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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 마틴의 2차대전
선전포고는 이미 되었고, 기계공으로 일하다 스무 살이 되어 입대를 기다렸다. 친구들은 모두 입대했는데, 오히려 집이 지옥 같았다. 부모님은 농장과 경작을 이유로 입대 유예를 바랐지만 난 마음이 불편했고, 부모님은 자원만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문제로 무척 싸웠다.
독일 폭격기가 계속 날아오니 전쟁은 피부로 왔다. 하늘에 대공포 포연이 가득하다. 어느 밤, 폭격기가 방향을 잘못 틀어 우리 농장을 가로질러 폭탄들이 떨어져 문과 창문이 박살 나 바람이 휭휭 들어온다. 인부 한 사람이 천장에서 떨어진 파편에 다리를 찍혀 일주일 뒤에 사망했다.
아버지와 내가 살피러 나갔을 때도 폭격이 진행 중이라 하늘에 서치라이트가 열 개도 넘고 대공포탄 수백 발이 터졌다. 인부 한 명이 반 미쳐서 “저 새끼들 가만 안 두겠어!” 자원입대해서 보복하겠다고 했다.
근처의 시설 때문에 매일 밤 그랬다. 매일 사이렌이 울리면 집에서 나가 피했다. 폭격기들이 머리 위에서 서치라이트에 잡히고 그렇게 쏴댔는데도 폭격하고 지나갔다.
41년 2월, 드디어 내 서류가 왔다. 입대한 친구들이 돌아와 넌 비겁한 놈이랄까 걱정이었다. 나치와 히틀러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웨스트 웨일즈의 육군사무소에 출두, 열차 타고 가면서 전날 폭격의 끔찍한 파괴를 본다. 다음 정거장에 이르니 아내와 부모들이 역에 꽉 들어차 아들과 남편들에게 이별을 고한다. 거기서 루(Lew)와 정말 친했던 알버트를 만났다. 나는 알버트의 여동생과 결혼할 작정이기도 해서 같은 부대를 바랐고, 알버트와 46년 2월까지 같은 부대에 복무하게 된다.
기초훈련 두 달은 생소한 경험이다. 대공포 주특기는 비행기가 끌고 가는 표적에 사격도 있었다. 훈련장에도 폭격이 떨어져 몽땅 죽을 뻔하기도 했고, 폭격기들이 목표로 착각하여 훈련소가 박살 나고 불이 났다. 폭탄이 터지면서 지뢰가 네 개 유폭되어 막사에 큰 구멍이 나고, 낮에 훈련도 힘들어 죽겠는데 잘 수가 없다. 사이렌이 울면 막사에서 나가 방공호로 파놓은 참호로 뛴다. 훈련소에 거대한 참호선이 생겼다.
훈련이 끝났는데 총을 안 준다. 당시 영국군은 소총도 모자랐다. 1914년에 만든 루이스 기관총과 대검을 줬다. 몇 주나 지나서 받은 것이 캐나다군 소총이다. 이때 루와 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단기 부사관 과정에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수료하고 우린 Lance Bombardier로 진급했고 – 지휘관 직속 병기 담당관이 된다. 독가스 대처 훈련도 받았다.
41년 12월, 비행장 경계로 배치되어 2주 휴가를 받았는데, 해외파병을 가게 된 나에게 어머니는 대노했다. 1차대전 동안 어머니의 오빠를 잃었기 때문이다. 다른 오빠인 프레드도 참전했다가 심한 화상으로 영구 손상을 입었으며, 내 아버지도 1차대전 부상자다.
복귀하니 얇은 여름 군복을 준다. 우린 뭐가 뭔지 몰랐다. 드디어 소총이 나오고, 우린 3주간 보포스 대공포도 배우고 행군도 했는데, 보통의 육군 장비가 아닌 걸 받았다.
훈련 끝나고 항구로 가서 깜짝 놀랐다. 태어나서 그런 여객선은 처음이다. 10층까지 있는 여객선이 얼마나 큰지 믿기가 힘들었다. 만 명이나 탔고, 저 아래로 내려가 올라오지 말라는데, 폐쇄 공포가 온다. 사면이 철판밖에 안 보이는데 어뢰를 맞으면? 그냥 죽는다는 공포...
