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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서면 주민자치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영덕
산서의 세시 풍속
우리 지역은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을 본받아 학업을 권장하고 과실(過失)을 고쳐주며 선행(善行)을 포상하고 참 풍속상(風俗像)을 세우며 여자나 목동(牧童)도 틈틈이 노력하여 실행하는 안정된 생활을 닦아왔다. 상기와 같이 우리 고장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풍속(風俗)은 전통적인 기질의 응결(凝結)이며 지방의 맑고 밝은 풍토(風土)의 영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명절(名節)
1) 설 (元日,元朝)
음력 정월 초하룻날은 일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새옷을 입고 부모에게 신년세배를 드리고 선령(先靈)에 차례(茶禮)를 올리고 떡국을 끓여 먹으며 선산(先山)에 성묘(省墓)를 하고 난 후 마을 어른께도 세배를 한다.
2) 산서의 정월 대보름
일명 상원(上元)이라고도 하며 정월 15일을 큰 보름 이라고 했다. 이 명절은 다분히 기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행사가 다기도적 이었다. 이날의 모든 행사는 해가 뜨면 효험이 없다하여 첫 새벽부터 오곡(五穀) 으로 찰밥을 짓고 산야초(山野草)와 콩으로 만든 두부 및 김 등을 해뜨기 전에 먹는다. 또 한잔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해서 이명주(耳明酒)라는 술을 마시고, 부스럼을 깬다하여 생밤과 호두를 먹으며 복조리를 사서 문지방에 걸고 연날리기와 농악놀이를 한다.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순서
산서면 동화리 시장마을 행사
◎ 덕담
1.시장마을 노인회장 덕담
2.번영회장 덕담
3.면장 덕담
4.유관 단체장 덕담
5.이장 덕담
6. 산서면 시장마을 청년회장 덕담
◎ 제례
초헌관 : 노인회장,번영회장,이장
아현관 : 유관 기관장 및 사회단체장
종헌관 : 시장청년회장 및 청년회원, 부녀회원
◎ 달집태우기
불망치 : 시장 노인회장,번영회장,면장,기관단체장,이장,청년회장
3) 좀 볶는 날
음력 2월 1일로 농사절(農事節)이 시작 된다.하여 대청소를 하고 병충해를 불에 볶듯이 없앤다는 뜻에서 콩에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서 볶아 먹었다. 속칭 영등할미가 내려온다하여 무격(巫覡)을 통하여 영등제(靈登祭)를 하는 풍속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가고 없다.
4)삼월 삼짓날
음력 3월 3일은 상사일(上巳日)이라고 하는데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날이다. 진달래꽃을 따서 화전(花煎)을 지어 먹으며 쉬는 명절날로 되어 잇다.
5)한식(寒食)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며 청명(淸明)과 같은 날 들거나 하루 전후에 든다. 이때 묘제(墓祭)도 지내며 모든 귀신이 조회(照會)하러 하늘로 올라간다하며 사초(莎草)와 석물(石物)도 하고 있다.
6)초파일
음력 4월 초팔일은 석가탄신일이며 부녀자들이 사찰을 찾아 불공(佛供)을 드리는 날로 현재도 성행하고 있다. 1975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7)단오(端午)
음력 5월 5일을 단오(端午)라 한다. 농사의 풍작(豊作)을 기원하던 제렛날로 농촌의 명절이다.
8)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은 유두라 한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상(不詳)을 버린다는 풍속은 신리 때부터 내려 왔다하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9)칠석(七夕)
음력 7월 7일은 칠석이라 한다.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오작교(烏鵲橋)에서 만난다는 명절의 하나이며 서책(書冊)을 볕과 바람에 쪼이기도 하였다.
10)백중(伯中, 百鍾)
음력 7월 15일은 백중이라 한다. 이 때가 되면 초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며 농사진행(農事進行)상의 단계적인 한 행사이다. 불계에서는 이날을 ‘우라분’이라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여름 동안 안거(安居)를 마치고 대중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말하며 참회를 구하며 절에서 제를 올리기도 한다.
11)추석(秋夕,仲秋節)
음력 8월 15일을 추석 또는 가배(嘉俳)라 한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풍성한 명절(名節)이다. 신라의 가배로부터 유래하였으며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께 차례(茶禮)를 올리고 선산(先山)에 성묘(省墓)도 한다.
12)구일(九日,重陽節)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이라 한다. 선비들이 교외로 나가서 풍국(楓菊)놀이를 하는데 시인묵객(詩人墨客)은 시(詩)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하루를 즐긴다.
13)동지(冬至)
음력 11월은 양월(陽月) 또는 동짓달이라고 하며 22번째의 절후이다. 이날은 일년중 가장 일귀(日晷)가 짧고 이로부터 조금씩 일귀가 길어지는 고로 일양(一陽)이 시생(始生)이라 하여 신년의 원단(元旦)으로 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이날 마귀(魔鬼)를 쫓는다는 뜻에서 팥죽을 먹으며 집 곳곳에 팥죽을 뿌리기도 한다.
2.예의(禮儀)
1)결혼(結婚)
옛날에는 중매(仲媒)가 있어 궁합(宮合)을 보고 육례(六禮)를 갖추어 신부댁에서 혼례식을 올렸으나 최근에 오면서 거의 연애결혼이 많아지고 모든 의식도 간소화되어 사성(四星)과 혼서지(婚書紙)만 있을뿐이며 혼례식도 대부분 공휴일에 예식장에서 올린다. 초청장을 보내면 대부분 하객으로 참여 한다.
