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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포럼 영산강유역 유적 답사 후기
일정 : 2011. 8. 27.(토) 07:40~22:54
아리랑포럼이 창립된 이래 처음으로 국내 유적지 현장답사를 간다는 사실에 설레는 마음과 무사히 마무리 되어야 한다는 우려의 마음, 아침 일찍 출발하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겹쳐 전날 잠을 설치고 새벽 5시30분에 기상하여 우선 인근에 사시는 최민경 간사님께 문자를 드리고, 잠시 후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출발하는데 카메라 충전이 되지 않았으니 준비좀 해 오라고...
부지런히 씻고 간단한 소지품을 챙겨 석계역에서 06:15 최간사님을 만나 곧바로 용산행에 몸을 실었다. 토요 휴무에 이른 아침인데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영산강 유역인 나주까지 ktx로 여행한다는 것이 못내 생소하고, 처음 있는 일이라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용산역에 도착 하니 출발시간을 30분 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신현태 원장님께서 사모님과 함께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고, 이후 회장님과 이원주 선생님, 김동근 약사님, 김윤태 사장님을 만나 8명의 회원이 7시20분 출발 나주행 Ktx에 몸을 실었고, 유윤 사장님은 천안역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당초 동반석 3세트 12좌석을 예약하여 12분이 함께할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등으로 참석하지 못해 1세트 동반석을 취소하고, 다시 일반석 하나를 발권하고, 간단한 먹거리를 준비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하였다.
과연 Ktx 답게 용산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안역에 도착하였고, 유윤 사장님이 합류하자 담소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난생 처음 타보는 호남선 열차에서의 바깥 풍경은 경부선이나 영동선이 산골 사이로 수차례긴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과는 달리 대체로 평지와 낮은 산들로 분위기가 사뭇 달랐고, 막연히 충청이나 호남지방은 부여와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유적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과연 영산강 유역에는 어떠한 모습의 유적이 있을지도 궁금하고 기대되었다.
오전 10시 14분경 나주역에 도착하니, 김상선생님께서 24인승 미니버스를 준비하여 맞이해 주셨고, 인근 담양에서 한의원을 운영하시는 선종욱 원장님도 동참하시어 처음 뵙게 되었다.
나주 땅을 대부분 처음 밟아보는 회원들은 버스에 몸을 싣고 김상선생님으로부터 영산강 유역의 고분은 BC2세기 경부터 시작하여 6세기까지 지역 토착세력인 사씨와 목씨,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온 부여씨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작은 도자기를 무덤에 함께 매장하다가 도자기를 관으로 사용하는 옹관묘로 발전하였었으며, 대부분이 집단무덤이고(그래서 봉분이 산봉오리와 같이 큼), 기존 무덤에 연장하여 매장한 관계로 정형적인 모습이 없는 점 등의 특성이 있는데, 일제시대 일본에 의하여 대부분 발굴되어 그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등 종합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첫 답사지인 옥야리 고분군에 도착하였다.
당초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가 오지 않고 오히려 햇빛이 나 무더운 날씨여서, 가는 도중 농협마트에 들러 물과 과자를 간단히 준비하였다.
옥야리 마한문화공원은 안내소 격인 월지관이 있고 그 내부에는 인근 고분군의 종합안내 조형물과 현황판, 그리고 홍보영상 상영관이 있었고, 몽전(夢殿)(남해 해신이 현종에게 준 암시를 영암군민에게도 주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이름지어졌다고 함), 그 내부에는 내동리 초분골 고분의 발굴 과정과 우리나라 묘제의 변천을 소개하고 있었으며, 발굴과정 고분의 모형을 그대로 만들어 놓고 학생들을 위한 발굴 체험장도 있었지만,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는 우리 외에는 다른 방문객이 없었다.
옥야리 고분은 3~4C 무덤으로 추정되며, 도자기를 함께 매장하였으나, 금동관은 함께 매장하지 않았고(원래 백제의 왕은 금동관을 쓰지 않았다고 함), 내부 매장물은 대부분 도굴되고, 외부 봉분만 남아 있는데 봉분 내부에는 황토칠을 해 놓았다고 하며, 외부 형태는 주구묘로 봉분 외곽에 일정한 넓이와 깊이의 도랑을 파고 외벽에 항아리를 묻어 경계를 표시한 후 도랑에 물을 채워 죽음과 삶의 경계 내지는 봉분에 쉽게 접근할 없게 하였던 흔적이 보였다.
