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평생에 단 두 번의 공찰(公刹)주지
글- 월탑 박경훈(月塔 朴敬勛)
내가 알기로 스님은 평생에 단 두 번의 공찰 주지를 맡았다. 한번은 강남 봉은사이고 또 한 번은 수원 봉녕사이다.
(1) 봉은사 주지
그 중, 봉은사 주지를 맡은 것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관계가 있다. 스님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한상 거사가 불교신문사 사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불교신문사 사장을 맡은 이한상 거사는 처음 신문을 맡았을 때와는 달리 기왕 종단의 기관지를 맡았으니 종단의 발전과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 사이에 종단발전과 한국불교의 중흥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시대는 재가불자의 역할이 종단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증대할 것이라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다. 따라서 미래사회의 중견으로 성장할 대학생에 대한 포교와 신행의 지도, 그리고 교육방법 등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대학생불교연합회를 만들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동시에 대학생들이 수련을 할 수 있는 중심도량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그 도량은 서울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대학생을 위한 상설도량이 처음이었으므로 공찰을 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방학 때가 아닌 평상시에는 수련하는 학생이 학교에 통학을 해야 하므로 가급적 도심에서 가까워야 했다. 이 같은 지역적인 요건을 갖춘 공찰을 대학생의 수련도량으로 종단에서 배려하기란 더욱 쉽지가 않았다. 그때, 스님은 총무원장인 청담스님에게 간청을 해서 어렵사리 봉은사의 주지를 맡고 봉은사를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도량으로 개방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창립을 하자, 스님은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지도법사를 맡고 봉은사에 상주하면서 수행하는 대학생불교연합회의 구도부 학생들에게 방사를 내어주고 침식을 하면서 학교에 통학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스님이 평생 동안 단 두 번을 맡은 공찰주지 중 하나였다.
(2) 봉녕사 주지
또 한 번의 주지, 스님이 수원의 봉녕사 주지를 맡았을 때는 봉녕사가 지금과 같이 손꼽히는 비구니도량이 아니라 한낱 독(獨)사리의 작은 절에 지나지 않았다. 가난한 절이어서 누가 주석을 하려 하지 않아, 비구니 스님들 몇이서 근근이 도량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봉녕사는 본래 가난한 절이 아니었다. 절은 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과 시자실이 있는 일자형의 작은 절이지만 앞에는 사찰소유의 논과 밭이 펼쳐져 있고 야산이 마치 삼태기마냥 둘러싼 아늑한 절이었다. 그리고 그밖에도 절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사유지가 있었다.
그 재산이 해방 후의 농지개혁으로 속인의 손에 넘어가고, 또는 대처승 주지가 팔아 없애어 남은 것은 법당뿐이었다. 산 주인은 심심하면 길을 막고 스님들의 출입을 막았다. 설상가상으로 앞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비구니 스님들 들으라고 고성방가를 하고 심하면 법당 앞에서 추잡한 농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해댔다. 낮은 그렇다 하나 밤은 밤대로 술 취한 무뢰배들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넌지시 들리는 소문은 절을 비우고 떠나면 별 일 없을 것이라는 공갈이고 협박이었다.
봉녕사 스님들은 그래도 참고 견디어 언젠가는 절 땅을 되찾아 도량을 넓히고 산에 나무를 가꿀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패가 하도 심해서 견디다 못한 봉녕사 주지 스님이 총무원으로 스님을 찾아와 실정을 호소하였다. 듣고 난 스님이 이내 말하기를,
“내가 주지를 잠시 맡아서 버릇을 고쳐야 되겠소. 그렇지 않아도 봉녕사는 정화 전에 주지가 부당하게 팔아 없앤 망실재산도 있으니 그것도 찾을 겸, 그런 다음에 다시 주지를 맡으시오.”하였다. 이것이 봉녕사 주지를 맡게 된 동기였다.
어느 날, 봉녕사로 스님을 찾아갔더니 마루 끝에 웬 목검이 세워져 있었다. 무엇에 쓰자는 목검인가 하고 물었더니 ‘활인검(活人劍)’이라고 하였다. 살려야 할 사람이 있는가 물었더니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까닭인즉슨 이러했다.
