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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토(京都)의 사명당 관련 유적
17시 5분경 버스에 올라 쿄토(京都)를 향해 출발하였다. 옛날 사명당과 조선통신사는 세토나이카이를 거쳐서 오사카까지 배로 와서 그 다음부터 육로로 교토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교통편이 사통팔달이다.
18시 10분 무렵 차가 밀려서 잠시 휴게소에서 10여분 쉬었다가 오사카를 통과하여 19시 10분경 교토에 들어와 ‘동사(東寺)’의 오층 목탑을 바라보면서 19시 25분경 맘모스 빌딩 주차장에 도착하여 그 건물 4층에 있는 다이쇼쿤(大將軍)식당에서 일본식 불고기인 야키니쿠(燒肉)로 포식을 하였다.
우리나라 식당에서 나오는 주물럭, 등심, 양 같은 것으로 나는 별 맛이 없는데 다른 일행들은 맛있다며 아주 좋아했다.
21시경 식당을 출발하여 약 25분 걸려서 교토역 바로 옆에 있는 10층의 ‘신미야고(新都)’ 호텔로 갔다. 방을 배정받아 232호실로 들어가니 숙소는 창문 바로 앞에 화단이 조성되어 있어 마치 1층인 것 같았다.
교토는 794년 수도가 된 이래 1868년 명치유신으로 천황이 도쿄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1,000여 년간 일본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그 문화적인 영향으로 교토는 일본에서 대학이 가장 많고, 오래된 도시임에도 주민은 의외로 젊은 층이 많다고 한다. 또 천년고도라 지하철을 만들지 않고 철로가 모두 지상에 있어 호텔 옆으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한다.
22시 20분경 일행 몇 분과 함께 철로 건너편에 있는 스이신(醉心)이라는 술집으로 가서 24시 15분경까지 일본 청주와 ‘샤와’라는 술을 시켜서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영업은 자정까지이고 주로 젊은이들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자정 약 30분전에 마지막 주문을 받고 그 후에는 술을 시켜도 주문을 받지 않아 야속하였다.
화려한 조명의 교토타워를 바라보며 돌아오는데 교토역 앞 육교 밑 양쪽으로 노숙자 20여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나라 지하철 노숙자의 선진국이 일본이란 말인가? 이 유서깊은 고도(古都) 교토에 노숙자라니···
기실 교토는 사명당이 여러 달 머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평화회담을 가지는 한편 문화계 인사들과 광범한 접촉을 하면서 민간외교를 펼쳤던 곳이다. 따라서 대사는 이 지역의 여러 곳에 족적을 남겼고 유묵도 상당 수 전한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의 뜻있는 관광을 기대하면서 잠을 청했다. TV는 요금을 주어야 볼 수가 있었다.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한 후시미성(伏見城)
6월 14일 일어나니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푸르러서 투명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햇빛은 너무도 강렬하여 햇살이 그대로 땅에 내리 꽂히는 듯하다. 도심인데도 덩치 큰 까마귀가 울면서 지나간다. 지난번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일본에는 유별나게 까마귀가 많다는 느낌이다.
호텔 지하 1층에서 일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약 10분 거리의 ‘동사(東寺)’로 갔다. 이 절은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총본산으로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우가이(空海)가 입교개종(立敎開宗)한 근본도량이라고 한다. 금당과 오층 목탑을 한바퀴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곳 관광은 교포인 재야 사학자 이용하씨가 담당해 주기로 하였다. 09시 5분경 호텔을 출발하여 약 25분 걸려 사명당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 전후처리를 위해 회담한 역사적 장소인 후시미(伏見)성으로 갔다.
후시미성 입구로 들어가는 길 좌우측과 성 주위는 온통 대나무가 울창하여 어떤 것은 둥치의 둘레가 50cm가 넘는 것도 있었다. ‘伏見桃山城’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문은 공사 중이라 폐쇄되어 버스에서 내려서 성의 외관을 둘러보고 북쪽에서 복원된 천수각을 바라보며 사진을 촬영하였다.