2)회갑(回甲)
예전에는 재력있고 팔자 좋은 사람이나 61세가 되는 생일에 잔치를 했으나 지금은 남녀간에 회갑때 잔치를 하지 않고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들만 행사를 진행하고 칠순이나 팔순 잔치를 행하는 경향이 많다.
3) 상례(喪禮)
지난날 사람이 죽으면 초혼(招魂), 수시(收屍), 소렴(小殮), 대렴(大斂),입관(入棺),성복(成服),혼백(魂帛),빈소(殯所),상복(喪服)등의 절차를 거쳐 대부분 10일 내지 5일장으로 하고 택지(擇地),발인(發靷),출상(出喪),천광(穿壙),하관(下官),성분(成墳),반혼(返魂)을 하고 삼우제(三虞祭),졸곡(卒哭),상식(上食),삭망(朔望), 그 후 1개월을 지나 담제(禫祭)를 지나 탈복 (脫服) 했다. 일제시대 이후로 점차 단상(短喪)하여 3일장으로 대부분 행하더니 1969년에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이 정해지고 1973년에 개정된 바 있으나 이 상례(喪禮)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였으며 지금은 49일 만에 탈복(脫服)해 버리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과거에는 부고(訃告)가 있어야 조문(弔問)을 했으나 지금은 부분의 주민이 자진 조의를 표하고 부의금(賻儀金)을 전하며 치상을 돕는 양속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3.제사(祭祀)
(1)기제(忌祭)
탈복 후부터 고조(高祖:4代祖)까지 해마다 사망했던 날에 모시는 제사로 속칭 방제사라고도 한다. 요즘에 와서는 부모만 기제사를 하고 조부모(祖父母)이상 고조부모(高祖父母)까지의 기제사(忌祭祀)를 새로 날짜를 정하여 지내는 집안이 늘어나고 있다.
(2)묘제(墓祭)
5대조 이상은 묘전(墓前)에서 지내는 제사로 매면 음력 10월이나 3월중에 지낸다.
요즘에는 묘소(墓所)를 관리 할 사람이 적어지고 묘전(墓前)까지 제수(祭需)를 운반하기 어려워 재실(齋室)에서 향사하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3)당산제(堂山祭)
마을 수호신이 있다는 당산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음력 1월초나 15일경에 재단을 마련해 놓고 유덕(有德)한 마을 어른들이 마을 길운을 기원하며 지내오다가 1950년대부터 행하지 않고 있다.
(4)평촌(坪村)마을 전체 천제
소재지 :평촌 합수천 제단
이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생기(生氣)나 복덕(福德)을 갖춘 2일을 선택하여 제관(祭官) 을 봉(奉)하고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목욕재계한 뒤에 계명축시(鷄鳴丑時)에 제사를 지내며 마을 주민은 특별히 이날에는 비린내나는 음식을 금하고 주민 전체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5) 시장 마을 당산제
소재지 :시장 동구나무 아래
1974년부터 시장의 번영회(繁榮會). 청년회(靑年會).부년회(婦女會).적십자회(赤十字會)가 주동이되어 매년 음력 3월 3일 오전 9시경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89년부터 청년회가 조직되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1994년 정주권사업으로 인하여 동구나무가 제거되므로 농협 동편 느티나무 아래서 제사를 지내고 잇다.
(6)기우제(祈雨祭)
가움이 계속되면 면에서 용두봉(龍頭峯)이나 영대산(靈臺山)영두골 돌에 새겨진 부처 앞이나 마치재 등 꼭대기에서 불을 피우고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사로 소머리나 염소를 제수(祭需)로 썼는데 신통하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 필덕제,장남제,오봉제 등의 수리시설이 확충되고 나서는 차차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4.산서의 전통 소리
노래를 부르며 논을매다가 한 논뱀이를 마지막 맬 때 매조지로 노래를 부르고 허리를 편다.
1)논매는 노래(Ⅱ)
에에야 에-흐-바-앙게 로다.
장수 원님은 곤달루쌈
남원 원님은 해우쌈
에에야 에- 흐 - 바-앙게로다.
일락서산에 해떨어지고
월출동녕(東嶺)에 달떠온다.
에이야 에 - 흐 -바-앙게로다.
이 논뱀이 어서매고
우수 달밤에 임찾아 가세
에에야 에 - 흐 -바-앙게로다.
저 너머 초당에 소첩을 두고
이거야 밤길 걷기 난감하네
에이야 에 - 흐 -바-앙게로다.
우 - 휘휘둘러 쌈들싸세.
(산서면 동화리 82세 장재호)
2) 상여 앞소리 (Ⅰ)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이제가면 언제오나
명년 춘삼월에 오실란가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높 떨어진 산산봉이
평지가 되면 오실란가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마두각 되면 오실란가
오두백 되면 오실란가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갈매기는 어디가고
물드나는지 모르는가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사공은 어디가고
배 떠난줄 모르는가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서리맞은 병든 잎은
바람 안불어도 떨어진다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노고지리 쉰질 뛴들
떠난봄이 다시오랴
어허넘 어허넘 어이가리 어허넘
(장수,산서,번암지역에서 많이 부른 민요)
3)상부 소리(喪輿歌)
어하 어하 허허 어허하
어이갈가 어허하
(이와같이 상여 앞 소리를 메기고 회심곡등을 부른뒤에 앞소리를 메긴다)
헤 - 으 헤헤 - 헤
남호(南昊) <관(棺)을 들때>
관아- 관을 내릴 때 (쉴 때)
(산서면 동화리 장제호)
4)궐마성 소리(가마 멜 때)
오헤 - 헤 - 에
수리수리 마수리 - 헤
( 네 패 조군이 사인교를 멜 때 앞소리군 둘, 뒷소리군 둘, 팔패가 되어 위에 있는것과 같이 궐마성 앞소리를 메긴다.)
