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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3국, 북유럽, 아이슬란드, 동유럽 여행 스크랩 스톡홀름에서 베를린, 베를린 시티투어
joinstar 추천 0 조회 306 17.01.26 21:0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스톡홀름에서 베를린, 베를린 시티투어

 

요약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들이 사기를 치려고 함.

스톡홀름~베를린 이동, Air Berlin AB8007409,204(2)

Hotel Augusta Am Kurfurstendamm 2138유로

 

79() 맑음 (스톡홀름에서 베를린 이동)

 

퇴실을 하고 배낭을 보관하고 시청 Tower 관람을 위해 나섰다.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 사건)

중앙역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없는 2차로 도로 인도에서 어떤 젊은 여행자가 지도를 펼쳐들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본다. 우리도 여행객이라고 하고 지나친다. 몇 발작 갔을까 두 젊은이들이 앞을 막아서며 신분증을 폈다 빨리 접으며 경찰인데 무슨 일인지 도와주겠다며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한다. 순간 머릿속에 3인조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이 있다(어떤 카페에서)는 걸 본 기억이 났다. trick 이라며 웃고 지나친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그들은 가던 길을 갔다. 아내랑 사기를 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서니 어디로 숨었는지 안 보인다. 수법은 먼저 만난 젊은이가 여행객인가 확인하고 뒤에 있는 젊은이 둘에게 신호를 보내면 나타나 길을 막고 경찰이라며 여권, 소지품, 현찰을 내 놓으라하고 둘이 따로따로 검사하면서 마약이 있냐는 둥 정신없게 하면서 고액권을 빼돌리는 사기를 치는 것이다. 경찰이라는 젊은이들은 경찰 티가 나지 않았고 진짜 경찰이라면 우릴 따라오지 않았을까? 50여 개국 여행을 하면서 거리에서 경찰이 여권을 검사한 곳은 시리아 코내트라(이스라엘 골란고원 접경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한 번 뿐이었다. 여기도 검문소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 거리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페루에서 볼리비아를 넘어갈 땐 국경 현직 경찰들이 고액권을 빼돌리는 일(한국은행 30대 사원)을 보았다. 여행자들은 항상 조심할 일이다.

 

시청에 도착해 Tower 입장권을 사고 시간을 기다렸다가 10:30에 입장을 했다. 계단을 돌고 돌아 중간 쯤 올라갔을 때 화재경보가 울리기 시작한다. 함께 입장한 관람객들이 뒤돌아서서 급하게 내려온다. 그런데 연기가 보이거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급하지만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어 순서대로 내려가야 했다. 입구에 있는 직원들이 한 쪽으로 세우며 자기들도 모르겠단다. 소방관들 몇 명이 탑으로 올라가 점검을 하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불은 나지 않았단다. ~~

다시 시간을 바꾸어 입장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우린 시간이 없어 환불(카드결제라 며칠 뒤에 환불됨)을 받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여기 사진들은 앞에 편에 올림)

호스텔 로비에서 쉬다가 배낭을 챙겨 중앙역 버스터미널에 가 공항버스를 탔다. 공항버스 요금 119크로나(1)

베를린 항공사에서 일찍 체크인을 하지 않아 기다린다. 옆 카운터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 가는 승객들을 체크인 하는데 삼중으로 한다. 일단 줄을 쳐 분리된 공간을 만들고 2열의 테이블을 배치하고 공항 직원들이 많이 나와 1차로 질문과 응답으로 체크리스트를 체크하고, 2차엔 짐과 가방을 샅샅이 검색하고, 3차에 서류와 여권을 검사하고 체크인을 한다. 1시간 이상 걸리는 것 같았다. 요르단에서 이스라엘 알렌비 출입국 관리소로 육로 입국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입국 스탬프를 받기까지 시시콜콜한 질문에 응답을 하고 대기했다가 또 불러서 묻고를 몇 번 반복했다. 짐은 투시기가 아니라 몽땅 꺼내서 조사를 하고 나오는데 배낭을 싸기 전에 물건을 늘어놓은 것 같이 컨베이어 벨트위에 펼쳐진 채로 나온다. 짐은 우리가 다시 챙겨 넣어야 한다. 그런 나라 이스라엘이어서 스웨덴에서도 강도 높게 체크를 하고 보내나 보다. 되돌아 올까봐......, 한국도 그러겠지......,

