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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쓰는인생(50) 기승전 요압 삼하20:7-10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한 신하들의 도움으로 다시금 왕권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당시 보였던 왕으로서의 행동과 처신은, 그 승리를 오히려 온 백성에게 슬픔이 되게 했던 다윗의 태도는, 이후 다윗의 왕으로서의 자질과 격에 대한 여러 의구심을 낳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겨야할 왕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생겼던 것이지요? 이제 반란을 제압했으니 환궁을 해야 하는데, 다윗을 배반해 압살롬의 편에 붙었던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는 일에 앞장을 서려하고, 오히려 유다는 그 일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입니다. 오히려 다윗을 미워하고 저주했던 시바와 시므이는 벌써부터 달려나와 살기위한 사탕발림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사랑했던 바르실래는 다윗의 호의를 거절합니다. 다윗이 떠나던 날부터 다윗과 운명을 같이하려 했던 므비보셋은 그 진심을 무시당하고 오히려 다윗에게 역정만 들었던 것이지요? 다윗이 이상해져버렸습니다. 총기와 명철이 사라졌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하는지, 누구의 말이 진심인지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는, 바른 결정력도 없고 바른 판단력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르면 하나님께 여쭙기라도 해야하는데, 하나님께 여쭙지 않습니다. 정상이지 않은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입니다. 다윗이 이상한 것을 알아챈 것은 이스라엘측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신하들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고 사분오열되어 있는 것을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 세바라는 사람이 눈치챘던 것이지요? 오늘 왕궁으로 돌아오기도 전, 다윗은 또 한번의 반란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장면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0장 1절입니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삼하20:1)
여러분, 세바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요? 이것이 오늘 다윗의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결정들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차례 다윗이 이상한 결정들을 내리는 것을 보실 수 있는데, 오늘 그것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 여쭙지 않은 결정들이 얼마나 이상한 그림을 그려가게 되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 하나님께 여쭙고 바른 결정, 바른 결단, 바른 길을 걸어가실 수 있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이유를 한번 보시지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요청과 결정을 뒤로하고 유다에게 그의 환궁을 요청했던 까닭입니다. 19장 9-10절 다시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삼하19:9-10)
이스라엘은 살기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압살롬을 왕으로 인정했던 그들이 이제 얼른 다윗을 다시금 왕으로 모시자고 결정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이들의 요구가 묵살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미적거리고 있는 유다지파를 제사장들을 동원해서 설득하고 오늘 그들과 함께 환궁을 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지파의 요구는 다 묵살한 채 말입니다. 유다지파와 함께 환궁을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환궁할 것이라고 기별이라도 하든지, 이스라엘 지파는 이렇게 이렇게 동참하라고 했으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유다백성들과만 요단강을 건넜던 것이지요? 그 내용이 41절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발로 나타납니다. 함께 읽어보시지요?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삼하 19:41) 이에 대해 왕이 친척이라 그렇다. 우리가 왕을 모시는 일에 무슨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 있냐 아무 것도 없는데 왜 그러냐고 유다지파가 그랬더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We have ten shares in the king to your one. Besides we're the firstborn--so why are we having to play second fiddle? It was our idea to bring him back.”(19:43, MSG)
우리가 열 몫을 지니고 있고, 우리가 장자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제2바이올린을 연주해야 되냐? 왕을 모시고 오는 것! 우리 생각이었다. 이 도둑놈들아. 막 그런 것입니다. 그쯤에서 유다지파도 한번 져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떻게 해요?