5.산서의 문학(文學)
옛날부터 우리 고장에서는 저명한 유학자(儒學者)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준비에 몰두하여 학문과 문장에 여력이 적었는데 남긴 문집(文集)도 도중에 산실(散失)됨이 많았다. 현재에 와서도 문학을 전공하여 시집을 내거나 문학에 뜻을 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옛날 문집을 남긴 학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역대문집총람(歷代文集總攬)
。『유헌집(遊軒集』
휘는 황(煌)이요,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으로 창원 정씨이다. 「문집」6권, 「장행통고(壯行通考) 7권,「부훤록(負喧錄」10여권이 있고 사적(事蹟은 『유교편(儒敎篇』에 실려 있다. 영천서원(寧川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만헌집(晩軒集)』
휘는 염(焰)이요, 자는 군회(君晦),호는 만헌( 晩軒)으로 창원정씨이며 유헌문인(遊軒門人)이다. 사림이 현주사(玄洲飼)에 배향하였다.
。『송림유고보람(松林遺稿寶覽』3卷
휘는 양(爚)이여, 자는 백회(伯晦),호는 송림(松林)으로 창원정씨이며 유헌문인이다. 효우(孝友)가 특이하고 지조가 청개(淸介)하며 문장이 미극전포(未克展布)하였다.
。『만오유고(晩悟遺稿)』
휘는 원진(元震)이요,자는 이성(而省).호는 만오(晩悟)로 남양방씨이다. 사계응현(沙溪慇賢)의 손(孫)으로 백촌(白村) 장경세의 문인이다. 사적은 「가요편」에 실려 있다. 유고가 유실되었던 것을 징동혁 단국대 교수가 발굴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간행케 하였다. 1994년에 간행
。『활계집(活溪集)
휘는 대유요. 자는 경인(景引).호는 활계(活溪)로 경주 이씨로 종윤의 자로, 만헌의 문인이다.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사적은 「역대인물편」을 참조,『안사제당행장』과 「춘추향축문」을 지었다.
。『육졸문집(六拙文集)』
휘는 견(涀)이요, 자는 여활(汝活),호는 육졸(六拙)로 창원정씨이다. 덕행과 문장으로 현주사에 배향되었다.
。『담허재집(澹虛齋集)』
휘는 지백(之白)이요. 자는 자성(子成).호는 담허재로 부안 김씨이며 생원이다. 사적은 「역대인물편」에 실려 있다.
。『옥경헌유고(玉鏡軒遺稿』2권
휘는 복겸이요.자는 익재 (益哉).호는 옥경헌 관해군 정사생이며 흥덕 장씨이다. 유고 가운데 국문으로 지은 「고산별곡(孤山別曲」은 우리 고장의 자랑으로 「전북 문헌」에 발표한 바 있다. 옥경헌의 사적은 「가요편」에 실려 있다.
。『동림유고(東林遺稿』
휘는 이순(以恂)이요.자는 희지(熙之).호는 동림(東林)으로 명종 정묘생으로 경주 이씨이다. 활계,대유의 자이며. 사계문인으로 영천서원상량문을 지었다.
。『유계당유고(幽溪當遺稿)』3권
휘는 재흥이요. 자는 기여(起餘).호는 유계이며 창원정씨인데 수암 권상하 문인이며 호룡참봉을 지냈다.사적은 「유교편」에 실려 있다.
。『영료정문집(詠蓼亭文集)』2권
휘는 무(堥)요 .자는 여고(汝高).호는 영료집이며. 창원정씨이다. 문학과 행의가 향방에 견칭하다.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2권
휘는 후(垕)요. 자는 후숙.호는 문월당인데 창원정씨로 통정대부행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효우와 문학으로 저세(著世)하다.
。『허재문집(虛齋文集)』
휘는 석구(錫龜)요. 자는 우서. 호는 허재인데, 창원정씨이다. 여지독학하여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거오재집(據梧齋集)』
휘는 만용(曼容)이요. 자는 장경(長卿).호는 거오재인데, 제주양씨로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학포 팽손의 증손.충민공 산숙의 아들이다.
。『명은집(明隱集)』22권
휘는 수민(壽民). 자는 제옹.호는 명은. 부안김씨증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담허재 지백의 손이다.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만 전 생애를 바쳤으며 평생 흠모한 인물은 한의 엄준. 촉의 제갈량.당의 도연명. 우암 송시열이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많은 산수를 찾아다녔으며 가는 곳 마다 시를 남겼다.
。『완산세고(完山世稿)』
휘는 음희(應禧)요. 자는 자수(子綏).호는 옥담인데 전주이씨로 안양군의 후손이다. 광해시에 인목왕후 폐각의 의논이일자 백의로 항소하여 시시를 극진하고 과천에 퇴거하더니 조가에서 공의 학식이 고명함을 알아 누징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휘는 정우(挺宇)요. 자는 구이. 호는 만취당인데 인조 병오진사시에 합격하다.안양군의 후손으로 늦게 문사를 좋아하여 만취라 자호하였다.
휘는 사영(思永)이요. 자는 공효. 호는 정재인데 영조 무신생으로 정규의 증손이다. 효행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다.
。『반계문집(盤溪文集)』
휘는 상규(尙圭)요 자는 윤성.호는 반계인데 순조 무자생으로 창원정씨이다. 궁경하고 독학하며 지조가 청개하며 계상에 축정하여 둔세 하였다.
