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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의 유혹을 물리친 작은 섬의 농어촌
대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그가 깔아준 침실에서 맞은 새 아침(10월 18일).
내가 거쳐온 젠콘야도 중에서는 유일하게 내 취향이 아닌 침대형 침실인데도 짧은 시간이
나마 숙면에 들어서인가 어제보다 더 신선한 아침이었다.
(한평생 아파트와 침대는 나의 주거생활에서 기피 품목이다)
그가 준비한 아침 식사 후 느지막이 산넨안을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 '나마스테'(Namaste Guest House/ ナマステ ゲスト ハウス/鳴門市鳴門
町土佐泊浦大谷66-1)에서 1박(松田가 아침에 예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백팩을 메고.
나루토 해안을 산책하며 귀로의 첫 단추인 간사이공항 행 고속(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한
후 간밤에 세운 일정의 소화에 들어갔다.
마츠다가 고야산 다음으로 권한 곳은 나루토해협(大鳴門橋)의 소용돌이(滑潮, 滑卷)였다.
토쿠시마 현의 나루토 시 오게지마(德島県鳴門市大毛島)와 혼슈(本州)의 효고 현 미나미
아와지 시{兵庫県南あわじ市) 사이의 나루토해협을 연결하는 오나루토교 밑이다.
오게지마의 농어촌 탐방이 포함되어 기꺼이 수용했으므로 첫 목표지는 오게지마다.
나루토 시와 아와지시마 사이, 나루토시 북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나루토해협과 고나루토
해협(小鳴門)에 끼어 있는 섬으로 남북과 동서의 길이가 각기 약 6km와 2km쯤인 섬이다.
면적은 약 7.06평방km로 서울 여의도의 2.43배에 불과하나 도쿠시마 현의 섬들 중에서는
가장 넓은 섬이란다.
일본의 4대 섬 중 최대 섬 혼슈(本洲)와 최소의 섬 시코쿠(四國)를 잇는 루트(陸路)는 3곳
(2014년 현재)이다.
헨로를 걸어온 시코쿠를 기준으로 하면 이마바리 시(愛媛県今治市)와 오노미치 시(広島県
尾道市)를 잇는 니시세토자동차도. 통칭 시마나미 해도(西瀬戸/通称しまなみ海道).
사카이데 시(香川県坂出市)와 구라시키 시(岡山県倉敷市) 간의 다도해, 세토나이카이(瀬
戸內海)의 여러 섬을 이어가는 세토대교(瀬戸大橋).
나루토 시와 미나미아와지 시 사이의 나루토해협을 연결하는 오나루토교(大鳴門橋) 등.
오나루토교의 개통에 이어서 아와지시마(淡路島)의 북쪽 아카시해협(明石) 위에 아카시
해협대교가 현수교로 건설되었다.
아와지 시(兵庫県淡路市)와 혼슈의 코베 시 다루미구(兵庫県神戶市垂水区)를 잇는 다리다.
현수교로는 현재(2019년5월) 세계최장(3911m/중앙지간1991m), 최고(最高/주탑이해면상
298.3m)라는 다리.
오사카만(大阪湾), 하리마나다(播磨灘), 기이수도(紀伊水道) 등에 포위되어 있고 남서쪽은
나루토해협이, 북과 동남은 아카시와 기탄해협(紀淡)이 각기 시코쿠와 혼슈를 갈라놓았기
때문에 섬인 아와지시마에 오나루토교와 아카시해협대교가 남북단에 개설되었다.
이로서, '오게'와 '아와지' 등 두 섬은 혼슈와 시코구 사이 바다에 떠있으나 기능면에서는
이미 섬이 아니다.
각종 차량들이 육로인 코베아와지나루토자동차도로(神戶淡路鳴門自動車道/Exp. Way)위
를 거침 없이 질주하는데 섬이라 할 수 있는가.
오게지마 길, 육로는 고나루토해협 위에 놓인 코베아와지나루토자동차도로(E28)와 11번
현도를 각기 잇는 2개의 교량(小鳴門橋)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보행자 배려에 세심한 일본인들이 실수를 했나.
철저하게 차량 위주로 되어있다.
차량 만큼의 대우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20c 중반(1948년)의 인권선언과 다른 21c의 인권선언이라도 있어야 하는가.
그 때의 인권선언이 인간간의 평등권이었다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평등권이라야 할 판?
