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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장군의 하향사에 대한 고찰
1. 서론
전국실전활쏘기 협회에서는 흑의장군배 전통 실전활쏘기 대회를 4회째 개최하고 있습니다.
흑의장군은 『부산진순절도』에 나오는 정발장군을 의미합니다.
정발장군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조혁상, 2014년)을 참고하였습니다.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많이 찾지 못했기에, 조혁상 교수님의 논문을 위주로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논문을 써주신 조혁상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참고자료 : 조혁상,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 동방한문학회, 2014년.
[초록]
忠壯公 鄭撥(1553~1592)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釜山鎭僉節制使로서 부산에 첫 상륙한 왜군의 맹공에 맞서 決死抗戰하였던 장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그의 전투 행적이 왜곡되고 폄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참전 왜장과 조선 토병들의 증언으로 의혹이 벗겨진 이후에는 그에 대한 追贈과 顯彰이 계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개전 초기의 첫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적군에게 패배를 당한 정발의 경우, 그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참전 왜장과 포로였던 조선군 토병의 증언으로 인해 정발의 용맹한 활약상이 규명된 이후에도, 그가 무신이었다는 이유 만으로 문신인 동래부사 송상현에 비해 추증과 현창이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미흡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점은 崇文賤武의 경향성이 조선시대에 분명하게 존재했었음을 드러내주는 증거가 된다.
정발에 대한 추증과 현창의 과정은, 호란 이후 북벌의식이 고조되면서 임진왜란 영웅들을 顯彰하려 한 당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송시열의 「묘갈명」을 통해 이러한 숭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비록 계속적인 추증과 숭앙의 과정에서 정발이 무신이었기에 문신출신인 송상현에 비해 다소 차별을 당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나, 추후 영조의 명령에 의해 정발과 송상현이 충렬사에 합사되면서, 결과적으로 존숭에 대한 文武差別이 없어지게 되었다.
세미나 '근사(近射) 사법 및 교육 방법'은 2017년도 8월에 부천 활박물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글의 작성 동기는 다음과 같은 치기 어린 질문에서 출발했었습니다.
근사를 할 때, 깍지를 고정하고 줌의 표를 옮길 것이냐?
아니면, 줌의 표를 고정하고 깍지의 위치를 옮길 것이냐?
『부산진순절도』에서 정발장군의 활쏘는 모습을 보면서,
상체를 숙여 표를 유지하는 비법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과정에서 느꼈던 의문점과 생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2. 충장공 정발장군에 대하여
1) 전투 행적의 폄하
정발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 첨절제사로서, 부산에 첫 상륙한 왜군의 맹공에 맞서 결사항전했던 조선의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부산진이 전몰되는 급박한 상황 등으로 인하여, 그의 전투 행적이 왜곡되고 폄하되기도 하였습니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 『선조실록 26권』 -
위 인용문과 같은 오해는 정보 부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산진의 병사와 백성들이 거의 전몰하였기 때문에, 전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산진 전투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하는 사료도 있고, 부정적 평가를 하는 사료도 있습니다.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제시하면서, 정발장군의 활약을 재조명합니다.
① 긍정적인 시각이 수록된 사료 : 국조보감, 국조인물고, 난중잡록, 약천집, 연경재전집
② 부정적 시각으로 비난한 자료 : 기재사초
③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이 혼재된 자료 : 재조번방지, 조선왕조실록
2) 정발장군의 명예 회복 과정
정발장군에 대한 의혹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인하여 풀리게 되었습니다.
① 부산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군장수 평조신(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증언
② 부산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있다가 풀려난 황가산 외 2명의 조선 토병의 증언
다음은 정발장군의 명예 회복 과정에 관하여 요약한 내용으로,『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에서 인용하였습니다.
① 1594년(선조 26) 병조판서에 추증.
② 1597년(선조 29) 통신사 황신이 왜장 평조신의 증언을 확보함.
③ 1603년(선조 36) 정발장군의 처 임씨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선조는 재조사를 명함.
④ 1651년(효종 2) 동래부사 윤문거가 송상헌의 사당을 중건하고, 정발장군을 함께 제향함.
⑤ 1681년(숙종 7)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
⑥ 1686년(숙종 12) 충장공 시호를 받음.
⑦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이 정발과 송상현 등 8인을 위한 충렬사 별사를 동래부성 내에 세움.
⑧ 1760년(영조 36) 홍명한이 변박에게 명하여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를 개모(改摹)함.
⑨ 1766년(영조 42) 부산첨사 이광국이 정공단(鄭公壇)을 설치.
⑩ 1942년 일제에도 계속되었던 제단을 폐쇄당함.