“But the men of Judah took a harder line than the men of Israel.”(19:43b, MSG)
유다사람들이 더 강경라인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세바의 반란입니다. “저들의 말 더 이상 들을 필요없다, 이새의 집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을 수가 없다고, 저들과 동행할 것 없이, 우리 장막으로 돌아가자.”고 말입니다. 2절 이어서 읽어보시지요?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삼하20:2)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또한번 적을 지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마음이 나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환궁을 한 다윗은 또다시 이상한 결정을 내립니다. 3절 읽어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삼하20:3)
모두가 피신가는 길, 자기가 남겨두고 간 후궁들입니다. 자신들만 버려졌다는 사실도 억울했을 것이고, 그러는 중에도 우리가 끝까지 왕궁을 지켜야한다고 결사대처럼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 일행에게 끝까지 저항했을 그들이었을텐데, 돌아오자마자 그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하였으면,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같이 갔어야 했는데 잘못했다고, 얼마나 무서웠냐고 험한 일을 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줄 수 있겠냐고, 이제는 내가 지켜주마고, 아무 염려말라고 내가 그 모든 상처, 아픔 지고 가겠다고 해야되는 것이 아닙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 기생 라합도 품어 “살몬”, 그 덮어주는 사랑으로 오늘 다윗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건만, 오늘 다윗은 어떻게 해요? 별실에 가두는 것입니다. 빗장을 지르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수치를, 자신의 잘못을,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을 목적을 꿈을 희생시켰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획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을 자기가 끝내버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저들은 후궁이기 이전에 다윗의 백성이요, 하나님 맡겨주신 양입니다. 악한 짐승에게 짓밟힌 양입니다.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챙기고 위로하고 치료하고 세워야할 양입니다. 보십시오. 처음에 저들을 버리고 갔던 것보다 지금 다윗은 더한 악을 행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치 그의 아들 암논이 다말을 범하고 버렸던 것과 같이 말이지요? 다말도 이야기합니다. 이는 처음에 나에게 행한 것보다 더 악하고 잔인한 짓이라고 말입니다. 읽어볼까요?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삼하13:16-17)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못하는 왕, 자기가 싼 똥을 치우지 못하는 왕, 똥 치우는 일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왕, 다윗이 지금 그런 왕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후궁을 가두어둔들, 자신이 저지른 죄와 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자신의 모습이 가려진답니까? 여러분 감추고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다 꽁꽁 싸고 막아두었다 한들 다 들통나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다 오픈하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그리고 내 잘못에 대한 모든 처분을 달게 받고 그것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살 길인 것입니다.
오늘 새벽 아간이 했던 잘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데도, 하루의 시간에 더해, 각 지파별로, 각 족속별로, 각 가족별로 나오게 하는 그 시간 시간 중에도 그는 끝까지 잘못을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끝내 땅속에 묻고 감추어 두었을 뿐입니다. 그랬던 그는, 어디 피할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제비로 뽑아내시는 것이지요? 아간과 그의 모든 소유가 아골 골짜기에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은 그렇게 이상한 왕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또하나 이상한 결정을 내립니다. 오늘 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를 임명하는 것이지요? 읽어보겠습니다.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삼하20:4-5)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다윗의 심정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압을 보내는 것이 맞는데,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거든요. 아직도 요압에 대한 마음이 정리가 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아마사를 사령관으로 내세우면, 그래도 나뉘어지고 갈라진 이스라엘과 유다의 마음을 그래도 조금은 모아볼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참 순진한 생각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나요?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당연하지요. 이게 가능할 리가 없지요. 지금 유다의 마음이 어떤데요? 다윗왕이 모아도 모일까 말까인데, 누가요? 압살롬의 편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던 장수가, 반란을 진압하는 병사가 되어도 우스울 판에, 그가 총 책임을 맡아서 반란군 진압을 하려하니, 유다지파 중 어느 누가 그에게 자기 목숨을 걸고 나서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환궁을 하는 일에 있어서 유다사람들을 부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오늘 세바를 진압하는 일에 있어서 아마사를 세운 것은 오늘 유다사람들의 심정, 그리고 그 반란군을 제압한 유다 군사들의 마음을 더더욱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얼마전까지 압살롬에게 붙어 다윗왕을 반역했던 아마사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군사를 모집한다고 돌아다니는데, 어느 누가 그의 말을 듣고 나서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요압이 아비새가 여지껏 군대의 대장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새 그 소집이 지체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얼른 아마사를 복귀시키고 다음 기회에 공을 세우라고 하고 요압을 보내면 되는데, 다윗은 아마사를 보내둔 상황에 또다시 아비새를 보냈던 것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군대 안에 두 사람의 대장이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빼고? 요압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두 부대가 힘을 모아 전투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대가 중간에 만나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도대체 이 부대는 무엇이며, 저 부대는 무엇이고, 이 대장은 무엇이며, 저 대장은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휘체계에 어마어마한 혼선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어느새 요압이 나타났던 것이지요? 그러니 더욱 혼선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7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삼하20:7)
여러분이 보셔도 이상하지요? 아무도 요압에게 권한을 준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대로된 군인은 오늘 요압이 다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비새가 어명을 받았으면, 아비새가 요압을 데리고 세바를 뒤쫓았다고 해야 자연스러운데, 아뇨, 아비새도 정규군을 데리고 나오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요압이 본대를 이끌고 나오는 것이지요? 마치 요압이 세 번째 어명을 받고 나온 장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요압이 독단적으로 군사를 움직여서 나온 것이지요? 그렇게 전장으로 나온 요압이 한 일은, 다윗이 명령한 대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성으로 숨어들어가기 전 얼른 세바를 처치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압이 누굴 만나나요? 아마사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드시지요? 요압이 그 자리에서 아마사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 장면 함께 읽어보시지요. 9-10절입니다.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삼하20:9-10a)