소규모 조선소와 정박중인 중. 소형 어선들, 어망 정비를 비롯해 다양한 작업들이 우리의
동해안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확연히 다른 점이라면, 시원하게 열려있는 우리 동해와 달리 바다를 넘볼 수 없도록 높고
무지스럽게 두꺼운 담장(방파제와 다른) 때문에 답답하기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
츠나미(해일/津浪)를 막겠다는 인간의 절규에 다름아니지만.
오게섬을 택한 이유는 특정지역의 관광보다 섬 주민들의 농사(田畓)와 영세어촌의 실태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많은 우여곡절 중에도 헨로는 마쳤으며, 헨로 외의 남은 마지막을 관광 아닌 농어촌 탐방
으로 맺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일본의 농촌도 기계 의존도가 높아 가히 선진화 되었다 하나 대규모 영농의 경우에 해당
하고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 되레 불편하거나 실익이 없는 소규모 농가도 적지 않다.
기계 사용료와 수동 인건비 간의 비용 차(差)를 소요 시간의 절감 효과로 메꿀 수 없다면
기계화는 의미 없으며 기계로는 삽시간의 일거리를 수동의 원시적 방법을 택하는 이유다.
내가 소규모 농사가 태반인 작은 섬 마을을 찾아가려 한 이유도 된다.
일본의 작은 어촌에 관심을 갖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강원도의 소규모 어촌과 깊은 인연을 유지하기 반평생인데 비슷한 규모의 일본어촌 역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어민들처럼 수공으로 처리한다.
어망을 깁고 건조하며 고기를 잡고 공판장을 통해 경매하는 방식 등.
까미노의 피니스떼레 길(Finisterre)과 뽀르뚜 길(Porto), 노르떼 길(Norte) 등의 어촌에서
도 동일한데 놀람을 넘어 충격을 받았는데.
지구의 동과 서, 양 끝이 상호 왕래할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에 전수하거나 공유할 방도가
전무한 시대였는데 동일한 방식이었으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지.
필요를 절감한 양 극단의 그 분야 종사자들이 개발했으며 그 방식이 동일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일 뿐"이었을까.
실은, 서양의 신 문물 수입에 총력을 기울이던 16c의 일본이 도입한 후 3면이 바다인 조선
반도의 수산물 시장에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일본을 개화하는 많은 문물을 제공했건만 믿기 싫지만 역전되었다.
일본이 수입한 서양의 것이 일본에 의해서 조선으로 들어온 것.
울돌목(鳴梁)과 나루토(鳴門)의 소용돌이
어촌 해안로가 북상하는 11번현도에 흡수되는 지점에 선 안내대의 글.
'당신의 힘으로 자연을 지키다'(あなたの力て自然を守ろる)
여백 없이 빽빽하던 선박들이 없고, 우직한 담장도 없고, 제법 넓은 폭의 백사장이 끝 없이
펼쳐지는 해변인데 사람들의 막중한 책임을 자극하는가.
그래선지, 줄곧 보아온 오물 투성이 해변과 달리 청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
후도손(不動尊과 안내대 북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서있는'세토나이카이국립공원나루토(瀬
戸内海國立公園 鳴門)' 안내석 지점(八木の鼻)에서 오나루토교가 지호지간처럼 다가왔다.
저 다리 아래에서는 가공스런 춤판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가.
맑고 상쾌한 가을 하늘 아래 검푸른 태평양이 잔잔하니.
완벽하게 해안로인 11번현도를 따라서 북상하다가 오나루토교 아래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눈에 집히는 지점까지 올라갔다.
험악한 춤을 추고 있는 험상의 극치가 진행중인 곳.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절통한 팽목항에서도 쓸모 없게 늙은 것만 확인하고, 귀로에 말로 할
수 없는 비감에 사로잡혀 울돌목(鳴梁) 다리(珍島大橋) 아래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칠흑의 밤에, 천막 속에서 요란한 굉음의 현장을 귀로 보며 잠못 이룬 밤이었다.
그 때, 먼동이 튼 이후에 내 눈에 담긴 소용돌이와 지금(2014년 10월 18일 정오쯤) 이 곳
(鳴門海峽)에서 전개되고 있는 그것이 일란성 쌍둥이라 할 만큼 닮았다.
울돌목과 나루토를 비교한 한 인터넷신문 칼럼 '명량(鳴梁)과 일본의 나루토(鳴門) 해협'
(2015년 2월 26일자 해남군민신문)을 발췌하여 올린다.
<우리나라에 명량(鳴梁)이 있다면 일본에는 나루토(鳴門)해협이 있다.
두 곳 모두 조류가 빠르기로 소문 난 곳이다.