⑪ 1945년 11월 향사계(享祀稧)가 다시 조직됨.
⑫ 1977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 정발장군 동상을 건립.
<그림 1. 정발장군 동상>
3) 전투 행적의 재조명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발장군의 전투 행적을 재조명 합니다.
간략히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정발장군은 전쟁 징후에 대한 위기감을 몇 달 전부터 느낍니다.
임진년 3월에 부산 첨사(富山僉使) 정발(鄭撥)이 비보(飛報)했는데,
대마 도추(對馬島酋)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포구에 와 정박하여 첨사에게 투서한 속에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합니다.
소방에서는 이를 듣고 더욱 놀라고 분하여 그 글을 물리쳐 돌려보내고 변방에 신칙하여
이들을 변경에서 다 쫓아내게 하고 머물러 기다리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더니,
평의지는 부산포의 섬 절영도(絶影島)로 돌아가 배를 대었다가 며칠 만에 앙심을 품고 떠났다가
그후 4월 13일에 적이 이미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 11월 14일 -
② 4월 13일 봉화가 위급함을 알리자 함선 3척을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가 무수한 왜선의 출현을 목도합니다.
(정발장군이 사냥을 나갔다는 것은 토병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사료로 추정되며,
토병의 입장에서 '긴급 출동'과 부대 단위 전술 행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냥'을 구별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됨.)
③ 부산진으로 귀환하여 방어 태세를 지시합니다.
백성들도 성 안으로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④ 왜관의 왜인 4명을 포로로 확보합니다.
⑤ 진내에 있던 아군 함선 3척을 왜군이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침수시킵니다.
⑥ 방어태세를 갖춘 정발장군은 남문 성루에서 밤을 지샙니다.
⑦ 새벽 5시경 왜군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⑧ 진내에 비축한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무수한 왜군을 사살합니다.
(왜군의 기록에 의하면, 왜군 사망자는 100명 뿐.)
⑨ 화살이 떨어지자 비장 한 명이 도피할 것을 청하자 꾸짖었습니다.
(부산진은 해안 전초 기지의 역할을 했기에, 화살의 비축량이 적었을 것을 추정됨.
부산진 전투에서 사용된 화살만 수만 발로 추정됨.)
⑩ 정발장군이 유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⑪ 애첩 애향이 자결하고, 노복 용월도 순사합니다.
⑫ 11시경 부산진이 함락당하고, 조선 백성에 대한 무차별 참살이 시행되어 생존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 됩니다.
모두 용감했다.
고려인은 용감한 전사들이며 국왕에 대한 충성을 귀히 여기는 국민이기 때문에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고, 포로가 된 자는 소수였다.
격렬한 싸움이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성내에 있던 부녀자와 아이들도 무기를 나르고 돌을 던지며 싸움을 도왔다.
백발의 노인은 쓰러진 鼓手대신 북을 힘껏 두드렸다.
마지막에는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육탄전이 되었고, 정발장군도 총탄에 쓰러져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중에서 -
루이스 프로이스는 포르투갈의 선교사로서 왜에 갔었는데,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도 했었습니다.
4) 정발장군의 인품
다음 몇 가지 사항에서 정발장군의 인품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① 글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공은 정신과 풍채가 준수하고 단정하였는데, 항상 새벽 일찍 일어나서 글을 읽었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 한글 풀이 -
② 겸양의 미덕을 알았습니다.
공은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글자를 주옥같은 글씨(珥筆)로 받아썼는데,
아무리 어려운 글자(僻字)를 불러주더라도 그 글자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감탄하여 칭찬을 하였는데,
공은 감사의 인사를 하며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연히도 아는 글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공을 칭송하는 소리가 더욱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정발장군의 겸손한 성격은 그의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발장군 위로 큰 형(정탁, 1541 ~ ?)이 있었는데, 글을 즐겨 읽었지만 30대 후반에 가서야 사마시에 붙었습니다.
12살 위의 큰 형보다 잘난 동생으로써, 못난 형을 배려하는 마음을 숙지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③ 한시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그림 2. 정발장군의 유묵>
☞ <그림 2>의 출처 : 조혁상,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 동방한문학회, 2014년.