。『제암유고(梯菴遺稿)』3권
휘는 설상(說相)이요. 자는 국경(國卿),호는 제암(梯菴)인데 순조 기축생으로 창원정씨(昌原丁氏)이다. 행의금부사(行義禁府事)를 지냈고, 기매(氣邁)가 소월(疏越)하고 문학이 저세(著世)하였다.
。『남호유고(南湖遺稿)』
휘는 극홍(克洪), 자는 대경(大卿). 호는 남호(南湖), 헌종 병신생으로 창원정씨(昌原丁氏)이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굉유(宏儒)라 하였다.
。『야옹유고(野翁遺稿)』3권
휘는 윤수(潤壽)요, 자는 덕일(德一), 호는 야옹(野翁)인데 헌종 기유생으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성재(性齋) 허부(許傅)의 문인이며 천리(踐履)가 독실(篤實)하고 조예(造詣)가 정수(精遂)하야 향당(鄕黨)이 긍식(矜式)하였다.
。『서초유고(瑞樵遺稿)』2권
휘는 희석(熙奭)이요, 자는 주보(周輔), 호는 서초(瑞樵)인데 순조 경진생으로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일책이소(一策二疏)가 있으며 대동엄동(大冬嚴冬)에 송죽(松竹)이 독수(獨秀)와 같다 하였다.
。『용암유고(龍菴遺稿)』
휘는 제현(霽鉉)이요, 자는 우적(禹績. 호는 용암(龍菴)인데 영조 갑신생으로 성균진사(成均進士)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천품(天稟)이 괴오(魁梧)하고 사친(事親)이 효(孝)하니 남사(南士)의 망(望)이 되었다.
。『월정유고(月亭遺稿)』1권
휘는 교영(敎永)이요, 자는 도경(道敬), 호는 월정(月亭)인데, 철종 병진생으로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천품(天稟)이 고결(高潔)하고 문사(文詞)가 웅박(雄博)하야 사림이 긍식(矜式)하였다.
。『소산유고(小山遺稿)』1권
휘는 대식(大湜)이요. 자는 희일(希一), 호는 소산(小山)인데 창원정씨(昌原丁氏)로 철종 정사생이다. 조이문학(早以文學)으로 견칭(見稱)하였다.
。『청연재유집(靑蓮齋遺集)』3권
휘는 진규(晉奎)요, 자는 평중(平仲), 호는 청연재(靑蓮齋)인데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철종 경신생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대학문답(大學問答)」「중용문답(中庸問答)」「산수(算數)」「경권(經權)」「봉록(俸祿)」등 10여책(策)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사적은「유교편」에 실려 있다.
。『묵재문집(默齋文集)』3권
휘는 정중(定中)이요, 자는 치능(致能), 호는 묵재(默齋)로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사적은「비(碑)편」에 실려 있다.
。『서산유고(西山遺稿)』1권
휘는 풍호(灃鎬)요, 자는 순필(舜弼), 호는 서산(西山)인데 고종 정묘생으로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조선오백년약사(朝鮮五百年略史)』등이 있다. 성품(性稟)이 고결(高潔)하고 조예(造詣)가 심수(深邃)하였다.
。『서곡유고(瑞谷遺稿)』
휘는 근호(根鎬)요, 자는 윤무(允武), 호는 서곡(瑞谷)인데 고종 정묘생으로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천품(天稟)이 영오 하고 지신(持身)이 아칙(雅飭)하며 장어문사(長於文詞)하였다.
。『시당유고(時當遺稿)』1권
휘는 한응(漢膺)이요, 자는 사유(士裕), 호는 시당(時堂)인데 고종 임인생으로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재예(才藝)가 총명하고 시문(詩文)이 고상(高尙)하야 백일장(白日場)에 입선(入選)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죽천유고(竹泉遺稿)』1권
휘는 봉규(鳳奎)요, 자는 경의(敬儀), 호는 죽천(竹泉)인데 고종 기축생으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청연재(靑蓮齋) 권진규(權晉奎)의 문인으로 효우돈목(孝友敦睦)하고 다계후진(多啓後進)하였다.
。『경석시집(耕石詩集)』
휘는 한섭(漢燮)요, 자는 사량(士亮), 호는 경석(耕石)인데 전의이씨(全義李氏)이고 고종 신축생으로 현감엽(縣監燁)의 후손이며 전간재(田艮齋)문생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어 향리(鄕里)가 칭송(稱頌)하고 위학(僞學)에 성리(性理)의 오지(奧旨)를 얻었다.
。『송오시집(松塢詩集)』
휘는 한수(漢秀)요, 자는 여화(汝華), 호는 송오(松塢)인데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고종 기해생이다. 현감(縣監) 엽(燁)의 후손으로 성자(性資)가 강직(剛直)하며 선훈(先訓)을 극승(克承)하고 경전을 궁구(窮究)하며 교자이의(敎子以義)하고 교우이신(交友以信)하며 효제(孝悌)를 돈행(敦行)하였다.
。『일산실기(逸山實記)』
휘는 창옥(昌玉)이요, 자는 금룡(金龍), 호는 일산(逸山)인데 안동권씨(安東權氏으로 고종 계묘생이다. 청연재(靑蓮齋) 진규(晉奎)의 아들이며, 지기(志氣)가 견고하고 향사가 과단(果斷)하여 수립(樹立)한 바가 많고 효우가 승범(承範)하고 행의(行誼)가 유독(愈篤)하여 세인(世人)의 칭송한 바 되었다.
。『심연유고(心淵遺稿)』
휘는 성일(成鎰)이요, 자는 국현(國賢), 호는 심연(心淵)으로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고종 임오생이며, 산서(山西)경남(慶南)의 후손이다.