‘울돌목’ 이라고도 불리는 명량은 길이 약 1.5km이며 폭이 가장 짧은 곳은 약 300m 정도가 된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가장 짧으면서도 좁은 수로라서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썰물 때는 서해에서
남해 방향으로, 밀물 때는 남해에서 서해 방향으로 조류가 매우 빠르게 흐른다.
사리 때의 유속이 약 11.5노트(시속 21km)로 동양 최대다.
이를 이용해 정유재란 당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했다.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 해서 울돌목이라 불린다.
일본의 다도해인 세토내해(瀨戶內海)의 나루토해협은 폭이 1340m로 밀물과 썰물 때 조류가 격
하게 소용돌이치는데, 이 때 굉음을 울려 나루토(우는 해협)라는 이름이 생겼다.
세계 3대 조류로 꼽히는 나루토의 소용돌이를 더욱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는 방법과
‘소용돌이의 길’ 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나루토해협에 위치한 다리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조수를 내려다 볼 수 있어서 토쿠시마 현을 대표
하는 관광시설이 되고 있다.
소용돌이의 길은 오나루토대교 밑으로 난 산책로를 말한다.
연장 약450m이고 높이는 약 45m에 달한다.
원래 이 다리는 2층 구조로 건설되었는데 하층 부분은 철도가 목적이었다.
그리고 1985년 6월 8일에 일본 최초로 2층 구조의 철도 도로 병용 대교로 개통됐다.
그런데, 오나루토대교 개통일로부터 불과 80일 후인 1985년 8월 27일에 아와지섬 북쪽 아카시(明
石)해협대교를 도로 단독다리로 건설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두 개의 해협을 다리를 경유해 혼슈와
시코쿠를 철도로 왕래한다고 하는 구상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오나루토대교의 철도 공간을 활용해 2000년 4월 오픈한 것이 바로 ‘소용돌이의 길’이다.
이 길 바닥에는 군데군데 강화 특수유리가 설치돼 있어 발 밑으로 소용돌이를 감상할 수 있다.
10cm도 안 되는 두께의 유리가 2톤 이상의 하중을 견딘다고 한다.
이러한 명량과 나루토는 그러나 모두 같은 뜻이다.
‘명량’이라는 한자어 자체가 고유어 ‘울돌목’ 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명(鳴)’은 ‘울 명’자이니 ‘울’과 연결되며, ‘량(梁)’은 ‘훈몽자회’ 등에 그 뜻과 음이 ‘돌
량’으로 나와 있으니 ‘돌’과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돌’은 옛 가야어로 ‘문(門)’을 의미하니, 결국 ‘(물이) 우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마지막의 ‘목’은 ‘골목, 길목’ 등의 그 ‘목’으로 ‘통로’라는 의미다.
삼국사기의 ‘가라어위문위량운(加羅語謂門爲梁云)’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해석하면 ‘가라(가야)어로 문을 량(돌)이라고 한다’ 인데, 즉 가야어에는 ‘문(門)’ 이라는 한자어에
해당하는 고유어 ‘돌’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두 해협 사이에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묘한 공통점이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
한사리(大潮) 때의 나루토해협의 유속은 10.6kn(노트/약20km/h)란다.
세계 3대 조류의 1로 빠르기가 세계에서 3번째가 된다는 해협.
격렬한 조수의 흐름이 폭포처럼 밀려드는 웅대한 해협의 거센 물살을 충분히 경험하였을
그들이 정유재란 때(1597년) 명량에서 치욕의 참패를 당했다.
해남군민신문은 "역사의 아이러니" 라고 했다.
과연, '아이러니'((irony)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사건인가.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이유가 그렇다 해도 사실(史實)은 정확하고 객관성에 근거해야 하는데 명량을 무수히 찾아
갔지만 내게는 여전히 '미스터리'(mystery)로 분류되고 있다.
대첩(大捷)인 것만은 의심할 여지 없지만 알려진 대로 명량의 소용돌이가 나루토 보다 더
거세며 이순신의 전략이 그들보다 한 수 위였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러나, 명량과 나루토는 우열을 가리기 지난할 만큼 서로 빼닮았다.
매사에 준비성이 치밀하며, 장기간에 걸쳐서 조선 침략을 준비해온 일본이 불과 5년 전인
임진 침공 때 이순신의 수군에 연전연패, 호되게 당한 전력을 잊었을 리 없다.
절치부심하며 모든 최악의 조건을 상정하여 훈련을 거듭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태다.
그의 수군은 이미 분해되었고 남은 배는 12척에 불과했다.
330 대 12의 전력(戰船)이라면 승패는 이미 명약관화한데도 바뀌었다.