그렇다면 요압은 세바를 잡으러 가다 말고, 아니, 세바를 잡으러 가기도 전에 왜 아마사를 먼저 만난 것일까요? 요압은 왜 힘을 모아 함께 싸우지 않고 아마사를 죽였을까요? 요압은 왜 아마사를 죽이고 난 이후에 세바를 추격했을까요? 다윗이 빼앗아 아마사에게 준 총사령관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라이벌-아마사를 제거하고, 라이벌이 하지 못하고 있던 일-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두 명의 지휘관 아래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동안, 세바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끌어 모으고 아벨이라고 하는 성읍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지요? 그리곤 요압과 그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작전을 시작합니다. 요압의 지휘아래에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참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토성을 쌓습니다. 아마도 그 성은 곧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 요압으로 인해 모두가 진멸당할 수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여인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삼하20:16)
여러분, 지혜로운 여인이 있는 성, 지혜로운 여인이 있는 가정, 지혜로운 여인이 있는 교회가 얼마나 복이 되는지, 오늘 성경은 한번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이 있어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이 있어야 우리 모두가 삽니다. 옆에 있는 지혜로운 여인들께 인사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압이 아벨이라는 성을 에워싸고 토성을 쌓은 것은 이 성 전체를 공격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한 사람 악한 존재가 스며들면, 우리의 성 전체가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은 오늘 새벽에 이어 오늘 저녁에도 확인하게 하십니다. 보십시오. 요압은 오늘 그 성을 박살낼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오늘 저 세바를 잡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시자구요. 오늘 아벨 성에 세바가 들어와 있는 것은 맞지만, 아벨 성 사람 모두가 다 세바에게 넘어가 세바를 지지하는 사람들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요압은? 모든 대부분의 아벨성 사람들이 세바의 편이고, 세바에게 넘어간, 세바를 지지하고 세바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벨 성의 많은 사람들은, 세바가 무슨 짓을 했는지, 왜 요압이 지금 이 성을 향해 토성을 쌓고 에워싸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던 것입니다. 뭔일이랴~ 그러고 있는 중에 바로 그 때, 이 모든 정황을 읽어낼 수 있는 지혜로운 한 여인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죄송한 말씀이지만 남자들은 갑작스럽게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위기가 닥쳐오면 영 맥을 못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판단을 빨리빨리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음 대응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러고만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기가 막힌 티비 광고를 보았던 것 하나가 생각납니다. 최고급 멋진 세단이 교통사고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한참 있다가 그 차에서 누가 내려요? 한 남자 아이가 엄마~ 하고 울면서 내리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그 광고를 만든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남자들이요, 다 잘 알고 다 잘하고 센척하는데요? 아뇨~ 남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엄마를 찾는 아이가 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혜로운 여인들이 필요합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성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더 인사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이 함께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
그리고 오늘 이 여인이 오늘 이 성을 구하는 것이지요? 요압과 외교 담판을 짓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는지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삼하20:18-19)
이 여인은 아벨성이 미련하고 바보같은 곳이 아님을, 예전부터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이 성으로 찾아와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던 성이요, 어머니같은 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즉 아벨 성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지혜가 있는 성이니, 무식하게 무력으로 하지 말자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화평하고 충성된 성읍이건만 왜 공격하고 멸하려 하냐고 오히려 요압을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오늘 요압이 찔렸는지 당황하여 두 번을 대답합니다. 20-21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삼하20:20-21)
그리하여 이 여인은 성문도 열지 않고 군대를 한 발짝도 들이지 않고 벽돌하나 부서지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 세바를 잡아 그 머리를 성밖으로 던졌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요압이 순순히 물러갔던 것입니다. 안 그랬으면 오늘 저 아벨성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바가 죽은 뒤에도, 아마 세바를 돕고 세바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아마 그 성의 모든 것이 진멸당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하는 여인,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성경은 재차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예배시간에 늦지 않도록, 여러분의 엄마가 새벽에 저녁에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들을 수 있도록 모든 자녀들과 남편들은 최선을 다해 모든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한번 더 인사하겠습니다. 제가 결코 당신의 예배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미리 미리 다 하겠습니다. 교회 늦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