신라 경주의 내물왕 또는 눌지왕의 분묘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의 봉분이 산처럼 커다란 반면, 옥야리 고분은 그보다는 훨씬 적은 크기였으며, 호남에서 제일 큰 고분은 해남의 장고산 고분으로 내부에서 14기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김상 선생님의 부연 설명도 있었다.
더구나, 발굴현장의 모형의 초창기에는 조그마한 항아리 정도만 발견된 것에 비하여 후반기로 갈수록 항아리가 커지는 것을 확연히 구분하여 전시 하였고, 마한 문화공원 안내소의 전시관에 있는 항아리 내부에는 항아리 내부에 안치된 유골이 마치 태아가 자궁에 웅크리고 편하게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해 항아리를 모태의 자궁으로 하고 봉분의 외부에 도랑을 파고 물을 채운 것은 양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또 항아리 속의 유골이 마치 알을 깨고 나오기 전의 새 모양으로 난생 설화가 옹관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후반으로 갈수록 커진 항아리의 모습은 남근을 상징하듯 길쭉해 진 것은 다산과 풍요, 종족 번창을 추구하여서가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짐작도 해 보았다.
두 번째 답사지인 반남리 고분군으로 옥야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반남리 고분군은 5~6C의 옹관묘의 전성기 시대의 고분으로 꼽을 수 있으며, 예전의 반남리가 현재는 행정구역이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등 세곳으로 분할되어 각 고분을 현재의 지명을 앞에 두어 부르고 있었다.
반남리 고분군은 백제의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신자), 동성왕, 무녕왕, 성왕 시대에의 고분으로 추정되며,
특히, 신촌리 9호분은 도굴된 분묘이면서도 발굴과정에서 인근 고분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금동관 조각이 발견되었고, 환두대두 4자루, 금동신, 금 귀걸이 등이 발견되었고, 5C(461년, 동성왕) 즈음의 주구묘로 네모 모양의 봉분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는 영산강 유역과 한강유역, 금강 유역의 세 개의 커다란 강줄기를 중심으로 씨족들이 집성하여 세력을 이루고 살았는데,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은 사씨와 목씨로 고분의 유형에서 부여씨의 유적이 보여 부여씨와 어울려 산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유역의 진씨와 해씨가, 금강 유역에는 연씨와 백씨의 토착민이 주축 세력이었고, 내부 세력다툼에서 패배하면 패배한 씨족은 일본으로 보내 천황의 비가 되었으며, 왕이 되기 위해서는 제일 강한 토착세력의 씨족을 왕비로 삼아야 한다는 당시 시대 상황이었는데, 위와 같이 신촌리 9호분의 유물들은 일본의 고문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하여 백제 곤지 아들이 일본으로 가 일본 웅락천왕 되었다가, 세력을 키워 다시 백제로 돌아와 동성왕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동성왕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김상 선생님의 설명과 6세기 초 영산강 유역의 고분 문화는 왜 문화와 같으며, 개체천황이 목씨정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을 듣고 당시에는 백제와 일본의 왕이 같았을 수도 있었고, 일본은 아직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의 단위가 아닌 토착민의 씨족세력 정도였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해 보았다.
덕산리 10호 고분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그 존재의 가치를 가지며, 반남리에는 봉분이 산과 같아 자미산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오전시간에 여러곳을 도느라,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서 나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나주곰탕 하얀집에 당도하였는데,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마솥으로 끓이는 곰탕 냄새와 건져놓은 고기를 보고 군침이 절로 났다. 그 시간에도 손님이 많아 문전성시를 이루어 한참을 기다린 후 약간의 허기와 함께 잘익은 깎두기와 김치를 곁들인 나주곰탕 맛은 말 그대로 일품이었다.
우리가 먹은 집이 원조로 약200년 동안 가업으로 내려 온다고 들었다.
점심을 먹은 후 식당 바로 옆에 있는 옛날 나주 목사가 거처하며 원님재판을 했다는 금성관 입구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다음은 복암리 고분군을 방문하였다.
영산강 유역 고분 중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도굴되지 않은 유일하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석실속 옹관묘로 처녀관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고분 인근은 안동권씨 집성촌의 사유지로서 보존되어 왔고, 인근 야산과 구분되지 않아 고분인 사실도 모른채 산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최근 고분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산리 인근에는 7개 정도의 고분이 있었으나, 60년대 이후 개발행위로 고분인 사실도 모른채 유실되어 현재 3,5개의 고분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처음으로 고분의 위로 올라가 보았는데, 마치 피라미드 모양의 봉분 약1/5 상단을 절단한 헬기장 같은 느낌이었다, 그 옆에는 원뿔형 봉분이 있었는데, 규모는 더 작았으며, 그 옆에는 도로가 뚫리면서 반 쯤 잘라진 고분도 있어 그 지역의 문화재 관리가 얼마나 소홀히 해 왔는지를 짐작케 했다.