아이러니 보다 미스터리가 더 어울리는 단어 아닌가.
어느 해에 명량 지근에서 만난 진도문화원 사무국장도 내게 동의하며 풀어야(바로잡아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명량해협은 폭 325m, 수심 20m에 유속 11.5노트의 급류 수역이다.
게다가 밀물과 썰물이 1일 4회 반복되며 2번의 정지 상태가 나타나는 곳이다.
왜군이 이 지리적 특수성을 몰랐으며, 이(특수성)를 그들의 패인으로 꼽고 있으나 속말로
그들이 핫바지인가.
이곳(명량)에서 지근인 어란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악조건을 모를 리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난형난제에 다름아닌 명량과 나루토.
명량에 대비해 나루토에서 적응훈련을 충분히 하고 왔을 그들이 폭이 300m남짓에 불과한
좁은 바다에 12척의 배와 싸우기 위해서 330척이라는 대규모 전선을 투입한다?
싸우기는 커녕 스스로 기동력을 마비시켜 자멸할 짓을?
격침했다는 133척의 적선 역시 의문 투성이다.
이순신의 12척 배는 밀려오는 거센 물살에 속수무책으로 숨어(대피해) 있지 않았던가.
(작전의 일환이었지만)
아무튼, 이 참패에 그들의 자자손손이 얼마나 치를 떨고 있는지 그들의 식민 통치시대에도
명량쪽(海南郡)을 피했을 정도다.
식민지 착취물들의 원활하고 효율적인 운송을 위해 도로(1번국도)를 개설할 때였다.
굴곡이 심한 극히 일부 구간 외에는 옛 해남대로(삼남대로)를 정비하였다.
그랬음에도, 영암에서는 해남 길을 버리고 강진으로 틀어버렸으니까.
해남의 우수영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길을 외면할 만한 다른 이유 없이.
한 밤을 보냈을 뿐 아니라 삼남대로 종주 때(고산자의 십대로 종주)를 비롯해서 울돌목을
다녀가기 2자리수나 되는데 굳이 나루토 소용돌이의 코앞까지 가야 하는가.
게다가, 남북이 6km 정도라 하지만 직선로를 의미하므로 해안로는 30%쯤 더해야 할 텐데
어촌에 바친 시간이 지나치게 많으므로서 농촌을 살펴볼 시간이 태부족하게 되었다.
시간의 안배에 실패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체없이 돌아섰다.
오게지마는 동서의 폭이 워낙 좁기 때문에 대규모 농지가 조성될 수 없는 섬이다.
주로 사토(沙土) 섬이라 농작물도 고구마와 락교(ラッキョウ/辣韮/염교),수박 등 제한되어
있는데 특히 락교가 주종인 듯.
기계 의존도가 미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인력이 필요한데 대개 고령의 여인들이다.
국내에서도 섬들의 특징 중 하나가 경제력 또는 주도권이 여인들에게 있다는 점인데 이곳
일본의 섬에서도 여인들의 파워풀(powerful)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여인들의 남편에 대한 순종도는 단연 으뜸이라는데도.
잎은 쪽파와, 알뿌리(열매)는 마늘과 매우 흡사하게 보이는 락교.
특히 초밥류에는 약방의 감초 격인, 일본인 기호식품이란다.
휴면성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온도에 어느 정도 이상 노출되어야 싹을 틔우며 이런 특성
으로 인해서 파종기간이(일본의 경우) 8월 중순 ~ 9월 중순이라고.
'토사세이난대규모공원'(高地県幡多郡黒潮町)을 통과할 때 가족 단위로 옹기종기 락교의
파종 현장을 살핀 적이 있는데(21번글참조) 바야흐로 잎줄기를 수확하는 시점인 듯.
나마스테 게스트하우스의 니시무라마코토
나마스테(Namaste Guest House/소규모 호스텔)에 가는 일만 남은 석양이 되었다.
'나마스테'는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사용하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란다.
주로 요가(Yoga)분야에서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 공히 사용하며 안녕하세요 외에도 "좋은
아침", "감사합니다" 등의 뜻을 가진 "친근하고 정감 있는 인도어"라고.
한데, 이 게스트하우스는 왜 이 단어를 차용하고 있는가.
그만큼 호감을 갖게 하는 집인가?
고나루토해협을 되건넜다.
나루토역 앞으로 리턴하여 나마스테에 전화했다.