29척 선단이 글래스코 항을 떠난다. 구축함 3척과 호위 항공모함도 붙었다. 구축함이 몇 번 폭뢰를 투하하며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들렀다가 다시 출발했다.
남으로 내려가 케이프타운을 돌아 봄베이에 사고 없이 도착했다. 봄베이 보충대에서 이틀 있다가 정말 놀랐다. 거지가 그렇게 많고 행색이 끔찍했다. 나중에 들으니, 젊은 부모들이 어려서부터 구걸하는 생활에 적응해서 계속한다는 거다.
열차 타고 캘커타를 향해 7일 달렸다. 기차는 오래된 구형으로, 객실 중간열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숙련된 도둑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는데, 손에 들고 있는 총까지 가져간단다.
이 열차 여행은 하나의 추억이다. 화장실은 객차 중간에 1m 너비 장화 크기 구멍이 있다. 구멍 양쪽에 블록이 놓여 있고, 변이 철로로 바로 떨어진다. 손 닦을 물도 없다. 최선을 다해 조준해야 한다. 실수하면 (육군 지급) 화장지로 자기가 닦아야 한다.
가는 동안 나눠주는 전투식량을 먹었다. 콘비프와 비스킷과 차, 분유도 나온다. 차를 마시려면 열차가 서야 한다. 양동이에 식수를 떠서 엔진 열차로 가져가 끓여달라고 한다. 어쩌다 샤워도 열차가 서야 한다. 정지하고 뛰어가면 파이프가 있고, 그 아래서 옷을 벗을 틈도 없이 빠른 샤워를 했다. 군복이 젖어 문제라고? 아니다. 어차피 항상 땀으로 젖어 있다. 옷까지 세척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열차는 끈적끈적 뜨거워 종종 지붕으로 올라가 식힌다. 밤에 잠이 힘들다. 너무 시끄럽고, 나무 의자에 벌레가 천 마리 기어다닌다. 잠자는 게 아니라 눈 감고 벌레를 손으로 쳐내는 것이 취침이다. 다수가 벌레에 물린 붉은 자국으로 지냈다.
낮에 열차가 서면 주민들에게 신선한 파인애플, 바나나, 망고 오렌지를 정말 싸게 샀다. 문제는 감염 질병이라서 과망간산염을 희석한 물로 씻어서 먹는데, 마실 물도 부족하다. 캘커타 병영에 도착해서 진짜 샤워하고 군복을 세탁했다. 비누가 그렇게 달콤한지 처음 알았다. 대나무 오두막의 샤워가 사치스럽게 느낄 정도다.
캘커타 역시 개미 떼 같은 거지가 있다. 어디 가나 “바크쉬스 사힙(도와줍쇼).” 소리가 들린다. 일주일 뒤 다시 열차를 타고 200마일 남쪽 오리슨 주의 주도 컷택이란 곳으로 간다.
일본놈들이 벵갈만까지 나타나기 시작했고, 비행장 대공방어를 위해 우리가 필요했다. 비행장은 큰 벌판으로, 사방이 정글이라 파리는 말도 못 하고 전갈, 지네, 뱀과 야생동물이 득실, 밤에는 자칼들이 어슬렁거린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울면 섬뜩하다. 소총으로 조준해서 자칼을 쏘기도 했다. 한 마리 죽이고 아침이면 독수리가 다 뜯어먹고 없다. 뱀도 많아서 보초 서고 오면 담요 속에 또아리 틀고, 아침에 일어나면 군화 속에도 있다. 신을 때마다 군화 속에 전갈 없나 확인한다.
항공기지에 도착해 텐트에 살면서 보포스 포와 탄약, 장비를 수령해 배치했다. 가끔은 인도도 폭우가 내린다. 스콜처럼 내리지만 기습 강수량이 장난 아니다.
보포스 건 포상은 5m 원에 1.2m 높이 샌드백을 쌓고 탄약 네 박스를 놔둔다. 섭씨 37도가 보통에 48~50도까지도 몇 번 올라갔다. 아침부터 밤까지 옷이 흠뻑 젖는다. 밤에도 찐다.
우리 포는 활주로 끝에 있었다. 비행장에는 전대가 두 개로, 하나는 허드슨 폭격기, 하나는 허리케인 전투기 전대. 폭격기는 매일 이륙해서 벵갈만의 일본 잠수함을 찾거나 버마로 폭격하러 갔다.