이륙시간 두 시간 전에 카운트를 열어 체크인하고 비즈니스 라운지로 간다.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식사를 하면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Boarding gate로 갔더니 약간의 지연을 알린다.

19:35 스톡홀름 공항을 이륙한 Air Berlin AB8007편은 발트 해를 건너간다.

21:00 예정보다 10분 늦게 베를린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으려 대기하고 있는데 동양인이 있어 말을 걸었더니 태국 치앙마이 태생으로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결혼을 해 가족은 독일에 있고 본인은 핀란드에서 개업을 해 일하고 있다는 심장외과 의사(55)였다. 휴가를 맞아 집으로 가는 중이란다. 소지품을 주의하라는 유의사항을 알려준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짐을 찾아 Information에서 안내해준 버스(2.7유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호텔 주소를 젊은이들에게 보여주었더니 구글지도를 검색하고 하차지점을 알려준다. 덕분에 호텔을 쉽게 찾았다.

22:30 호텔에 도착했다. Hotel Augusta Am Kurfurstendamm은 지하철역 U Uhlandstrabe에서 100m가 안 되는 거리에 있어 편리했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710() 맑음 (베를린 시티투어)

 

시내투어를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투어버스를 타고 돌아보기로 했다.

City tour회사는 4개나 된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이 오나보다.

한국어 가이드가 있는 City Circle 버스를 20유로에 표를 사고 버스에 올랐다.

첫 번째 정류장은 카이저 빌헤름 교회였는데 호텔과 가까워 오후에 보기로 하고 통과한다.(그런데 오후에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는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이다.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 ]

베를린 티어가르텐(Tiergarten)공원 남동쪽, 국회의사당과 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남쪽에서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가광장(town square)이다. 명칭은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5km 떨어진 포츠담(Potsdam)이라는 도시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은 포츠담과 베를린을 잇는 오래된 주요도로가 지나가는 교차 지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에서 가장 혼잡한 교차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베를린 장벽으로 양분된 이래 과거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황량하게 방치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크게 재개발되어 오늘날 화려한 신도시의 심장부로 부상했고, 베를린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1990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대규모의 독특한 건물들이 들어선 장소로 조명을 받고 있으며, 도시 건축가 및 설계자들에게 회자되는 곳이 되었다.

재개발 초기 많은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시 정부는 이곳을 4개의 지구로 나누어 개발하였다. 가장 큰 지구는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Renzo Piano)가 개발을 수행하였고, 자동차회사인 다임러크라이슬러(Daimler-Chrysler) 기업이 들어와 있다. 두 번째 지역에는 소니(Sony)의 유럽본사가 입주해 있으며, 특히 헬무트 얀(Helmut Jahn)에 의해 건축된 소니센터는 독특한 건축양식과 화려함으로 베를린에서 가장 현대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이외에도 40개 이상의 스크린을 보유한 영화관, 영화학교 및 영화박물관 등이 있어 관광객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 (두산백과)

 

포츠담 광장에 베를린 장벽이 전시되어 있는데 한국인에게는 포츠담 광장 한구석에 있는 통일정이 더 관심이 갈 것이다. 통일정은 독일 통일 25주년과 한국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건립하였단다. 동북아의 지정학적인 면에서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우린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질 것이고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물론 또 한 번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염원이 담긴 통일정자는 창덕궁 상량정을 실측한 원형을 본 따 제작됐다. 8m 높이의 정육각형 모양이며, 바닥 한 변 길이는 약 2 m. 제작에 사용된 자재는 다듬고 손질한 국내산 소나무류이고, 기와는 창덕궁 상량정에 있는 문양을 그대로 사용했다.