복원된 천수각은 다른 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까마귀만 그 옛날의 영화를 아쉬워하는 듯 까악까악 울면서 성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존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와에 금칠을 할 정도로 화려한 성이었고, 히데요시가 1598년 7월 19일 이곳에서 사망한 후 그의 가신인 이시다 미쓰나리 일파가 이 성에서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항전하다가 이에야스에게 퇴패당하면서 성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쿄토의 한 기업가가 약 30년 전에 이 성을 복원하여 운영하다가 작년에 경영이 어려워 포기하고 쿄토 시민들이 인수받아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사명당은 1605년 3월 초 이곳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와 회담을 하였다. 그 당시 이에야스는 자신은 임진 출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였다. 사실 그가 직접 직접 출병하지 않았으니 전쟁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없는 마당에 새 집권자가 된 이에야스로서는 전쟁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의 평화가 절실히 필요하여 이를 염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일본의 정세파악과 피로인(彼虜人) 쇄환(刷還)을 위한 일본 사행(使行)에 올라 일본 새 집권자의 평화의지를 확인한 다음 전쟁에서 피납된 무고한 동포를 데리고 오는 일에 온갖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회담결과 대사께서 400년 평화수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피로인 3,000여명을 쇄환하는 성과를 거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회담할 때 일본측의 막료는 도쿠가와 막부의 고문승려로 흑의(黑衣;僧服)의 재상으로 알려진 쇼타이(承兌)를 비롯한 교토오산(京都五山)의 승려들이었는데 대사는 막부의 외교승들을 상대로 ‘자신은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도탄에 빠진 피로인을 구제하러 왔다’고 하여 그들의 종교적 도덕심에 호소하였고 귀국 후에도 편지를 써서 포로의 송환을 촉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선(禪)에 뜻이 있어 대사에게 가르침을 구하므로 다음과 같은 선시(禪詩)를 지어주었으니 그 와중에도 최고권력자의 아들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일태는 공간이라 다함이 없고, 적지는 냄새가 없고 소리도 없다.
방금 듣고 왜 번거롭게 묻는가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나
(一太空間無盡藏 寂知無臭又無聲 只今聽說何煩問 雲在靑天水在甁)『四溟堂集』
09시 50분경 버스에 올라 교토 시내로 들어가 왼쪽으로 33칸에 불상이 안치된 일본 목조불상의 총보고로 불리는 ‘三十三間堂’을 바라보면서 10시 15분경 버스는 이총(耳塚·鼻塚) 옆에 도착하였다. 이총 부근에는 1969.4.12.에 사적으로 지정된 호코지(方廣寺)의 석축과 석탑이 있다.
나. 이총(耳塚)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
버스에서 내려서 약 10여m를 걸어가니 이총이 나왔다. 이총의 원래 명칭은 비총(鼻塚)이었으나 그 후 비총이라는 이름이 너무 야만적이어서 이총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이 전공(戰功)의 표식인 목 대신 조선군민남녀의 귀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이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으로 이곳에 매장되었으나 그후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묘를 만들고 비를 세워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것이 이 이총(비총)의 유래다.
무덤에는 약 2만명 분의 귀와 코가 매장되어 있는데 봉분 꼭대기에는 사리탑인 부도형식의 오륜석탑(五輪石塔)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1643년의 그림지도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행들은 무덤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하고, 무덤 위의 석탑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지금 임진·정유왜란으로 참혹한 고통을 당한 수많은 죄 없는 백성들의 역사 현장에 와 있는 것이니 분노와 슬픔의 감회가 없을 수 없다. 바로 무덤 속에서 선인들이 외치는 아비규환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 하다.
이와 같은 귀(코)무덤은 사실상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인데도 버젓이 남겨놓은 일본인의 심사가 궁금하다. 이것을 보면서 조상들의 위대함을 상기하려는 뜻인지 아니면 조선민중에게 속죄하려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10시 35분경 귀무덤 바로 앞에 있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로 갔다. 이곳 경내 한 귀퉁이에 공교롭게도 히데요시의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원래는 히데요리가 그 아비의 무덤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만들었으나 1600년경 히데요시의 가신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히데요리가 패사하면서 이에야스가 그 무덤을 없애고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준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무덤이 남아있는 것이 과분하다고 하겠다.
사명대사께서도 교토에서 히데요시가 사람죽이기를 가볍게 여겼다는 말을 듣고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 죽이면 남도 역시 제 아비 죽일 것인데, 어찌 자기 처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남의 아비 남의 형을 죽였던가?(殺人之父殺人兄 人亦還應殺爾兄 何乃不思反乎爾 殺人之父殺人兄)”라고 하여 그의 잔악한 행위가 결국 보복을 당하게 된다고 시로 비난하였다.
신사를 대강 둘러보고 경내에서 물을 한 잔 떠 마시고 나왔다. 신사의 담장 석축에 사용된 돌을 보니 가로 약 4m, 세로 약 2m로 원래의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은 명치시대 히데요시 가신의 후손들이 건립한 호국신사이다.
일본은 신사의 나라다. 전국에 약 8만여 개의 신사가 있고 그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 신사 3개소, 장보고(張保皐) 신사 3개소, 왕인(王仁) 신사 8개소, 의자왕(義慈王) 신사 1개소가 있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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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를 조망하기엔 정신이 너무 상가롭구나....! 여유로울때 다시 한번 정독을 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