거기 있으면서 우리 포상까지 굴러오는 crash landing을 무수히 목격했는데, 가끔은 폭탄이 가득 달린 상태였고, 연료 부족, 폭풍 속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보통은 한쪽으로 기울면서 날개가 땅에 닿아서 붕괴하듯 섰다. 연료탱크가 폭발하기도 했고, 동체가 기울어 돌면서 날개가 땅을 긁으면 바로 불이 난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의 폭발이 있었다.
보통 250파운드 폭탄 넷을 달았는데, 장착된 산소통 서너 개가 터지면 폭탄보다 소리가 더 크다. 터지면 비행기가 조각이 우리 포좌까지 무더기로 날아온다. 조심해라 어째라 자시고 무조건 머리를 숙여야 한다.
내 포상을 잘 축성해서 인사장교가 1마일 거리에 하나 더 만들라고 했는데, 나무 때문에 정글 끝자락에 만들었다. 적기가 지상을 보면 나무에 가려 포상 숨기기는 적격이었다. 샌드백을 만드는데 인도 사람들이 광주리에 흙을 담아 머리에 이고 온다.
그 작업을 감독하고 돌아오다 어두워졌는데, 포좌와 막사 중간에서 백 마리는 될 자칼과 야생 개들이 동시에 짖는다. 재빨리 몇 방 쏘고 1km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었다. 포상 잘 만들었다고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럭저럭 잘 지냈지만, 대공포 쏜 적도 없고 참전 결과물이 없어 실망스러웠다. 일본기가 안 날아온다. 이제 1942년이 저무는데, 일본군은 아군을 버마로 밀어대면서 인도와 가까워졌다. 우리 연대는 치타콩 지역으로 이동명령을 받는다.
당시 캘커타는 7백만 명에 가까웠다. 일본군이 벵갈로 다가오면서 동부 도시들로부터 대탈출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캘커타는 병이 돌며 굶주리고, 도시 중심부도 아침이면 시신을 옮긴다. 시신은 파리가 뒤덮고, 인도군 시신 분대가 사체의 손발을 묶고 대나무 장대에 걸어 어깨로 지고 간다. 걸어가면 시신이 흔들린다. 바라보는 내 심정 끔찍했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한다.
떠나기 전에 ‘제국 타바코 회사’에서 담배를 나무상자에 채워서 물소에 얹어 가져왔다. 거리는 더럽고 냄새나고 부서진 잡석이 가득하고, 녹색 코코넛이 폭탄처럼 천 개는 떨어진다. 만도로 주둥이를 쳐서 음료수로 파는데, 그나마 인도에서 안심하고 마실 것이었다.
기차가 오지 않아 밤새 담배 박스 더미를 지켰다. 1초만 시선을 거두면 가져간다. 다음 날 아침 열차가 도착해 치타공으로 가는데, 내내 캘커타로 향하는 피난민 무리를 본다. 인도가 위험하다니...
지루한 날이 가고 드디어 실전이 가까웠다. 동트기 30분 전부터 포좌로 가서 대공포를 잡는다. 낮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상에 3명은 남는다. 어둠이 내리면 포상에서 나와 야간경계를 선다. 그렇게 하루하루 반복되고 포와 탄약을 정비하며 포술 연습을 한다.
43년 9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시다 어떻다 일절 없었다. 집으로 갈 생각만 했다. 난 유럽의 코만도에 자원했다. 일단 가면 이틀이라도 고인이 된 모친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될 리가 있나. 유럽전선에서 다치면 영국으로 가지만, 태평양전선은 안 된다. 못 간다.
인사장교가 날 격려하며 캘커타 전투훈련 코스를 물었고, 그게 내 화를 부채질했다. 차라리 남아서 전투를 치르고 싶었다. 어머니 부고를 편지를 받았으니 이미 땅으로 들어가셨으리라.
하루하루 다시 반복이다. 백만 파리와 찻잔 속의 개미들, 손으로 집어내고 어쩔 수준이 아니다. 개미와 함께 차를 마셔버린다. 빵을 만들면 빵 속에 바구미(곤충)가 가득해서 해초 케이크 같다. 그걸 다 집어내면서 빵을 만들 수가 없는 거다. 우린 그냥 먹었다.