통일정자의 이름은 '통일정'으로 현판에 새겨진 글씨는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 선생이 썼다.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보유자인 고원(古源) 김각한 명장도 참여해 현판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주독일한국문화원은 20129월부터 통일정자 건립에 대한 사업 구상을 시작, 독일(베를린시)과 설치 협의를 하고 20149월에 건립 승인을 받아 올해 6월에 화천군에서 운영하는 화천한옥학교에 통일정자의 제작 및 설치를 위탁한 바 있다.

향후 주독일한국문화원은 통일정자에서 계기별 한글 서예학습 시연과 차 시음회 등을 개최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맞춤형 문화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출처: 재외동포신문 >

세 번째는 Checkpoint Charlie 검문소이다. 검문소에 있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함께 사진을 찍은 후 돈을 받는 관광 요원인 것 같았는데 관광객들이 순서를 기다려 함께 찍느라 바쁘다.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 ]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소련과 미국의 탱크가 대치했던 곳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은 네 구역으로(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나뉘긴 했지만, 도시 안에서 이동하는 일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1961813,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경계선이 막히면서 이러한 자유는 갑작스레 끝났다. 처음에는 이 경계선에 철조망과 장애물로 엮은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었지만, 나중에 이는 강화되어 높은 콘크리트 벽이 되었다.

동쪽과 서쪽 간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장벽을 따라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프리드리히슈타트의 검문소는 'C'라고 불렀는데, 더 유명한 이름인 '체크포인트 찰리'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인정을 받은 군대 인사들, 기자, 외교관, 고위 인사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에 잘 알려지게 되었고, 냉전 시대 스파이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면서 일종의 매력마저 얻게 되었다. 동쪽 편의 검문소는 통행을 저지하는 막대와 지그재그로 놓인 콘크리트 장애물, 감시탑에 차량과 그 안에 탄 사람들이 수색을 받는 넓은 구역까지 있다. 서쪽 편에는 그저 나무로 된 단순한 부스만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몇 차례의 대담한 탈출 시도가 벌어지는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 그중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은 1962년 탈출을 실패한 페터 페히터 사건이다. 그는 총을 맞고 철조망 부근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채로 방치되어 죽었고, 이는 전 세계 미디어에 보도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체크포인트 찰리는 필요가 없어졌으며, 1990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검문소가 있던 자리에는 복제품 부스 하나가 서 있고, 근처에는 1963년 문을 연 개인 박물관 하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네 번째는 베를린 장벽 기념관이다.

 

베를린장벽[ Berlin Wall ]

19455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1946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 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 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장벽 [Berlin Wall] (두산백과)

 

베를린 장벽 기념시설엔 사람들이 많다. 대충 둘러보고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중에 Trabi World가 있었다.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 ]



포츠담 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 ]


한국의 통일 염원을 담아 세운 통일정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 ]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요하는 군인복장을 한 사람들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광객들


베를린 장벽 기념관





베를린장벽[ Berlin Wall ]


  Trabi World


  

다섯 번째는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이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Konzerthaus Berlin ]

독일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꼽히는 겐트아르멘마르크트(Gendarmenmarkt)에 있는 콘서트홀이다.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칼 프리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설계했다. 18215월 완공 당시에는 왕립 극장(K?nigliches Schauspielhaus)으로 개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폭격 때문에 건물이 크게 파손됐다. 재건과 개축을 거쳐 1984101일에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홀로 문을 열었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라는 이름도 이때 얻게 됐다. 건물을 재건할 당시에 본래 모습을 충실히 재연했다. 건물 외벽에는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티크(Christian Friedrich Tieck)와 발타자르 야콥 라트게버(Balthasar Jacob Rathgeber)가 조각한 여러 작곡가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1,600석 규모의 대형 콘서트홀과 400석 규모의 작은 콘서트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밖에도 오케스트라 연습실 등이 있다. 대형 콘서트홀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1983년부터 1984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74개의 음전(音栓)5,811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Konzerthaus Berlin] (두산백과)

 

버스를 타고 가면서 베를린 TV Tower와 니콜라이 교회, 붉은 시청사를 보았다.