。『동은유고(東隱遺稿)』
휘는 병수(秉壽)요, 자는 경욱(敬勗), 호는 동은(東隱)으로 광주이씨(光州李氏)이다. 고종 걔미생이며, 동고(東皐) 준경(浚慶)의 후손이다.
。『영산유고(寧山遺稿)』
휘는 상현(常鉉)이요, 자는 윤오(允五), 호는 영산(寧山)인데 고종 무자생으로 창원정씨(昌原丁氏)이다. 간재(奸才) 전우(田愚) 문인으로 문장과 행의(行誼)가 남주(南州)에 명중(名重)하였다.
。『벽송시집(碧松詩集)』
휘는 상길(相吉)이요, 자는 명국(明國), 호는 벽송(碧松)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효행이 있었다.
。『두남유고(斗南遺稿)』
휘는 병태(秉台)이요, 자는 경두(擎斗), 호는 두남(斗南)으로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청연재(靑蓮齋) 권진규(權晉奎의 문인(文人) 사적은「비(碑)편」에 실려 있다.
。『동은시집(桐隱詩集)』
휘는 상원(相元)이요, 자는 인국(仁國), 호는 상은(相隱)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동곡문고(東谷文稿)』2卷
휘는 종묵(鍾默)이요, 호는 동곡(東谷)으로 광주안씨(光州安氏)이다. 사적은「비편(碑篇)」에 실려 있다.
2) 예술(藝術)
동양에서는 문자)文字)가 제정되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법(書法)을 교육의 시초로 삼았고 또 지(智),덕(德),체(體)가 종합된 것으로 교육과는 불리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육예(六藝)중의 하나로 한문 전성시대에는 누구나 익혀야 하고 써야 했으며, 오늘에 와서도 서예인구가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산서면은 예부터 예향(藝鄕)의 정기를 받아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이수형(李壽馨)
자는 성무(性茂)요, 호는 동양(東暘), 관향은 재령(載寧)이니 고종(高宗)6년(1869)에 출생하였다. 학뭉과 행의(行誼)가 출중(出衆)하고 서예는 호남의 명필로 저명하였다. 그의 필법(筆法)은 선친인 경인(耕人) 재옥(在玉)에게 받았으며 현재 남원(南原) 양사재현판(養士齋縣板). 주련(柱聯),남원향교사적비(南原鄕校史蹟碑),사마재(司馬齋)의 ‘禮俗相交 德業相勸 患難相恤 過失相規’ 등이 모두 경인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양재형(梁在瀅)
자는 자윤(子允), 호는 청사(晴蓑)이며 관은 남원(南原)이니 고종 9년(1871)에 산서면 신창리에서 출생하였다. 시에 능하여 황매천(黃梅泉)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조병로(曺秉魯)
자는 공숙(公淑), 호는 동호(東湖)이며 창녕(昌寧)이다. 산서면 동화리에서 출생하였다. 시서에 능하며 그 시 가운데 전해산만장(全海山輓章)이 유명 한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잇다.
。육종진(陸鍾塡)
자는 경태(敬泰), 호는 원산(元山)이요, 관은 옥천(沃川)이니 산서면 마하리 원흥부락에서 출생했다. 제5회 동남아현대대전(東南亞現代大展)에서 입선하고 제 1회 동아미술대전(東亞美術大展)에 특선하였다. 한시(漢詩)에 능하여 명성이 있다.
。이규진(李圭鎭)
호는 소남(素南), 관은 경주이고 산서면 이룡리에 거주 하였다. 국전(國展)에 누차 입선되었다.
3)산서면의 가요(歌謠)
연대나 작가는 모르지만 , 우리 고장에서 생겨나 우리 고장 사람만의 감정을 담은 우리 고장의 민요는 우리 고장만이 공감 할 수 있는 보배요, 재산이다. 생활이 복잡해지고 문명의 이기(利器)가 들어오면서 정서적이고 아름다운 우리 민요가 어느새 망각되어 버렸다.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부르던 소중한 민요를 다시 찾아 후세에 전하고자 하나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기록치 못하고 지금으로부터 300년이 된 방원진(房元震) 만오(晩悟)의 『애련곡(愛蓮曲)』 과 장옥경(張玉鏡)의 『불고정별곡(不孤亭別曲)』10절을 모아 정리하였고, 광복후의 경우는 우리면의 교가(校歌) 및 방위대가(防衛隊歌)만을 적었다.
(1)『애련곡(愛蓮曲)』 3첩(疊)
선조 10년 (1577)에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휘는 원진(元震), 자는 이성(而省), 호는 만오(晩悟)이며, 성은 방씨(房氏)로 관은 남양(南陽)이다. 사계(沙溪) 응현(應賢)의 손(孫)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찰방(察訪)이 되었다. 임진왜란 청계(淸溪) 양대박(梁大樸)과 함께 소 수십 두를 잡아 호군(犒軍)을 하고 적개장(敵愾將) 변사정(邊士貞)을 좇아 의려(義旅)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에는 노령(老齡)으로 행재(行在)에 치부(馳赴)하였다가 성하(城下)의 맹(盟)을 듣고 돌아왔다. 공은 매일 밤이면 시 읊기를 하였는데 『애련곡(愛蓮曲)』은 인조 16년(1638) 여름에 만오재(晩悟齋)를 세운 기쁨을 읊었으며 연(蓮)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읊었다. 1996년 9월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에서 남원 교룡산 국민관광단지 안에 『애련곡(愛蓮曲)』을 새겨 비를 세웠다. 문학비(文學碑) 건립을 주선한 본손 방극순(房極淳)이 이 고장 사람이므로 이에 기록 한다.