항상 덥다. 여름 군복임에도 온종일 땀으로 젖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리도 몸 모양으로 젖어 있다. 모기장이 신선한 공기가 안 들어와서 답답해도 치고 잔다. 우리 포상 중 하나가 도시 외곽의 대나무숲에 따로 있었는데, 네 명이나 척추 말라리아에 걸려 발병 이틀 만에 죽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적기를 쏘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하나는 생각난다. 폭격기 한 대가 철도역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는데, 12발 쐈다. 적중하진 않은 것 같았으나 근접탄이 나오면서 폭격기가 기수를 180도 돌리더니 돌아갔다.
44년 4월에 일본 애들이 버마에서 인도까지 들어오려고 한다. 격퇴되었지만 양쪽 피해가 컸다. 그러자 우리 연대는 해산되어 2사단을 증강하러 가게 된다.
나와 루와 알버트가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가 찢어질까 당황했다. 같이 있고 싶었다. 우린 같은 포대로 다른 포좌/사이트에 있었지만, 만나고 싶으면 언제나 가능했었다. 루는 병장으로 진급해 포반장이었고, 나도 상병으로 포반장이었으며 알버트는 내 포수로도 잠깐 있었다.
알버트가 내 포수였을 때 발포가 있었다. 내가 표적을 식별하고 교전 명령을 내렸고, 알버트는 내 명령의 문장이 끝나기 전에 항상 첫발을 시작했다. 그때도 12발 쐈고, 보기엔 맞췄는데 특이한 징후는 안 보였다.
연대가 조각난다는 소리를 듣고 우린 중대장을 찾아가 같은 대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갈 부대는 웨일즈 연대였고, 알버트와 나는 같은 소대까지 이른다. 루는 병장이라서 다른 중대였으나 종종 볼 수 있게 된다.
치타콩에 있는 동안 우리 77대공포(Ack Ack)연대가 정말로 해체되었다. 다른 부대를 받고 트럭에 올라 임팔(Imphal)로 가는 82번 도로를 탔다. 우린 로열 웰치 퓨질러스(Royal Welch Fusiliers)연대로 들어갔고, 2주 동안 강한 보병훈련을 받고 만달레이로 간다.
칼라와란 곳에서 친 윈 강을 건넜고, 여기서부터 이전과 다르게 힘들어진다. 왕립 공병이 아주 긴 부교를 만들었는데, 강폭과 물살이 장난 아니다. 다리를 건너자 풍경이 이국적으로 변하면서 긴 티크 나무들이 보였다. 자연 환경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일본놈들은 도주하는 것이 분명했고, 우린 그들 후위대를 상대해야 했다. 높은 나무에 매달린 저격수들이 쏘고 도로에 나무도 쓰러트려 놓는다.
낙하산으로 보급품을 받았다. 10일 동안 170km를 전진했는데, 총포에 맞지 않아도 죽을 것 같다. 너무 덥고 물이 없다. 군장이 너무 무겁고, 나무 위에 저격수, 쓰러진 나무로 길이 막히고, 적 반격을 예상해서 하루 두세 번 땅을 판다.
일본군은 지연 전술에 매달린다. 특히 저격수가 그랬는데, 어느 나무에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나무를 날려버렸다. 저격수가 땅으로 떨어지는 걸 못 볼 수도 있다. 로프로 나무에 묶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대고 온통 갈기고 보면, 총알로 벌집이 되어 매달려 늘어진 그들을 본다.
해가 지면 하루 행군이 끝나고 사각형 방어로 참호를 판다. 50% 경계로 밤을 보내기에 그렇게 많이 못 잔다. 0.5m 깊이로 팠는데, ‘무덤’이라고 불렸다. 밤이면 항상 박격포가 날아온다. 일본군 몇 명이 사각형 경계선 중앙까지 들어와서 갑자기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반대편으로 통과해 도망친다. 땅을 안 팔 수가 없다.
어느 아침이 기억난다. 한 명이 어깨에 담요를 걸치고 ‘무덤’에서 나와 기지개를 펴는데 커다란 검은 뱀이 땅에 떨어졌고, 얼어붙은 가운데 대나무숲으로 미끄러져 사라졌다. 전갈 지네 있고, 너무 피곤해도 잠자기 힘들다. 적응해야 한다.