 

여섯 번째는 베를린 구 박물관(Altes Museum)과 루스트가르텐 정원이다.

 

베를린 고 미술관[ Altes Museum ]

19세기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시민에게 포괄적인 문화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점차 믿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러시아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1770~1840)는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슁켈(1781~1841)로 하여금 슈프레 강에 떠 있는 섬에 위치한 미술관 단지 안에,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짓도록 했다. 슁켈은 종종 홍수가 나는 점을 감안하여 일단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또한 섬을 보호하기 위해 강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이후 신 미술관, 고 회화관, 그리고 보데 미술관이 잇달아 세워지면서 이 섬에는 '미술관 섬(Museuminse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 미술관의 컨셉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제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고대 신전과 유사한 고전적인 건축물에, 늘어선 기둥들,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광장이 주요 구성 요소이다. 내부는 두 개의 안뜰과 이들을 연결하는 중앙의 로툰다?로마의 판테온과 닮은 데가 있다?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한때 궁전이나 교회 건축에 쓰였던 건축 요소들이다. 1825년에 착공하여 1830년에 개관하였다. 그 정확한 비례의 명료한 외관과 단순한 내부 레이아웃 덕분에 베를린 고 미술관은 독일 신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슁켈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고 미술관 [Altes Museum]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일곱 번째는 베를린 대성당이다.

 

베를린대성당[ Berliner Dom ]

박물관 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4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검게 그을린 듯 한 벽면과 푸른빛의 돔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폭격을 받아 본래의 화려함을 거의 소실하고 아주 단순하게 바뀐 것이라고 한다. 프로이센 왕과 독일제국 황제를 배출한 명문가인 호엔촐레(Hohenzolle) 가문의 묘지 용도로 지어진 교회였기 때문에 지금도 안에 들어가면 눈부시게 화려한 호엔촐레 가문 사람들의 관들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정의 모자이크화가 아름다운 교회 안에서는 종종 오르간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성당 바로 앞에는 루스트가르텐(Lustgarten)이라고 하는 넓은 잔디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이 정원은 원래 채소밭이었다가 나중에 녹지로 변경되었다. 나치 정권 때에는 이곳을 시위와 퍼레이드 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대성당 [Berliner Dom] (두산백과)

 

여덟 번째는 국가의회 의사당이다.

 

제국의회의사당[ Reichstag building ]

독일제국의 첫 의회 의사당이었던 건물이다.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건축가 파울 발로트(Paul Wallot)1884년에서 1894년까지 10년에 걸쳐 건축했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베를린 중심가의 티어가르텐(Tiergarten) 지역에 위치한다. 1918년까지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됐다. 19332월에 발생한 큰 화재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 건물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집중적인 포화를 맞았다. 독일 분단 시절 서독에 속해 있었다. 건물의 파손 정도가 심했던 데다 서독의 수도가 베를린에서 본(Bonn)으로 옮겨지면서 이 건물도 사용되지 않게 됐다.

1961년에서 1964년까지 건축가인 파울 바움가르텐(Paul Baumgarten)의 지휘로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1990103일 공식적인 독일 통일 의식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지면서 독일 역사에 다시 등장했다. 통일 다음 날 독일 국회의원들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 건물에서 모임을 가졌다. 독일 통일 이후 1991년에서 1999년에 걸쳐 다시 한 번 전체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1999년 재건축이 완료된 이후부터 독일 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베를린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유리로 된 돔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국의회의사당 [Reichstag building] (두산백과)

 

아홉 번째는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

독일 베를린의 중심가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건축물로 운터덴린덴로(Unter den Linden)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독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독일 통일과 함께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이 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Friedrich Wilhelm II)의 명령으로 1788년에서 1791년에 걸쳐 건축됐다. 프로이센 제국의 건축가였던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설계했다.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26m, 가로 길이는 65.5m 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정문인 프로필라에(Propylaea)를 본따 설계한 것이다. 문 위에 올려진 '승리의 콰드리가'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 Schadow)가 조각한 것으로 네 마리의 말이 승리의 여신이 탄 마차를 끄는 모습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전소되지 않고 남았다. 전쟁이후 1956년부터 약 1년 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독일 분단 시절에도 일반인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협정됐으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 받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게 됐다.