<그림 2. 정발장군의 유묵>은 구양수의 시 8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에서는 한시와 번역문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이러한 구양수의 한시를 정발이 유묵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16세기 말기 당시 정3품 堂上官인 折衝將軍의 품계를 받은 武臣의 교양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에,
조선의 무신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忠壯公 鄭撥에 대한 再考察』 -
8수의 시가 그려내는 전경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러나 변방으로 부임하며 길을 걷는 무인의 심정과 곁들이면, 제법 비장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8번째 싯구는 정발장군의 앞날을 예견하는 것만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誰道梅花早 매화 일찍 핀다고 누가 말하는가
殘年豈是春 섣달이 어찌 봄이더냐
何如艷風日 어쩌면 저리 요염한 풍광을 맞아
獨自占芳辰 홀로 꽃다운 때를 독점하였는가
慶州後人白雲鄭撥書 경주 후인 백운 정발 - 『和梅聖俞杏花 歐陽修 居士外集 卷56』-
정발장군의 호는 백운인데, 평소 정발장군은 흑색갑옷을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백과 흑의 서로 상반되는 기호에서, 문무를 겸비했던 장군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④ 정발장군은 부산진 첨사로 발령되기 전에도, 변방의 장수로서 활동했었습니다.
해남군수로 재직시에는 왜구의 토벌에 참여하였고, 외원군수로 재직시에는 여진족 토벌에 참여했습니다.
정발(鄭撥) 등이 쏘아 죽인 호인(胡人)들이 자피선(者皮船)을 타고
사경(四更)에 가을헌보(加乙軒堡) 건너편 야둔동구(也屯洞口)에 유숙하여 며칠 동안 지내었으니,
수상(水上)이나 수하(水下)에 반드시 그들이 지난 곳이 있을 것입니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7월 30일 -
⑤ 정발장군은 활을 잘 쏘았습니다.
공은 굳은 마음으로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으며,
성벽에 올라 활을 신들린 듯이 쏘았습니다.
왜적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곳이 세 군데나 되었는데,
왜적들이 놀라고 겁을 먹어 서로 경계하며 말했습니다.
“흑의장군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이것은 정발장군이 활을 잘 다루었다는 것을 서술합니다.
⑥ 정발장군은 효심이 깊었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가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절명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발장군 어머니의 아들 사랑이 극진했음을 반증합니다.
정발장군이 '충과 효, 두 가지 모두를 온전히 할 수 없음'을 탓하자,
그의 어머니는 '네가 충신이 되는데, 내가 어찌 유감스럽게 생각하겠느냐'고 하며 아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정발장군의 인품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정발장군의 어머니는 함열 남궁씨인데, 관찰사 남숙의 딸이기도 합니다.
정발장군의 아버지는 간성군수를 지낸 정명선(1517 ~ 1566)입니다.
정발장군 아버지의 몰년인 1566년이면, 정발의 나이가 14살이고 어머니는 40대 초중반이 됩니다.
40대 홀어머니와 14살 사춘기 소년이 서로에게 의지를 하며 쌓았을 정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둘째 아들의 효심에 공감이 갑니다.
⑦ 정발장군은 아들 정흔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공이 아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고향으로 빨리 돌아갈 것을 명하면서 말했습니다.
“사태가 시급하다.
네가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한다면,
아예 길을 떠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흔이 대답하였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급박한데,
저만 혼자 어찌 떠날 수 있겠습니까?”
공이 말했습니다.
“아비와 자식이 같이 죽는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느냐?
너는 집에 돌아가서 할머님과 어머님을 봉양하도록 하라.”
이에 정흔이 울면서, 부친과 함께 남겠다고 청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공은 아들을 꾸짖으며,
종자에게 명하여 아들을 말에 강제로 태웠습니다.
아들 정흔은 아버지를 두고 혼자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1일이 지나자, 왜적이 부산에 쳐들어왔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잃은 사람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은 사람은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정발장군도 14세에 아버지를 여위었기에 아버지를 그리워했을 것이고,
부정(父情)에 대한 갈망은 아들 정흔에 대한 사람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아들 정흔이 울면서 부친과 같이 남기를 청하는 모습에서,
정발장군 부자(父子)의 정이 깊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⑧ 정발장군의 아내인 임씨는 정발장군에 대한 폄하와 오해에 대하여 재조사할 것을 조정에 요청했었다고 합니다.
임씨는 당시의 부산진 전투 상황을 알 수 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남편의 인품에 대한 임씨의 믿음이 확고했음을 증명합니다.
공의 부인은 부사(府使) 자운(自雲)의 딸인데,
단정하고 정숙하여 식견과 도량이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에 영창대군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신종황제(명나라 만력제, 1563 ~ 1620년)가 붕어하자 여러 날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임진년에 조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느냐?”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위 인용문에서 풍천 임씨의 성품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인은 공이 돌아가신 기일이 되면,
매번 상복을 입고 공의 묘소에 올라 제향하였는데,
슬픔에 겨워 식음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이었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명나라 만력제가 붕어했던 1620년이면,
부인 임씨의 나이는 적어도 60대 후반이 됩니다.
부인 임씨는 무려 28년 동안이나,
매 해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상복을 입고 남편의 묘소를 찾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심정이 깊고도 깊었던 것 같습니다.