일본 땅에서 내가 숙박을 위해 건 최초의, 유일한 전화였는데 "전화하면 차량이 나온다"는
마츠다(三念庵主)의 말대로 20분 이내에 검은 승용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픽업(pick up)하러 나온 사람은 니시무라마코토(西村真人/그의 명함).
나마스테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라는 그의 차에 올랐다.
1.5개월 이상의 일본 생활에서 최초와 마지막으로 탄 중형승용차.
그의 차가 다리 위를 달리는 동안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다리가 내가 아침나절에 건넜다가 조금 전에 되건너온 고나루토교임을 아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수분 후에 당도한 곳이 오게지마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락교밭 인근, 나루토초
(鳴門町)의 토사도마리우라 오타니(土佐泊浦大谷)였으니 기가 찰 일 아닌가.
어찌 이런 일이?
산넨안의 마츠다가 게스트하우스의 주소(位置)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 또한 그곳(나마스테 게스트하우스)의 위치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차가 픽업하러 온다는 말에 물을 필요 없도록 안심되었으며 더구나 위상(位相)이 '국제적'
이라는 하우스가 설마 작은 섬(大毛島)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두고 고나루토해협을 되건너 갔다가 다시 오는 해프닝 끝에 니시무라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집은 1.200km 헨로미치에서 자주 보아온 평범한(普通型) 농어촌 주택이다.
단체의 경우 합숙할 수 있도록 꾸며진 널다란 다다미방에 안내되었는데 헨로를 시작하는
아루키 헨로상이 이용할 집은 아니겠다.
마츠다처럼 니시무라가 직접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국제적'이라는 의미를 새겨봤다.
일본식과 서양식을 혼합한 메뉴에 영어가 통하는 집이라는 뜻일 거라고.
한데, 전담자의 고용은 재정적 부담이 따르므로 문제 될 수 있으나 아내를 두고도 식사와
관련된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하고 있는.것은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아내의 솜씨를 불신하기 때문일까 과도한 애처 탓일까.
마츠다보다 월등한 솜씨가 발휘된 식사를 마친 후 자그마한 휴게홀에서 오래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밤이 시작되었다.
첫 대면에서, 그의 이미지는 게스트하우스 운영과는 썩 매치(match)되지 않고 대중예술가
타입이라는 인상이었는데 프로(professional) 기죽일 만큼의 기타리스트(guitarist)다.
더하여, 기타 수집광인 듯 벽들은 각종 기타와 장식물로 채워져 있다.
이따금 동호 멤버들과 함께 이 홀에서 콘서트(concert)를 갖는다는 그.
이 밤에는 이름하여 "게스트를 위한 기타 독주회"(?)를 가졌는데 내가 유일한 게스트다.
그의 아내를 카운트하면 배로 늘며 복수가 되겠지만.
"1.200km를 걸어오신 오지이상(おじいさん)에게 위로와 축하를 드리는 것" 이라고는 하나
명분이 어떠하던 그의 심중에는 사과와 배상의 뜻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마스테의 숙박료는 저녁과 아침식사를 포함하여 1박 2.000y으로 나루토 지역의 게스트
하우스 중에서는 실비 중 실비다.
하지만 내일(2014년10월19일) 아침부터 장거리 여정이 있다는 이유로 아침식사의 생략뿐
아니라 새벽같이 퇴실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예약이었는데 내가 흔쾌히 동의한 것이다.
이 점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 그는 위로와 배상의 메시지를 실은 연주를 한 것이리라.
그래선지, 내 18번인 마이웨이(My way/request곡)를 비롯해 일본을 제외한 외국영화의
OST를 위주로 하는 등, 일본 분위기를 풍기지 않으려는 노력도 역력했다.
나루토에는 이 집 외에도 게스트 하우스는 물론 다른 류의 숙박시설들이 도처에 있다.
그런데도, 일본인을 상대하여 이처럼 일방적으로 내게 불리한 조건에 흔쾌히 동의한 내가
스스로 믿기지 않았다.
헨로를 걷는 중이었다면 통비닐 노숙을 할망정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분개했을 텐데.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라 남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너그러운 편이 아닌 내가,
내 도량이 태평양 바람을 쐬며 걷는 동안에 대해를 닮아졌나.
니시무라의 기타는 감미롭기도 하고 격정적일 때도 있는 그의 열정을 토해내느라 날이 밝
으면 시작될 장거리 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야까지 바빴다.
나도 그의 기타줄에 좌지우지 될 만큼 감동을 먹고 있었다.
오로지 나를 위한 연주라기 보다는 그의 아내가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밤샘으로 이어졌을
지도 모를 그의 천성적 음악성의 발로였을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