대집 三間을 짓고 못파 蓮을 심거
수엽경옥의 만향이 어릔저긔
거믄고 한닙 소리를 알리 업서 하노라
연화이오 또 연화를 다시곰 것거주여
주렴계 애연설을 맛드려 닐러보니
천고애 가업슨 뜻을 알리 져거 하노라
茂叔을 꿈에 맛나 愛蓮說을 물엉보니
적막천년에 내뜻을 뉘 아더니
맛초와 君子를 맛나니 내 뜻알가 하노라
(2)고산별곡(孤山別曲)
광해국 9년(1617)에 내진전방 대창부락에서 출생하였다. 성은 장(張), 휘는 복겸(復謙)이요. 관은 흥성(興城)이며 자는 익재(益哉).호는 옥경헌(玉鏡軒)인데 장사랑(張仕郞) 첨(瞻)의 아들이다. 타고난 천품이 탁이(卓異)하여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집앞 동매 고산(孤山)위에 불고정(不孤亭)을 짓고 시주(詩酒)로 자락(自樂)하고 지방의 벗들과 시회(詩會)를 즐겼다. 이 때 우국병속(憂國病俗)의 뜻을 담은 『고산별곡(孤山別曲)』10장을 지어 술이 취하면 몇몇 동자(童子)를 시켜 노래케 하였는데 대부분 참신한 내용의 시 조작품으로서 가치를 부여받을 만하다.
靑山은 에워들고 綠水는 도라가고 夕陽이 거들 때에 新月이 소사난다.一樽酒가지고
시름프자 하노라.
山林의 늘근 몸이 詩酒에 病이 되니 안자면 萾을 치고 醉하면 붓을 잡나니 밧긔티 나른
人事는 全來全來하노라.
江山에 눈이닉고 世路에 낫치서니 뉘 門의 이 허리굽닐손고一樽酒 三尺琴가지고
百年消日하리라.
내 말도 남이마소 남의 말도 내 아난니 孤山不孤亭의 조히 늙은 몸이로쇠 忘侫의 손이
검다 세다 하나니
玉鏡軒 잠을 깨어 娕姀仰壯안니다가 靑溪石훗드대여 不孤亭을 올라가니 아해야 一壼酒가지고 날을 차자 오너라.
엇긔제비 존술이다만 세 㽍뿐이로다 한 㽍은 물의 놀고 또 한병은 뫼희노셔 이밧긔 나문 㽍 가지고 달의 논들 엇더리
生涯도 苦楚하고 世味도 淡泊하다 읜 술 한두 잔의 프른 글귀 뿐이로쇠 玉鏡軒이 平生 行狀이밧긔난 업세라
人生이 百年內 優患에 싸여스니 萾잡고 웃는날이 한달의 몃적일고 술두고 벗만는 날이야아니 놀고어이리
七絃이 冷冷 하니 마 소래난 잇다마는 鍾期를 못맛나니 이 曲調게 뉘알이 蒼空의 一輪明月이 내 버진가하노라
국 安酒깁픈 萾은 座上 긔나소오고 노래 춤댱고붑픈저므니 맛겨두고 아히야 조히 붓먹 드려라 聯句한작 하옵새(이 별곡은 원문 그대로 임)
(3)교 가
(가) 산서초등학교가
영대산 허리띠를 휘감은 터에 / 슬기로운 새싹들이 다 함께 모여 / 아침마다 상냥하게 인사하면서 / 서로 돕고 사랑하며 예절바르게 / 스스로 일하면서 배우는 우리 /
튼튼하고 부지런한 산서 어린이
(나) 산서중학교가
영대산 정기따라 타고난 우리 / 큰 꿈을 간직하고 모여든 전당 /늠름한 기상과 지혜를 닦아
영원히 빛내리 산서중학교
(다)산서고등학교가
① 영대산 정기 받아 태어난 우리 / 태양보다 뜨거운 빛난 슬기로/ 진리를 탐구하는 산서고교생/ 성실한 배움으로 자랑 삼으리
② 긍지와 자율 속에 배우는 우리/ 청운의 꿈 가슴에 고이 지니고/ 언제나 쉬지 않는 산서고교생/ 인류에 길이길이 빛을 밝히리
(라)계월국교 교가
팔공산 정기 뻗은 사계봉 밑에 / 지금당 옛 배움터 길이 이어서 / 그 반석 자리잡고 나아갈 우리 / 명예와 자랑이 함께 뭉치어 /영원토록 이어나갈 계월 글 동산
(마) 성계 국교 교가
건지산 맑은 정기 담마다 쌓고 / 사슬정 터를 닦아 새길을 여니 / 배움의 새깃달고 날개를 편다/ 우리의 꿈동산 성계국교
(바) 산서면 향토방위가
영대산 높이 솟아 길이 지키고 / 동화수와 쌍룡수 흘러 있는 곳 / 생존 자유 얻기 위한 산서면 /장하고도 씩씩하게 피어 있도다/ 우리들은 산서면 대중 앞에서/힘있게 걷고 있는산서방위대
6.전설(傳說)
1)암행정(暗行亭)거리
하월리 신등거리 남쪽 200m 지점에 남원에서 보절과 봉서리 고산마을을 지나 임실군 지사로 통하는 놀로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 길이 삼남대로였으며 산모퉁이에 암행정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때에는 이 지역은 거령현에 속했으며 현은 지금의 지사면 영천리 마을이었다. 600여년전의 일이다. 거령현은 전답이 비옥하고 인심이 순후해서 백성들은 격양가를 부르며 요순시대를 부러워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난데없이 천하에 못된 현감이 거령현에 부임하여 매일 같이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고 선량한 사람을 잡아다 착실하게 모은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곤장을 쳐서 내 쫓는 등 학정을 일삼아 치부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산해진미에 기녀들과 노닥거리느라 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못된 것으로 날을 보내기가 일쑤여서 이웃고을까지 탐관오리의 표본으로 널리 소문이 났다. 백성들은 현감이 망하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던 어느날 동현에서는 현감의 생일날이랍시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고량진미를 차려놓고 육방관속과 관기들의 헌작을 받으며 초라하지만 빛나는 눈이 범상치 않은 과객이 나타나서 현감의 생일잔치에 술 한잔 신세지기를 청하지 주기가 거나해진 현감은 주흥을 깨뜨린 거지에게 호통을 쳐서 대문 밖으로 내쫓은 다음 술상을 정돈하여 새로이 주흥을 돋우려는 순간 대문 밖에서 “암행어사 출두야!”라는 소리와 함께 기절초풍한 현감은 맨발로 뒷문을 차고 도망가다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산모퉁이 였다. 그 곳에서 현감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에 대한 벌받을 것을 생각한 나머지 현청으로 돌아가서 지난 잘못을 참회하자 어사는 잘못을 회개하는 현감을 관대히 용서하고 떠났다. 그 뒤에 현감은 도망가다 뉘우친 산모퉁이에 암행정을 지은 다음 사흘이 멀다하고 그 곳을 찾아 선정의 길을 다졌다. 지금은 지나간 세월 속에 정(亭)은 없어지고 암행정 거리라는 이름만 전한다. [『長水郡誌』, 제보자 李一珩)
2)괴정(槐亭)의 숲거리