⑨ 정발장군이 전사를 하자 애첩인 애향은 소도로 자결을 하였고, 노복인 용월도 적진에 뛰어들어 순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발장군이 주위 사람들에게 덕망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⑩ 정발장군은 지방관 관직과 중앙관직을 두루 역임했기에, 백성들에게 제법 신망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음 표는 부산진 전투까지의 정발장군 경력 이력입니다.
<표 1. 정발장군 경력 이력>
5) 부산진 전투의 의의
평가하는 사람마다 부산진 전투의 의의는 다르겠지만,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① 왜군 장수 평조신은 부산진이 충분한 전장 저지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몇 년 후에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왜군 장수 평조신이,
통신사 황신에게 공의 충정과 효성에 대하여 진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임진년 부산진 전투에서, 나의 군대는 정발장군의 용맹함에 매우 압도되었었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② 조선의 후대에서도, 부산진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적절한 대응을 했던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거리에서 맞아 싸우고 첨사도 힘껏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첩은 패도로써 스스로 목을 찌르니 모든 왜적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때에 굳게 지킨 곳은 오직 이 성뿐이었다. - 신경(1613~1653) -
③ 1592년 4월 13일 정발장군의 출정은 올바른 군사적 행동이었습니다.
임진년 3월에 부산 첨사(富山僉使) 정발(鄭撥)이 비보(飛報)했는데,
대마 도추(對馬島酋)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포구에 와 정박하여 첨사에게 투서한 속에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합니다.
소방에서는 이를 듣고 더욱 놀라고 분하여 그 글을 물리쳐 돌려보내고 변방에 신칙하여
이들을 변경에서 다 쫓아내게 하고 머물러 기다리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더니,
평의지는 부산포의 섬 절영도(絶影島)로 돌아가 배를 대었다가 며칠 만에 앙심을 품고 떠났다가
그후 4월 13일에 적이 이미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 11월 14일 -
동래부성이 본진이었다면, 부산진은 전초기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변경에서 적절한 순찰 활동은 장수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초기지의 수장으로서 국가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정보를, 다른 군영의 수군에게 의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산진의 첨사로서 함선 3척을 이끌고 정찰 활동을 한 것은 적절하고 적합한 군사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한(恨)은 우리의 전통 정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합니다.
용맹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전투에 임하여 ,
죽음을 불사하는 것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라를 위하여 전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헌시를 쓰면서,
창졸지간에 그들의 모습이 뇌리에 스치는데,
허전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창자를 쑤시는 듯한 회한이 듭니다.
용맹스럽고 충직했던 정공은,
모든 사나이의 표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2만의 왜적이 성을 둘러쌓아 포위를 했는데,
고립된 성벽에 의지하여 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전투 초기에는 성을 지키려고 분투했지만,
전투 후반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전사하는 것으로 전투가 끝이 났습니다.
비축해 두었던 화살을 모두 소진하여 활을 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마음은 산이 무너지고 산맥이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우암 송시열이 부산진 전투의 패전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한 불가항력에 대한 안타까움을 한(恨)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부산진순절도』에서의 정발장군
다음의 그림은『부산진순절도』에서의 정발장군의 모습입니다.
<그림 3. 『부산진순절도』에서의 정발장군>
☞ <그림 3>의 출처 : KBS1 역사저널 그날, 『[임진왜란 4부작] 30화 2편 임진왜란 개전; 일본군 부산에 상륙하다』, http://www.kbs.co.kr/1tv/sisa/historyday/view/vod/2262661_105592.html
<그림 3>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자세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① 상체를 숙입니다.
② 발을 넓게 벌리는데, 깍지쪽 발이 앞으로 나옵니다.
③ 살대를 턱밑에 붙입니다.
그런데 화살촉에서 화살대를 연장하면, 오늬는 귓볼 아랫부분에 위치하게 됩니다.
④ 좌궁입니다.
⑤ 뒤에서 관전만 하는 군사들이 있습니다.
4. 정발장군의 활쏘기에 대한 고찰
1) 수성전에서의 활쏘기, 하향사
우리 민족의 전쟁사에서 활쏘기로 수성전을 하였고, 분발한 경우가 있습니다.
고구려 요동성 전투와 안시성 전투, 조선의 행주대첩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 성의 특징은 치(雉) 구조와 6합쌓기(맞물려쌓기) 입니다.
치(雉) 구조의 성벽은 6합쌓기(맞물려쌓기) 건축기법과 어울려 강력한 방어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활은 크기는 작지만 힘은 강력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하향사를 더욱 용이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향하여 정면으로 활을 쏘면, 하향사가 됩니다.