발에 로프를 묶고 잔다. 문제가 생기면 불침번이 줄을 당겨 알리고, 다음 보초를 깨울 때도 사용한다. 참호는 2인호로 깨울 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코 골면 로프를 당겨 경고한다. 종종, 잠에서 깨도 눈이 안 떠지는데, 아버지의 1914년 전쟁 얘기와 같다는 걸 알았다. 나는 졸지 않으려고 대검을 뽑아 날 끝을 턱에 댔다. 머리가 내려가면 찔리게 해서 내가 조는 걸 막았다. 한두 번 턱을 찔려 피가 났다. 안 졸려고 노력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안 그러면 내가 조용히 죽는다.
대나무로 지은 마을을 지났는데,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누가 누구를 원망하랴. 마을 우물물도 맘대로 못 마신다. 일본놈들이 독을 타고 퇴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상부 명령은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전진, 10일을 뚫고 강을 만나 잠시 쉬었다. 씻지도 면도도 못 해고 강을 만나니 천국이다. 물살 빠른 맑은 물, 군복 입은 채로 뛰어들었다. 몸과 군복을 동시에 닦고 세탁한다.
이틀 기다리니 수송대가 따라잡아 밥 같은 밥을 먹는다. 콘비프 스튜와 탈수 감자에 차를 마셨는데, 크리스마스 같았다.
무거운 차량이 통과하도록 통나무 교량을 건설했다. 코끼리 열 마리를 동원했는데, 코끼리 부리는 마하우트(Mahout)들이 필요하다. 빽빽한 티크 나무를 잘라 사용했는데, 항상 야생동물을 조심한다. 통나무 교량이 완성되었지만 기쁘지 않다. 다시 일본군을 추격할 것이고, 이런 거 또 할 것이 분명하며, 그 다리를 다시 쓸 것 같지도 않다.
마침내 이라와디 강에 도착했는데, 이게 강인가?... 폭이 1.5km. 유속이 6노트(시속 11km)라고들 했다. 강을 완전히 건너기 전에 건너편에 붙은 섬으로 건너가게 된다.
강의 2/3를 건너 800m 정도 남았는데 물살이 강한 데다 일본군 기관총 역시 미친 듯 쏜다. 물에 보트가 뜨기만 하면 집중사격 받아서 펑펑 뚫린다. 우리 소대장이 엉덩이에 맞았는데 살이 작살 나서 보기 영 꺼림직했고, 또 한 명이 다리에 맞았다.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어 보트를 잡아 매달렸고, 물살이 보트를 마구 밀어낸다. 하류로 1km 마구 쓸려 내려갔다. 우리만 실패한 게 아니다. 몇 척이 우리와 같았고, 중대장 보트도 밀렸다. 밀리다 출발한 건너편으로 돌아간 것도 있다. 난파된 상태에서 중대장이 우릴 집합시켰고, 왕립 공병이 부교 설치하는 곳으로 갔다. 보급부대용으로 보트에 상판을 대는 가교를 만들고 있었다.
공병의 보트 부교는 사람이나 차량을 태운 상태에서 모터로 건너는 것인데, 출발하자마자 일본놈 기관총이 쏘기 시작한다.
반쯤 건너자 박격포가 떨어진다. 200m 남았을 때 우리 배가 철조망 쳐진 모래톱으로 뛰어들었고, 철조망을 만남과 동시에 우리 정중앙에 박격포가한 발 폭발했다. 포탄이 보트 바로 옆 물에서 터졌고, 보트는 나무 골조에 캔바스 천으로 그냥 무방비 보트다.
우린 물로 들어갔고, 일본놈들에겐 사격장 표적지처럼 됐다. 그들이 일제사격을 했다면 우린 전멸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러지 않았다.
일대는 평평하다. 그들은 강변을 따라 20m 위 모래 언덕들에 지휘소를 두고 우릴 상대했다. 그때 달까지 밝게 떠서 우릴 쉬운 표적으로 만들었다.