198911월 약 10만 여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독일 통일과 함께 1990년 서독 정부가 이 문의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보수공사와 함께 검게 그을린 자욱을 지워내는 등 새 단장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에서 발행하는 우표와 주화에 등장했던 이 문의 모습은 현재 독일에서 주조하는 50센트 유로화에 새겨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 (두산백과)

 

그리고 버스에서 베를린 중앙역과 대통령궁인 벨뷔궁(Schloss Bellevue)을 보았다.

 

열 번째는 전승 기념탑(Siegessaule)이다.

 

베를린 전승기념탑[ Berlin Victory Column ]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 1864년에서 1873년에 걸쳐 하인리히 슈트라크스(Heinrich Stracks)가 건축했다. 독일 중심가에 있는 그로쎄 티어가르텐(Große Tiergarten)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다가 1939년에 나치스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승리의 여신상은 프리드리히 드라케(Friedrich Drake)가 조각한 것으로 8.3m 높이에 무게는 35톤에 달한다. 탑은 전체적으로 붉은색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기둥의 모자이크 유리는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가 디자인 했다. 탑은 네 부분의 사암 블록으로 되어 있는데 세 부분은 각각 세 개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네 번째 부분은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함락한 기념으로 금으로 장식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보존됐다. 오늘날에는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코스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전승기념탑 [Berlin Victory Column] (두산백과)

 

전승기념탑 주변에서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와 알브레히크 론(Albrecht Theodor Emil von Roon) 동상을 보았다.

점심(22.7유로)은 어디선가 먹었는데 모르겠다. 중식과 베트남 요리를 먹었는데 맛이 제법이었다. 맛있는 요리는 세계화가 빠른 것 같다. 이제는 세계의 맛있는 요리들이 관광객들의 왕래를 통해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Konzerthaus Berlin ]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Konzerthaus Berlin ]



니콜라이 교회와 TV Tower


붉은 시청사

베를린 고 미술관[ Altes Museum ]


베를린대성당[ Berliner Dom ]


제국의회의사당[ Reichstag building ]



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



베를린 중앙역



벨뷔궁(Schloss Bellevue) 대통령궁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동상


알브레히크 론(Albrecht Theodor Emil von Roon)


베를린 전승기념탑[ Berlin Victory Column ]



다시 버스에 올라 호텔 앞에서 내렸다. 카이저 빌헤름 교회에 가는 것은 피곤해 접기로 했다.

호텔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서 대형 TV가 있는 피자집 앞거리에서 피자와 맥주를 먹어가며 유로 2016 결승전을 보았다. 프랑스가 신사답지 못한 경기를 했고 포르투갈이 승리했다. 호날두의 염원이 풀렸다. 비바 포르투갈!

축구를 관람하느라 맥주를 많이 마셨다. 독일인들과 함께 관람을 했는데 중요한 장면에서 응원과 함성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독일인들의 축구사랑을 알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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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03.03 12:42

    첫댓글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들에게 사기당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해외여행가서 사기안당하고 아프지 않으면 일단 50%는 성공이라 생각되는군요

  • 작성자 17.03.05 00:07

    경찰을 사칭한 조직적인 사기가 나라마다 문제인 것 같아요.
    영어권에서 특히 심한 것 같구요. 사기를 당하면 기분이 상해서 문제지요.
    아프면 고민이 많아지고 중도에 돌아와야하면 더 큰 문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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