그런데 맞은편의 치를 지원하기 위하여 비스듬히 쏘는 것도, 결국은 하향사가 됩니다.
2) 상체를 숙임
<그림 3>에서 정발장군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활을 쏩니다.
『부산진순절도』나 『북관유적도첩』등의 다른 궁사들을 보면, 상체를 숙이고 아래로 활을 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안으로 표적을 보는 경우, 표적과 주안을 연결하는 직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직선을 '표적-주안라인'이라고 정의합니다.
하향사의 경우 상체를 숙이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습니다.
① 상체를 숙이고 쏘면, 줌이 표적-주안라인에 가깝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표적에 표를 맞추는 것을 용이하게 합니다.
② 상체를 숙이고 쏘면, 근사할 때의 표를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하향사를 할 때와 근사를 할 때의 표가 비슷해지는 것은, 실제 전투 상황에서 상당한 잇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③ 상체를 숙임으로써, 엄폐물에 몸을 감추는 효과도 발생합니다.
3) 다리를 벌리고 몸을 낮춤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경우,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다리를 벌려야 합니다.
다리를 벌리는 동작은 몸을 낮추는 효과도 발생시킵니다.
다리를 앞뒤로 벌리는데, 줌쪽 발과 깍지쪽 발 중 어느 것을 앞에 두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정답은 궁사가 편한 대로 한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마 궁술에서 배사를 하는 경우, 대부분 줌쪽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동작 : 깍지팔을 당겨 활을 만작시키려면, 상체를 깍지쪽 방향으로 상체를 회전을 한다.
두 번째 동작 : 배사를 하기 위하여 깍지쪽 방향으로 허리를 회전한다.
두 번째 허리 회전 동작은 첫 번째 상체 회전 동작의 효과를 감소시킬 수도 있다.
줌쪽 방향으로 허리를 회전을 하면, 다음과 같은 잇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몸을 줌쪽으로 돌리면, 주안(깍지쪽 눈)으로 정면의 시야를 확보하는데 용이할 수 있다.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줌쪽 발을 앞에 두면, 줌쪽으로 허리를 돌리는 동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랫고자가 줌쪽 무릎에 부딪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자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성벽에서 하향사를 하기 위하여 상체를 숙이는데,
다리를 벌려서 몸의 균형을 잡는다.
주안의 시야를 확보하고 허리 쪼임의 효과를 더하기 위하여,
줌쪽으로 허리를 회전하여 표적을 겨냥한다.
발시할 때는 몸을 숙여 앞으로 내민다.
깍지쪽 발을 앞으로 굽혀서 내밀고, 줌쪽 발을 뒤로 펴서 뺀다.
이러한 동작은 화살의 아랫고자가 무릎에 부딪치는 것을 예방한다.
화살을 장전할 때는 발자세를 유지하며, 몸의 중심을 뒷발(줌쪽 발)로 옮긴다.
줌쪽 발을 뒤로 굽혀서 접고, 깍지쪽 발은 앞으로 뻗어 둔다.
이러한 동작은 화살을 장전하거나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에, 궁수의 안전을 확보한다.
4) 주안과 왼쪽 방향 회전에 대한 선호 본능
회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① 북극성에서 보면, 지구는 왼쪽으로 자전합니다.
② 지구는 왼쪽 방향으로 진행하며 태양을 공전합니다.
③ 태양도 왼쪽으로 자전하며, 은하계를 왼쪽 방향으로 공전합니다.
④ 우리 은하계도 왼쪽 방향으로 자전합니다.
(북반부에서 바라본 안드로메다 성운은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자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관측 시점의 기준은 안드로메다 자전축의 남극을 기준으로 본 모습이 됩니다.
따라서 안드로메다 성운도 자전축의 북극을 기준으로 보면, 왼쪽 반시계방향으로 자전하는 모습이 됩니다.)
⑤ 우리 은하계가 속한 국부 은하군에서 대부분의 은하계는 왼쪽 방향으로 자전합니다.
⑥ 스포츠 경기나 발레, 피겨 등의 동작에서도 대부분 왼쪽 방향의 회전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남반구 남십자성을 기준으로 지구와 은하계의 회전을 보면,
① ~ ⑤번 까지의 상황이 시계방향(오른쪽 방향 회전)으로 변합니다.
☞ 참고사항 : 위키백과,「남반구」,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B%B0%98%EA%B5%AC
그래도 ⑥번 반시계 방향의 회전을 선호하는 인류의 성향은 남는데,
이것은 인류의 90% 이상이 지구 북반구에 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항에서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왼쪽 방향의 회전을 선호한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른손잡이와 우궁 궁사가 많은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항은 활쏘기에도 적용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 입니다.