그리고 보십시오.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삼하20:23)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여러분, 여기에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나왔습니다. 사무엘하 20장은 세바의 반역으로 시작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진 성경책에도 '세바의 반역'이라는 소제목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0장의 마무리는 어떻게 되요? 기승전 요압입니다. 요압의 직위 회복으로 마치는 것이지요? 세바로 시작을 했으면 세바로 마쳐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적어도 반역을 당한 다윗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뒤로 뭐 어떻게 되었다. 이렇게 끝마쳐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무리는 세바도 다윗도 아닌 요압의 직위 회복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을 통틀어 그 비중을 살펴보아도, 요압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반역을 일으킨 '세바'의 이름은 본문에서 10번 정도, 그리고 다윗은 7번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무려 13번입니다. 단연,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요압의 이름은 7절이 되어서야 등장하고 있음에도 가장 많은 횟수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 20장을 진행하고 완성해가는 핵심인물은 요압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 모든 것이 요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총 사령관으로 세운 아마사를 처치 한 것도 요압이었고, 세바가 숨어 있는 성읍을 에워싼 것도 요압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과 협상을 한 것도 요압이었고, 세바의 목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도 요압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압은 자신의 바램대로 이스라엘 총 사령관 직위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어찌하여 오늘 본문은 기승전 요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다윗의 말년, 요압이 주도적인 인물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은 어디에 간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압처럼 살아도 된다는 뜻일까요?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지난 시간에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요압이 통제하기가 어렵고 제어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도 다윗의 한마디 명령 없이 홀로 튀어나와 아마사를 살해하고 아비새를 지휘하며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다윗이 아무리 그를 제외시키고, 아무리 힘을 억제시키려 해도 그가 다시금 힘을 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그 요압이 오히려 왕을 협박하고 왕에게 저주까지 하는 하극상 신하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부터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요압과 상의하고 요압과 더 친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능한 사람만 쓰지 않으시는데, 다윗은 요압만큼 유능한 사람이 없다고 오늘 요압을 늘 의지하고 붙들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나님께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는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오늘 인간요압과 상의하였고 그 때문에 저 인간 요압에게 빚을 진 까닭입니다. 그 요압이 끝까지 밧세바와 우리아의 일을 함구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친구가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비밀과 여러분의 일을, 하나님께도 말씀드리지 못하는 일을 이야기하고 상담해온 친구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지저분하고 추한 일들을 내 일처럼 해결해주고 처리해준 친구 말입니다. 어떠십니까? 그 친구 덕에 여러분들이 도움을 받은 일들이 여럿 있겠지만, 오늘도 그 친구 때문에 해야할 일을 못하고, 그 친구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일들도 있으시지요? 그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지만 아뇨, 더욱 달라붙어 내 곁에 성큼 성큼 다가오는 거대해져버린 존재말입니다. 아니 언제부터인지 이제는 협박이고 저주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는 존재 말입니다. 여러분의 비밀을 오늘도 함구하여 주고 있는 친구, 여러분, 그 사람이 머지않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요압이 됩니다. 여러분의 생애, 여러분의 이름보다도 하나님의 이름보다도 더 많이 등장해서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저로 인해서 한숨이 탄식이 가실 날이 없게 되는 존재, 요압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가 어디까지 이르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관계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여러분의 생애의 결말도 똑같습니다.
어떻게 된다구요? 기승전 요압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결국, 요압을 위한 생애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애를 요압을 위한 생애로 지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의 모든 것으로 오늘 요압을 세우고 높이고 요압에게 힘을 실어주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하면 좋을까요? 오늘 우리 곁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 요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요압은 나보다 먼저 죽지 않습니다. 다윗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형인데, 다윗이 죽고도 한참을 더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유언으로 두 가지를 솔로몬에게 당부합니다. “요압을 죽이고 시므이를 죽여라” “똥 치워다오”입니다.
여러분, 이게 아들에게 남길 유언입니까? 내 인생의 요압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시길 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요압 때문에 기도하질 못했습니다. 요압이 그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까닭이지요. 여러분, 요압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실 것 같으십니까? 그만큼 요압이 여러분의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그래도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마시고 요압과의 관계를 정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밤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기도하시면 정리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기승전 요압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애, 기승전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된 생애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다윗이 오늘도 이상한 결정들을 내립니다. 이스라엘을 배제하고, 후궁들에게 책임을 지워 빗장을 지르고,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워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일을 만듭니다. 또한 오늘 그의 생애, 그 마지막이 어느 순간 온통 요압으로 덮여버리는, 요압으로 좌지우지 되는 생애가 되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도 요압이 있습니다. 내 생애를 뒤덮고 내게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 요압이 있습니다. 오늘 이 밤에 기도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 인생, 지긋지긋한 요압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내 생애 깊숙이 자리한 저를 제거하려다 내가 죽을지도 모를 것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 없이는 안될 것 같은, 저 없이 잘 할 수 있을까 싶은 불안감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오늘 요압을 떼어내게 하옵소서. 요압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제 참 자유함 속에, 우리 하나님께 더욱 영광 돌리며 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 요압이 아니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더 좋은 이들과 함께 일하고 교제하며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고 그와 상의해야하는 어리석인 일을 행하지 않도록 더욱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모든 순간, 모든 자리 우리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 여쭙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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