면소재지에서 장수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면 마을 앞 도로변에 100여년 묵은 숲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의 일이다. 괴정의 숲거리에는 커다란 무덤이 있었는데 뜬소문에는 오래 전 민란때 죽은 많은 시체를 한 군데 끌어다가 묻은 분묘라고도 했으나 아무런 정확한 내력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무렵 나라에는 정치가 어지럽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민생은 도탄에 빠진데다 괴질마저 만연하여 민심은 흉흉한 터라 사람들은 그 무엇인가에 괴변의 트집을 연결하려 했다. 이 곳 주민들도 이런 불안한 일들이 일어난것은 다 무덤 때문이라며 탓을 무덤에 돌렸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해쳤다. 아뿔싸 어찌하면 좋을고 ? 괴변이 없어지기는 커녕 어이 없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 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 사방에서 원귀의 울부잦는 처절한 소리가 들려와서 사람들은 문을 틀어 닫고 방안에서 벌벌 떨어야 했다. 대낮에도 도깨비가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등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주민들은 무서워서 이 곳을 떠날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시주차 이 곳에 들러서 하는 말이 “소승이 저쪽에서 보니까 이 곳에 원기의 살기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원귀를 달래지 않으면 사람이 죽고 마을이 폐허가 된다." 하고 파헤친 무덤자리를 가리키면서 ”저 곳에 정자나무를 여러 주 심고. 진혼제(鎭魂祭)를 지내주시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 졌다. 스님의 말에 사람들은 처음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다른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촌각을 다투어 그 자리에 나무를 심고 정성을 다하여 진혼제를 지냈다. 그 뒤부터 괴성과 괴변은 자취를 감추고 시화연풍해서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 그 때 심은 정자나무도 무성한 숲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는데 100여년 전에 느닷없이 벼락을 맞아 윗둥지가 말라 죽었으나 뿌리에서 새순이 돋아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울창한 숲은 오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1976년에 이 곳에 3.1운동 만세 기념비를 세워 유적지가 되어 있다.
[『長水郡誌』제보자 張潸浩]
(3) 말무덤과 말굽자국
산서에서 임실군 성수면으로 통하는 도로로 1Km쯤 가면 오산리가 있고 오산리에서 서쪽으로 1Km쯤 가면 오산리 암가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뒷동산에 나무와 잡초에 덮인 무덤이 있는데 말 무덤이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일이다, 이 장군(李將軍)이라는 분이 싸움터에 나가 외병을 무찌르다 부상을 당하여 이 곳 오산리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요양하는 도중에 상처가 아물자 다시 출전하기 위하여 말타기. 활쏘기와 창쓰기 등 용병술을 익히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타고 연습장에 나갔다가 말을 달리며 칼과 창을 쓰는법, 활쏘아 적중시키는 법 등을 연습하고 잇었다. 그 과정에서 말에서 화살을 당김과 동시에 말을 달려 화살이 표적에 꽂힐 무렵이나 그 직전에 표적에 도착. 화살을 물고 오게 하는 용마로을 닦는 연습을 수 없이 되풀이했다. 석양이 되어 이장군은 마지막으로 화살을 당겼다 말도 번개처럼 달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저쪽에서 말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땀을 흘리며 화살을 물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오지 않는가 ! 이 순간 이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 처럼 쉽게 지쳐서 화살을 놓쳐버리는 약하고 둔한 말은 과연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에 손이 닿기가 무섭게 말의 목이 땅에 뒹굴었다. 그런데 아뿔싸 ! 이게 웬일인가 ? 말의 목에 화살이 꽃혀 있지 않은가 ! 먼저 달려간 말이 뒤에오는 화살을 입에 문다는 것이 입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장군은 자기가 경솔하였음을 크게 뉘우치고 불쌍하게 간 명마의 무덥을 그 자리에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말무덤 북쪽 1Km쯤 되는 곳 . 장군바위에는 말발굽 흔적이 있는데 이 용마의 말발굽 자국이라 한다. [『長水郡誌』제보자 權光玉]
4)원흥사의 미륵석불