깍지쪽 눈이 주안이라서 줌쪽 방향으로 회전을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니고,
왼쪽 방향 회전을 선호하는 본능 때문에, 오른쪽 눈이 주안이 되도록 진화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좌궁의 경우는 어떻게 왼쪽 방향 회전을 선호하는 본능을 적용할 것인가?
5) 살대의 위치
<그림 3>에서는 깍지의 위치와 살대의 높이가 서로 다릅니다.
활의 모양과 화살의 각도를 보면, 깍지는 귓볼 아래 근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림 3>에서 윗고자에서 시작된 시위가 얼굴을 지나면서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정발장군의 초상에 직선을 긋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덕정 한창수 접장님은 근사 사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표는 활의 줌부터 삼삼이 부분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적응해 나가고,
좀 더 숙달되면 탈피해 감각으로 쏘는 단계로 넘어간다
깍지 손은 귓볼 높이까지 높게 끌어,
눈에 가깝게 하고,
시선을 평행이 되게 한다.
살의 무게는 1냥(37g) ~ 2냥(74g)이 무난하다. - 「근사(近射) 사법 및 교육방법」 세미나 중에서 -
조선시대 전투용으로 사용되었던 장전의 무게는 1냥 5돈에서 1냥 6돈 정도 되었습니다.
장전은 한창수 접장님이 제시한 근사용 화살의 무게 범위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장전은 근사에 상당히 적합한 화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미나에서 한창수 접장님은 "30미터 이내의 표적은 쏘면, 쏘는 대로 맞춘다."라는 경험과 경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근사 사법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그림 3>의 깍지손 위치는 오류이다.
줌의 표를 유지하면서 근사 또는 하향사로 쏘기 위해서는, 깍지손의 위치가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발장군의 얼굴에 직선을 긋지 않기 위해 시위의 직선이 생략되었는데,
깍지손의 위치가 턱 밑에 있는 이유도 이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위와 같은 추정이 틀렸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깍지의 위치를 턱 밑 또는 턱 근처에 고정시킨다면,
근사 또는 하향사에서 줌통은 표적-주안라인 아래로 많이 내려갈 수밖에 없다.
6) 표적-주안라인과 살대-깍지라인의 조화
이 글에서는 '살대-깍지라인'을 '얼굴에 살대가 붙는 위치'와 '만작시 깍지의 위치'를 잇는 직선으로 정의합니다.
깍지의 위치는 활쏘기에서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깍지 위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추론해 봅니다.
① 표적-주안라인은 변동폭이 적은 편이다.
특히 표적의 위치와 궁사의 시선이 고정된 경우, 일정한 위치와 각도를 갖는다.
이것은 현재 국궁대회처럼 145미터 과녁을 서서 쏘는 경우,
표적-주안라인은 매 번 활을 쏠 때마다 변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화살의 비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은 화살의 속도와 각도이다.
최대 수평 도달 거리 s = 초기속도 v의 제곱 X sin(발사각도 X 2) / 중력가속도 g
최대 사거리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서, 풍향과 풍속, 온도와 습도와 같은 환경적인 요소가 있다.
화살대의 두께와 깃의 저항 등 장비의 영향도 있지만, 환경이 같은 상황에서는 화살의 속도와 각도가 화살의 비거리를 결정한다.
③ 만약 궁사가 매번 발시할 때마다 일정한 힘으로 할 수 있다면, 화살의 초기 속도 v는 일정한 값이 된다.
이 경우 화살의 비거리에 영향을 주는 가장 주요한 요소는 발사 각도이다.
따라서 화살의 비거리가 같다면, 화살의 발사 각도는 같다.
화살의 발사 각도가 같다면, 만작했을 때 화살대의 각도도 같을 것이다.
만약 궁사가 깍지의 위치를 자유로이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깍지의 위치가 어깨에 있거나 귓볼 밑에 있어도 화살대의 각도도 같을 것이다.
④ 화살대의 각도가 같다면, 줌통의 위치는 깍지의 위치에 따라 변한다.
즉 깍지를 어깨 견봉에 내려 붙이는 경우, 줌통은 표적-주안라인 아랫 부분에 위치한다.
깍지를 귓볼 밑에 올려 붙이는 경우, 줌통은 표적-주안라인 윗 부분에 위치한다.
⑤ 현대 제식 소총 사격에서 조준선 정렬을 중요하다.
표적-주안라인은 소총의 가늠자와 가늠쇠를 연결하는 선과 유사하며,
살대-깍지 라인은 소총 총렬을 연장하는 선과 유사하다.
