봉현(鳳峴) 두 마을이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때 합쳐
지면서 봉포가 되었다는, 지방어항 봉포항 마을이다.
월남 피난민도시 속초와 인접하기 때문인지 면 인구의 10%가 넘는 마을주민 대부분이
월남 피난민이란다.
봉포해수욕장과 어항 이후 켄싱턴리조트 설악비치로 가는 해안(봉포해변길)을 따르면
켄싱텅비치(하일라해수욕장)를 지나고 리조트 앞에서는 7번국도로 나와야 한다.
리조트가 해안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용촌리(龍村)의 7번국도와 중앙로(속초 ~ 고성)가 이합하는 용촌삼거리를 지나 용촌천
(용촌교)을 건너면 곧 고성과 속초의 경계다.
속초시의 해양경찰충혼탑 앞에서 중지하고 설악산 한계령으로 갔다.
"흘림골 - 등선대 - 십이폭포 - 주전골"의 짧은 남설악이지만 가을의 설악을 만끽했다.
특히 4번의 백두대간 종주에서 유일하게 외로움을 타게 했던 구간이다.
공교롭게도 만물상 바위지대를 늘 비를 맞으며 혼자 통과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이름대로 갖가지 형태의 바위, 흠뻑 젖은 위험한 바위들과 온몸으로 씨름했던 지역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고.
귀로에 잠시 졸게 된 사이, 차는 엉뚱하게도 주문진에 도착했다.
주문진항에서 뒤풀이를 한후에 헤어지는 것이 풍기팀의 계획이었음을 아둔한 늙은이가
간파하지 못했던 것.
우리는 덤으로 탈북예술인들이라는 '평양백두한라예술단'의 공연도 관람했다.
예전이라면 급조된 가설무대였으련만 시골읍의 대형실내체육관에 편히 앉아 있을 때는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웰빙 복지시대의 바람직한 발전이다.
이 무대는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던 옛 일을 불러왔으며 내게는 처음인 북쪽 연예인들의
공연이 이 밤에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공포의 생지옥, 동토(凍土), 아사(餓死)의 땅, 이름도 많은 북한땅을 용케도 탈출해 이런
형식으로라도 연예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예술단을 조직할 정도로 연예인들도 많이 탈출하고 있는가.
엄중한 감시라 하지만 보트피플(boat people) 방식이 아닌 육로 탈출도 용이한가.
탈출했다가 강제송환되었다는 뉴스보다 다시 들어가서 가족을 대동하고 왔다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직업적 탈출자 이야기가 더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다.
탈출을 가장해 간첩활동을 하다가 돌아갔거나 잡혔다는 이야기까지.
이중삼중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자유자재로 털기(hacking의북한어)를 해가는 시대에
간첩은 비효율적인 구시대의 잔재 아닌가.
탈북자에 대해서도 예전과 달리 비판적인 시선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선을 넘어와 자유의 땅에 정착해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매우 유감된 일이지만
상당수의 탈북자들이 경지를 일탈함으로서 초래하는 자업자득일 것이다.
동병상련의 안타까움이 있다면 탈출에 성공한 행운아로서 남겨진 동포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건만 남한의 못된 정치판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에게는 운명적인 멍에가 있다.
그들은 북쪽의 민초들에게 엄청난 빚을 진 자들이다.
자기네의 탈출로 인해 민초들에 대한 감시와 압박의 수위가 더욱 높아가기 때문이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진력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멍에다.
그럼에도, 동토의 해빙을 위한 고민은 커녕 북쪽을 자극하는 어줍은 짓만 하고 있다.
실은, 언로가 막힌 먹통 세계의 탈북자들 보다 경이로운 정보력을 가진 남쪽 시민들이
북쪽 사정을 더 많이 알고 있건만.
어부들간의 상호 불신에 미래 없는 어촌
속담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쓰일 데가 많은 말이다.
이왕에 주문진까지 왔으니 시외버스편으로 올라가지 않고 역(逆)으로 양양까지 걸어서
가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풍기팀과 헤어진 후 집을 지을 정자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정자를 보았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주문진 주민.
대형 실내체육관은 있건만 공원도 정자도 없다는 주문진 연안항.
저녁식사를 흡족히 한 후라 충분히 회복된 체력으로 혹시나 하고 밤의 해안을 북쪽으로
주문진해변 끝까지 갔으나 허사였다.
서해안의 영목항(태안군) 이후 처음이다.
영목에는 비닐하우스라도 있는데 여기는 그것마저 없으니 더욱 난처한 상황이었다.
경찰순찰차와 해안 백사장에 빠져 허우적대던 차의 구조요청으로 달려왔다는 보험회사
견인차의 증언도 정자가 없다는 것.
백사장을 옆에 두고 왜 고민하느냐는 경찰관.
그를 이해시킬 겨를 없이 임무 마치고 돌아가는 견인차의 호의를 받아야 했다.
밤이 깊어가는 시간이기 때문이었으며 주문진항으로 회귀해 비가 내릴 경우 피할 처마
가까운 해변 길가의 데크에 집을 세웠다.
지금은 휴전선의 한참 아래지만 38선에 인접한 주문진.
강릉지역 청정 동해의 최대 어항이며 백두대간 오대산에 접해 있고 상당한 들을 가지고
있는 농.어.산 삼촌(三村)으로 강릉시의 유일한 읍.
그러나 오징어, 명태 등 수산물이 풍성하다 하나 어항의 주류는 월남피난민이고 어항이
성할 수록 전국에서 모여드는 뜨내기들 때문에 토착민은 행세도 못한단다.
그래서 소속감이 희박하기 때문에 애향심을 기대할 수 없는 오합지졸 형국의 항구라는
것이 돌아오는 도중에 견인차의 운전자로부터 들은 놀라운 설명이다.
어항의 특징인 하루살이 인심에 더하여 고약하다고 그는 평했다.
세금으로 지은 대형 실내체육관은 있지만 작은 정자가 없는 이유란다.
주무진注文津)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고구려 지산현으로 시작해 명주의 속영 지산(신라), 연곡면(고려), 신리면(이조), 주문
진면과 주문진읍(일제), 명주군에 속했다가 강릉시로 이속 등 안정감이 없는 역사였다.
2만이 넘는 읍민 역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유동적인 인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니까.
탈북예술단도, 주문진항도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하게(상념에 잠기게) 하는 훼방꾼이다.
해안으로 나갔다.
불야성인 앞바다.
여러 척의 오징어잡이배가 쏟아내는 휘황한 불빛이 장관인데 저 배들이 귀환할 때 과연
개선장군 처럼 당당할 수 있을까.
밤새운 보람 없는 날이 잦아가고 있다잖은가.
고성의 어항들을 거쳐오면서 확인하였듯이 어장의 북상 이동은 어민의 힘으로 어찌 할
일이 아니지만 싹쓸이 남획으로 인한 어획량의 격감현상은 전적으로 자업자득이다.
불신으로 인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성어가 될 때까지 내가 기다리는 동안에 남이 다 잡아갈 것이라는 상호 불신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다퉈 치어까지 남획하는 것이며 미래가 절망적인 이유다.
가을밤의 바닷바람이 싸하건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집터가 지금껏 지어온 집 중에서 최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