총무원 직원이 봉녕사 망실재산을 파악하기 위해서 토지대장을 열람하자 새로 온 봉녕사 주지가 옛 주지가 판 땅을 되찾으러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봉녕사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정화 전의 주지를 포함해서 모두가 토박이였으므로 그들은 물론 봉녕사 땅과 관계가 없는 그 고장 사람들까지도 스님에 대한 감정이 사나웠다. 예의 무뢰배들이 절에 와서 부리는 행패도 더 심했다. 밤에도 마음을 놓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은 봉녕사가 수원시의 한 복판에 위치해 있지만 그때는 아주 변두리여서 인적이 드물고 치안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궁벽한 곳이었다. 밤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으나 무뢰배들에게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치안의 사각지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비구니 스님들이 얼마나 심한 곤욕을 치루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스님은 그 무뢰배들을 몇 차례 만나 타일렀다. 그러나 그들은 지게작대기를 질질 끌고 와서 시위를 하고 토박이임을 내세워 텃세를 부렸다. 스님은 궁리 끝에 목검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지게 작대기의 시위에 목검으로 맞서자는 것이었는지, 그 대결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승부는 어떤 결과였는지 묻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그 무뢰배들이 스님에게 항복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들이 봉녕사 땅을 차지한 사람들의 사주를 받아 술잔이나 얻어 마시고 한 짓임을 알게도 되었다. 무뢰배들은 스님에게 밝은 삶을 살기로 약속을 하였다.
스님이 봉녕사 주지를 맡았을 무렵, 총무원은 전국 사찰의 망실재산을 찾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녕사의 망실재산은 쉽게 파악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재산을 찾기 위해서는 재판이 불가피하고 재판을 하게 되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므로 스님은 그때까지 봉녕사 주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스님은 무뢰배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후환을 없앤 뒤에, 당초에 계획했던 대로 봉녕사 주지를 후임자에게 물려주어 오늘과 같은 훌륭한 비구니 도량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각설하고, 스님이 무뢰배들의 지게 작대기에서 떠올린 활인검에 대해서 첨언(添言)을 하자면, 활인검은 『벽암록』 12칙의 수시(垂示, 일종의 짤막한 서언)에 보이는 말이다. 이 수시에 의하면 활인검은 살인도(殺人刀)와 함께 선사의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경지를 비유하고 있다.
『벽암록』에 말하기를 “살인도와 활인검은 오랜 예부터의 풍규(風規)로서 지금도 긴요한 것이다.”하였다. 살인도는 생명을 빼앗는 칼, 활인검은 생명을 주는 칼이다. 생명을 빼앗고 주는 칼을 무애자재하게 쓰는 것은 선가에 전해 오는 오랜 풍규이자 가풍으로서 지금도 긴요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 활인검을 봉녕사를 살리는 데 긴요하게 썼고 또한 무뢰배들을 범죄에서 구하여 밝은 삶을 살게 하였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3 -구국구세의 횃불,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60년대의 큰스님 계시던 봉은사 참으로 구국구세, 스러져 가던 한국불교를 중 시키기 위해 우리 큰스님이 일구월심으로 분투하시던 곳이지요 대학생들을 절에 상주시키며 출가자처럼 엄격히 학교 공부와 수행을 병행시키시던 큰스님 보현행원품을 외울 수 있어야 입방을 허락하셨던 큰스님 장차 한국불교는 재가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미리 예견하시고, 그렇게 장차 대들보가 될 제자들을 혼신의 힘으로 키우시던 큰스님 그렇지만 큰스님의 좌절 또한 그 곳에서 있었으니, 봉은사를 지날 때마다 큰스님의 비원이 늘 생각납니다..._()_
수원 봉녕사는 아마 지금 비구니 사찰이 되어 있을 겁니다. 승가대학도 설립되어, 우리나라에 몇 없는 훌륭한 비구니 도량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 봉녕사가, 큰스님의 법력이 아니었으면 지금은 있지도 못했을 터. 병약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강단이 나오셨는지, 정녕 큰스님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광덕 큰스님.. 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시봉일기 사경을 하면서 구구절절 멀리 내다 보시는 혜안을 가지신 큰스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60년대 누가 재가불자들의 중요성을 보셨을까요? 이 정신 계승하는 봉은사가 되는 날이 있기를...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_()()()_..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