주준선 정렬이 잘된 소총이 좋은 명중률을 보장하듯이,
표적-주안라인과 살대-깍지라인이 잘 조화되는 것도 좋은 시수를 보장할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살대-깍지라인은 중요하며,
살대-깍지라인에 영향을 주는 요인 중 하나는 깍지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공식은 포물선 발사체의 수평도달거리를 유도하는 과정입니다.
<포물선 발사체의 수평도달거리>
위 공식에서 sin2θ 의 값이 최대가 되는 각도 θ는 45˚ 입니다.
☞ 참고 사항 : 저자 가네코 마사히로 / 후쿠나카 데츠오, 역자 배영상 외 4인, 『바이오 메카닉스 : 신체운동의 과학적 기초』, E-PUBLIC, 2008년.
공식 유도 과정의 마지막 부분은 삼각함수의 덧셈정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공식을 인용한 블로그에서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기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sin(α +β) = sinα·cosβ + cosα·sinβ 인데, α와 β가 모두 θ인 경우에는 아래와 같이 됩니다.
sin(θ +θ) = sinθ·cosθ + cosθ·sinθ
∴ sin2θ = 2sinθ·cosθ
<포물선 발사체의 수평도달거리>의 공식에서 포물선 발사체의 수평도달거리를 정하는 것은,
발사속도와 발사각도 뿐입니다.
표적-주안라인과 살대-깍지라인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근사 또는 하향사에도 그 방법이 다양할 수도 있지만,
<그림 3>과 같이 상체를 숙여서 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가지 상황에서 표적-주안라인의 각도를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① 145미터 국궁 과녁 하단 보기 : 궁사의 키가 175센티(= 시선의 높이 1.65미터)인 경우 하방으로 0.65º
② 145미터 국궁 과녁 상단 보기 : 궁사의 키가 175센티인 경우 상방으로 0.4º
③ 10미터 과녁 하단 보기 : 궁사의 키가 175센티인 경우 하방으로 9.4º
④ 5미터 성벽에서 30미터 과녁 하단 보기 : 궁사의 키가 175센티인 경우 하방으로 12.5º
위와 같은 계산에서, 상체 숙여서 쏘기의 효과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0미터에서 과녁을 쏘는 경우, 상체을 9.4º 숙여 쏘면 원사할 때의 표를 유지할 수 있다.
5미터 성벽에서 30미터 과녁을 쏘는 경우, 상체를 12.5º 숙여 쏘면 원사할 때의 표를 유지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는 표적-주안라인과 살대-깍지라인이 어긋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거리를 쏘면서 깍지 위치가 충분히 높다면, 줌통은 표적-주안라인의 위로 많이 올라간다.
근거리를 쏘면서 깍지 위치가 충분히 낮다면, 줌통은 표적-주안라인의 아래로 많이 내려간다.
표적-주안라인에 줌을 가깝게 두는 상황을 가정하면, 다음 표와 같은 살대-깍지라인을 얻을 수 있습니다.
표적-주안라인에 줌을 가깝게 두는 경우의 대표적인 것으로 촉으로 표보기가 있습니다.
<표 2. 살대와 깍지의 위치>
궁사 개인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표보기 방법이 있기 때문에, <표 2>는 단지 예시일 뿐입니다.
<표 2>에서 극 상향사는 머리 위의 새를 활로 쏘는 경우와 같은 활쏘기를 의미하며,
극 하향사는 발 바로 아래에 있는 적병을 쏘는 경우와 같은 활쏘기를 의미합니다.
7) 좌궁으로 활쏘기
<그림 3>에서 정발장군은 좌궁으로 활을 쏩니다.
<그림 2. 정발장군의 유묵>에서, 정발장군이 글씨를 잘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발장군의 유묵이 원본이라면, 400년 전의 작품이 됩니다.
필사본일지라도 그 가치는 제법 높을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도 정발장군이 한문에 능통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은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글자를 주옥같은 글씨(珥筆)로 받아썼는데,
아무리 어려운 글자(僻字)를 불러주더라도 그 글자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감탄하여 칭찬을 하였는데,
공은 감사의 인사를 하며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연히도 아는 글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공을 칭송하는 소리가 더욱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한글 풀이 -
이와 같은 정발장군의 한문에 대한 조예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정발장군은 명필이었고 오른손을 잘 섰습니다.
유교사상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왼손으로 글씨를 섰다고 추정하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정발장군은 오른손도 잘 섰고, 따라서 우궁으로 활을 잘 쏘았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부산진순절도』에서는 좌궁으로 활을 쏘고 있지만, 정발장군은 좌궁 우궁 모두 능숙하게 다루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8) 부사수의 운영 여부
<그림 3>에서 보면, 뒤에 가만히 서 있는 군사들이 있습니다.