산서에서 장수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3Km쯤 가면 원흥 마을이 보인다. 마을 아래편 산기슭에 원흥사가 있는데 법당복판에 높이 4m, 둘레 3m의 정교하게 조각된 미륵석불 입상이 안치되어 있다. 100여년 전만 해도 삼국시대의 조각불상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이 현 위치인 밭 가운데 노천에 외로이 서 있었고, 그 훨씬 앞에는 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이 무렵에는 풍마우습(風磨雨習)된 석불을 가려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원흥마을에 화웅처사(化雄處士)와 부인 허씨가 가난하지만 천심으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미륵부처가 석연히 나타나서 “내가 오랫동안 헐벗고 비 바람에 씻기니 괴롭구나 !움막이라도 좋으니 몸을 가려다오. 그러면 너는 생불이 될 것이다.”하며 부처는 사라지고 깨어보니 꿈이 었다. 생각 할수록 기이한 꿈이어서 허씨부인은 날이 새기가 바쁘게 석불이 서 있는 밭으로 달려깄다. 꿈에 본 미륵불이 분명했다. 부인은 그 자리에 엎드려 합장하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불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허씨는 남편과 상의한 후 집짓는 일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시주하는 이가 없어 역사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초라하지만 법당을 마련한 뒤부터 미륵부처의 영험이 일심으로 지성하는 허씨부인을 통해서 주변에 알려졌으며 부인은 운선(雲仙)이란 법호를 얻었는데 하도 정성이 지극하여 사람들은 살아 있는 미륵부처라고 불렀다고 한다. [『長水郡誌』]
5)서초정(瑞草井)
쌍계리 마평(馬坪)마을 뒤편에 이름난 샘이 있다. 특징은 동온하량(冬溫夏凉)하고 홍수대한(洪水大旱)에도 수량이 불변하고 사시청정하야 수질이 양호한지라 기록에 의하면 착정(鑿井)한 연대는 약 150년 전으로 추정된다. 마을 앞에 공동우물이 있으나 객수(客水)의 침입으로 식수(食水)가 부적합하자 이 마을에사는 이서초(李瑞樵)옹이 좋은 수맥(水脈)을 탐색하여 현 위치를 점치고 착정(鑿井)한즉 지하수 용출하였다. 글을 지어 축원하던 중 오색무지개가 반원형(半圓形)으로 뻗쳐 나타나니 신비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서초정(瑞憔井)이라 하고 있다. (제보자 李庚根)
6)미륵암(彌勒庵)
산서면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임실군 성수면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2Km지점의 초장마을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영대산 (靈臺山) 송림 사이에 미륵암 칠령사가 있다.
100여 년 전 조선조 말기 고종 때의 일이다. 오산마을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로 남녀노유(男女老幼) 많은 사람들이 앓아눕게 되어 마을은 온통 근심에 싸이고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다. 이 때 이 마을에는 슬하에 혈육 하나 없이 가난하지만 천심으로 목수일일 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외로운 노인 한분이 살았는데 어느 날 땔나무를 마련하기 위하여 영대산 송림으로 갔다. 노을 지는 석양에 어께가 무겁도록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다 차일바위에서 쉬면서 땀을 닦고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사이에 피로가 겹쳐 살며시 잠이 들었다. 그러자 하얀 수엽을 길게 드리운 홍안백발의 비범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너는 마을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어찌하여 낮잠만 자고 잇느냐? 급히 약을 가지고 가서 불쌍한 마을 사람들을 구하도록 하라”하며 빨간 열매가 달린 풀을 주는 것이었다. 노인은 깜짝 놀라 깨어보니 눈앞에 조그마한 돌부처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빨간 열매가 열린 풀이 깔려 있지 않은가 ! 노인은 황급히 부처에게 절을 하고 옆에 깔려 있는 꿈에 얻었던 것과 같은 풀을 뜯어 부랴부랴 마을로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환자들에게 먹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약을 복용하자 바로 조금씩 차도가 있더니 며칠 만에 괴질을 앓던 마을 사람들이 쾌차하게 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미륵부처님이 노인으로 하여금 마을을 구하게 하신 것이라며 부처님의 영험에 경탄했다. 노인은 마을사람들과 할메 돌부처로 현신해서 약을 주었던 영대 산 송림으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도 돌부처도 빨간 풀도 없고 반반한 바위가 박혀 있었다. 노인은 이 바위를 기반으로 삼고 마을 사람들의 협조 하에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미륵 암 이라 불렀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암자가 퇴락해서 1977년에 새로 미륵암에 올려 하게 들리는 듯하다.
[ 『長水郡誌』제보자 權興玉]
7)휴정(休亭)
마평 부락 상단에 있는 휴식처로 지역이 높아 경관이 화려하고 시원하다. 마치령을 넘어 산하에 임한 곳이라 뒷산의 울창한 숲이며 6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의 우산처럼 펼쳐 있는 그늘이며 계곡에서 흐르는 석간수 소리에는 영호남을 왕래하는 묵객과 행상인이며 시초를 구하여 귀가하는 초부, 목동 까지도 멈추어 휴식하고 정담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옛날부터 이곳을 휴정이라 불려왔다.
또 매년 추석 전 좋은 날을 가려 12마을 주민들이 이 곳에 모여 초로를 보수하고 농사정보를 교환하며 풍년을 기원하고 우정을 나누어 화합을 다짐하던 곳이다. 1985년 산서-번암 사이 포장도로가 개통되고 문명의 혜택을 받아 시초가 필요없이 되자 옛날의 미풍양속이 사라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