보트가 철조망에 처박고, 보트 밑에서 박격포탄이 터지고, 중대장은 “지금부터 각자 살아남는다!” 고함을 질렀다. 나는 보트 앞에 있다가 상황을 맞았고, 뱃머리가 눌러서 철조망을 운 좋게 피했다. (나중에 처남이 되는) 알버트가 철조망 중앙에 있는 것이 보여 끌어냈고, 알버트 다리가 심하게 찢어진 걸 발견했다. 사방이 제정신 아니다. 기관총탄, 소총탄, 박격포와 물에 떨어져 파열하는 수류탄...
알버트와 나는 모래톱을 때린 다른 보트 뒤에 엄폐했고, 보트 반대 면에 기관총알이 다다다다 때린다. 보트에 구멍 슝슝슝 뚤리는 걸 내 눈이 확실히 보고 있었다. 우리가 맞진 않았으나 거기 있으면 안 된다!
섬이 보이고, 섬으로 가는 모래톱을 본다. 섬으로 가는 길은 물이 깊었다 얕았다 반복했고, 포복하다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기를 반복했다. 놈들이 우리 철모를 충분히 정조준해 쏠 수 있었지만, 많이 안 쐈다. 그게 알버트와 나의 기적이다. 상황 끔찍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큰 전투도 아니었다.
몇 명 사라졌고, 내 분대도 전날 전입 온 젊은 애가 없어졌다. 소대 선임하사가 그 친구를 나에게 데려왔을 때 - 아직 애라서 관리 좀 잘 부탁한다고 했다. 보트가 부서지는 혼란 속에 없어졌다. 그 친구는 다음 날 치명상 상태로 발견된다. 영국 떠난 지 6주 된 신병이었다.
우리가 물속으로 들어가 섬으로 향하는데, 개 같은 상황에서 안 맞고 도달한 건 운이었다. 섬은 육중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당시 이유를 모르겠지만 사격이 멈췄고, 우린 섬으로 포복해 올라갔다. 섬의 일본군이 퇴각했다. 혹시 남은 놈이 없나 정찰했지만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부터 150mm 포를 쏘기 시작해서 모래사장에 큰 구덩이를 만들었고, 몇 발은 아슬아슬하게 빗겨갔다.
내 나름의 퇴각 이유는 포로로 잡히는 공포 때문이다. 그들이 원래 그렇다. 항복하느니 자살한다. 우리 주력이 도하에 성공하면 자신들이 차단될까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게 우리에겐 운이 됐다. 그때 맘 놓고 조준해서 쐈다면 살아남을 사람 없었다.
다음 날에 루와 알버트와 내가 만났다. 루는 다른 중대의 소대 선임하사였다. 우리 우정은 대단해졌다. 우린 훈련소부터 그 강까지 함께 했다.
셋이 지난밤 일을 대화했는데, 루의 소대는 우리보다 하류에서 보트에 13명을 데리고 도하했는데, 생각해 보니 본인이 13소대이고 도하 보트가 13대였으며, 건너편에 상륙했을 때 딱 13명 남았다고 한다.
우린 200m 이동해 방어에 유리한 곳에 참호를 팠다. 딱 반격해 올 시점이었으나 150mm만 간헐적으로 낙하한다. 섬 대부분 2미터 elephant grass로 덮였고, 자기들 눈에 안 보이니 야포로 전환한 거다. 우린 작은 옥수수밭 끝에 참호를 팠고, 굶주리지 않아서 환영이다. 참호를 넓게 파고 이틀 동안 편하게 있었다. 확실한 엄폐를 만들려고 참호를 계속 깊게 파고 태양을 피하려 위장도 했다.
포격이 다시 시작하는데 본부 전령이 도착했다. 머리로 날아오는 포탄 휘파람이 들리자 주저 없이 우리 참호로 다이빙했다. 포탄은 우리 3~4m 앞에 떨어졌는데, 놀라운 은총으로 불발했다. 잠시 후 참호 반대편에 또 하나 떨어졌는데 역시 불발탄이었다.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지옥 같은 전투가 우리와 2마일 하류에서 벌어지면서 공중폭격까지 불렀다. 엔진이 네 개 달린 미군 폭격기 50대가 (리버레이터) 촘촘한 대형으로 날아와서 정글을 폭격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폭탄 담요가 내려오는 것 같았고,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거대 정글 구역이 그냥 날아갔다. 그 폭발 안에서 누가 살아서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히자 기관총을 다시 쏘기 시작한다. 우리 상상과 달리 놈들은 살아 있었다.