궁도대회에서 활쏘는 모습을 뒤에서 관심있게 관전하면, 궁사가 쏘기 전에 살이 맞을 위치를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뒤에서 보면 살대의 각도, 만작여부, 바람 방향과 세기의 변화 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투에서 활을 쏘는 궁사를 보조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뒤에서 살대의 각도를 봐주고, 바람과 전투 상황의 변화를 알려주고, 화살 등의 장비를 보충하고 점검해 준다면,
활을 쏘는 궁사는 더욱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태종의 대군을 격퇴시킵니다.
그런데 안시성의 둘레는 4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궁사 1인이 90cm 정도의 공간을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약 4천 5백 명의 궁사로서 성을 둘러쌀 수 있습니다.
화살의 낭비를 줄이고 전투의 효율을 높히기 위하여, 부사수를 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편전은 빠른 화살 속도와 긴 사거리를 자랑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저격수 부대를 운영했다면, 편전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임무의 정확도와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부사수를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구성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① 3인 구성 저격수 부대 : 사수 1인, 부사수 1인, 도주 관리자 1인, 기마 3필.
② 5인 구성 저격수 부대 : 사수 부사수 2조 4명, 도주 관리자 1인, 기마 5필.
③ 사수의 임무 : 저격에 적합한 장소에 잠복하여, 표적을 정확히 맞춘다.
④ 부사수의 임무 : 사수에게 표적의 상황 및 바람의 변화를 알려주고, 사수의 임무를 보좌한다.
⑤ 도주 관리자의 임무 : 지정된 장소에서 말과 함께 은익하고 있다가, 사수와 부사수의 원대 복귀를 돕는다.
<그림 3>에서 정발장군 뒤에 기립하고 있는 군사들은 활을 잡지는 않았지만, 활이 꽂힌 시복을 차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군사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그림 3>에서 정발장군 뒤에 기립하고 있는 군사들은,
활을 잡고 있지는 않지만 활을 쏠 수 있는 궁사들이며,
전투 교대 요원 또는 부사수로서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 글에서는 정발장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① 정발장군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절충장군으로 부산진 첨사에 부임하여,
국경 정찰 임무 및 부산진 수성 임무를 매우 충실하게 이행했다.
②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1만 8천여명의 왜군을 맞아 결사항전을 하면서도,
조선과 조선 장수의 기상을 보여 주었으며,
이것은 부산진 전투에 참가했던 왜장 평조신과 포르투칼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증언했다.
③ 「부산첨사증판서정공묘표」등의 사료들에서 정발장군의 인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발장군은 유능한 조선의 장군이었으며,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고, 아내와 아들에게도 좋은 가장이었을 것이다.
『부산진순절도』에서 정발장군의 활쏘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이글에서는 정발장군의 활쏘는 모습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추정하였습니다.
① 정발장군은 활을 잘쏘았으며, 좌궁과 우궁에 모두 능숙했을 것이다.
② 상체를 숙여 활을 쏘는 정발장군의 자세는 수성전에서의 하향사의 자세일 것이다.
③ 상체를 숙여서 표적을 보면, 근사나 원사의 표를 유지하면서 하향사를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④ 상체를 숙이며 발을 벌리고 자세를 낮추는 동작은 수성전에서 유용할 수도 있다.
⑤ 근사 또는 하향사에서 깍지의 위치는 활쏘기의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다.
⑥ 표적-주안라인과 살대-깍지라인의 적절한 조화는 근사 또는 하향사에 대한 지침이 될 수도 있다.
⑦ 전투에서 궁사를 보조하는 부사수 또는 보조 요원이 있어서, 궁병의 전력을 극대화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발장군의 전투행적을 재조명해 보고, 정발장군의 인품을 추정해 보았습니다.
활을 쏘는 궁사들 모두는, 정발장군에 대하여 흠모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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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림 3. 『부산진순절도』에서의 우리활과 활쏘기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 정발장군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살을 시복에 찬 방향은 우궁이다, 그런데 좌궁으로 쏘고 있음이라.
우리활과 활쏘기를 전혀 모르는 화가가 서양의 등걸이 퀴버를 본 듯 하다.
역시 예리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또한 정발장군님이 좌궁 우궁 모두 사용했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의 각궁을 좌궁 우궁으로 번갈아 사용했을 개연성도 높아집니다.
정발장군은 비변사 재직시,
어떠한 한자의 훈과 음을 불러 주어도,
주옥같은 글씨로 그 글자를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이 읽고 많이 써보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오른손으로 글자를 썼을 것이니,
오른손을 당연히 잘 쓸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부산진 전투에 관한 관련 자료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부산진순절도는 귀중한 자료라고 사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