다음 날부터 만달레이로 진격을 시작했는데, 항상 그래왔듯 일본군 후위대와 만난다. 평지라서 그런지 놈들은 더 빨리 퇴각했고, 나무도 묘목만 드문드문할 정도로 벌판 지역이다. 우린 탱크까지 도달해 앞장세우기 시작했다.
난 탱크와 같이 가는 게 싫었다. 탱크는 항상 가장 강한 거점을 향하는 법이고, 그러면 놈들이 반자이 돌격으로 나온다. 폭약 꾸러미를 품고 탱크 밑으로 들어가 터트리려 한다. 탱크 밑에서 자기 몸과 함께 폭발시킨다. 게다가 탱크는 소리가 커서 주목을 끌 뿐더러, 탱크 옆에 있으면 어디서 날 쏘는지 소리가 안 들린다.
그렇게 만달레이로 향하고, 곧 함락시켜 고지들에 방어선을 축성했다. 일본군 벙커와 참호는 위장을 잘해서 – 그럴 때 탱크 지원이 정말 기뻤다. 우리가 만달레이 외곽에 도달했을 때 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다음 날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잇빨 주 : 영국군에게 tea란 정말...)
다시 남쪽 랑군을 향해 출발한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우린 비행장으로 갔다. 캘커타로 다시 간다는 거다. 미군 DC-3가 몇 대 있어 우린 올라탔다. 캘커타에 내려 트럭 타고 반델이란 도시로 간다. 왜 이런가 했더니, 우리가 바다에서 랑군으로 상륙한단다.
그 말 듣고 이제 드디어 다 죽는구나 생각했다. 일본놈들은 만달레이에서 랑군으로 후퇴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우리가 쐐기로 사용되는 것. 우린 캘커타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오른다. 닥쳐올 전투가 불안하다.
드디어 해안에 접근해 상륙하는데 적은 퇴각한 것 같다. 랑군으로 행군하는데 총소리 하나 없다. 무슨 이유인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다. 이후 몇 달 동안 정찰만 나가며 shut down된 정유소를 점검했다. 1942년 영국군이 후퇴할 때 못 쓰도록 망가트린 것이다. 우린 석유탱크 안의 질 좋은 파라핀 왁스를 긁어다 촛불로 썼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났다는 공식 선언이 나왔다. 민가에서 쌀로 만든 술로 이틀 동안 파티처럼 놀았다. 그러나 열기는 금방 식었다. 우린 바로 귀국할 줄 알았는데, 아닌 거다.
버마 철도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아군 포로들이 랑군으로 들어왔다. 걸어다니는 해골 같았고, 우린 수통부터 넘겼다.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났어도 모든 문제가 끝난 건 아니다. 버마는 3년 반 동안 일본에 점령당해 이상한 나라로 지냈고, 거기도 이제 인도와 다르지 않다. 열대성 폭염, 파리 모기, 이질과 말라리아. 몇 년을 적의 총알을 피해 운 좋게 살았지만, 재수 없으면 평시에도 병으로 죽는다.
정글에 남아 있는 일본놈들이 많아서 계속 정찰 나가고, 그놈들은 자기 국가가 항복했다는 걸 안 믿는다. 주둔과 정글 수색은 지루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마음이 똑같았다. “전쟁 끝나면 씨발, 배 타고 돌아가는 거 아니었냐고!”
난 인도와 버마에 3년 10개월 있었고, 드디어 배를 탄다. 프랑스 배를 타고 천천히 여행을 시작했다. 봄베이, 수에즈, 지브롤털, 마침내 사우스햄프톤. 영국 해안이 점점 가까워지며 기분 대단했다. 드디어 영국 땅을 밟는다.
배에서 내려 열차 타고 웨일즈 북부로 갔고, 새 군복과 휴가증과 여비와 급료를 받았다. 근 4년 만에 집으로 간다.
고향으로 가는 여행은 향수 어린 추억으로 가득 차고, 고향 마을이 가까워지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다시는 못 보리라 수없이 그리고 그렸던 바로 그곳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끝]
첫댓글 엄청난 고생
3년 10개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