위 복암리 석실속 옹관묘를 지나 6C 중반이 되면서 옹관묘는 차츰 사라지고 석실묘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약 40분 가량 가야하는 거리에 있는 함평으로 향하였다.
요즘 함평은 나비축제와 곤충박람회로 지자체 수익이 연간 100이상 된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지자체 수익이 없어 재정이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예덕리 신덕고분군은 장고 모양으로 생긴 장고형 고분으로 전방후원고분(앞은 사각형, 뒤는 원형)의 대표적인 합장 석실묘로 6C경의 것으로 옆에는 조금 작은 고분이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장고형 고분은 부부의 합장묘로 그 옆의 작은 고분은 아들 묘로 추정되며, 고분에서 금동관 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돌아온 토착세력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변에 도랑을 파놓은 주구묘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도 최근 발견된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는 목장이 있어 가축분뇨 냄새 등으로 고분의 보존 현황이 나주보다는 더 열악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후 우리는 마지막 답사지인 인근 예덕리 고분군으로 옮겼다.
예덕리 고분군은 2~4C 조성된 현재 발굴된 영산강 유역의 초창기 고분군으로 광활한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모두 12기의 고분들이 밀집 분포되어 있었는데, 삼각형을 띤 독특한 평면 형태로 인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가장 큰 고분은 길이가 50m에 달하며 12기 중 6기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한다.
각 고분은 여러개의 목관, 목곽분, 옹관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약 2백년 이상 가족묘 또는 마을 공동묘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조성이 오랜 기간동안 기존의 봉분 일부를 파고 연결하여 조성되어 시대에 따른 묘제의 변천 과정을 알수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더욱 깊다고 한다.
초창기의 묘제임에도 여전히 주구묘의 모습은 갖추어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내려쬐는 햇빛으로 모두들 기진 맥진한 상태에서 어디 시원한 것이라도 마시며 그늘을 찾아, 조그마한 가게를 들러 음료수고, 아이스크림이고 취향에 맞게 더위를 달래는 시간을 가진 후, 예약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또다른 나주의 명물인 홍어를 저녁으로 먹기 위하여 ‘금일홍어’ 집으로 향하였다.
홍어집은 영산강 인근에 집성되어 있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동네에서 홍어 냄새가 풍겨 나왔다.
나는 산골 출신이지만 홍어를 즐기는 편이라, 냄새만으로 입에 군침이 돌았다.
국산 홍어는 가격이 비싸 비록 칠레산 홍어였지만, 가게에 들어서자 마자 홍어를 쌓아 놓고 조리하는 모습은 가히 홍어 동네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예약된 자리에 앉아 좌담을 나누는 사이, 홍어 정식의 코스 요리가 나왔는데, 나는 바다에서 떨어진 나주에서 어떻게 홍어가 유명한지 궁금하여 물으니, 영산강은 바닷배가 드나들었는데, 먼 바다에서 잡은 홍어를 나주까지 싣고 오는 사이 홍어가 삭아 유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어코, 홍어애, 홍어 튀김, 홍어무침, 홍어사시미, 등등 각 부위별로 조금씩 다른 맛은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조금 아쉬운 것은 한 점을 입에 넣으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쏘는 맛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지만, 동행한 여러 회원분들과 함께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먹는 홍어저녁은 일품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동행한 회원분들의 각자 소감을 듣고, 하루 동안 답사한 고분에 대한 평가를 하였는데, 역시 카이스트 출신의 유윤 사장님이 장원을 하였다. 겹살이로 총무인 답사 과정에서 열심히 메모를 한 덕이었는지, 동율이었다.
최종적인 총평을 김상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막걸리의 취기가 올라 더욱 대화의 분위기가 고조될 즈음에, 나주발 용산행 막차의 시간이 다 되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재촉하여 나주역으로 향하였다.
하루 종일, 아니 몇 달 전부터 현지에서 답사의 기획, 버스, 식당 예약, 답사지에서의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흥겹고 열심히 헌신해 주신 김상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만 남긴 채, 그리고 인근 담양에서 참석해 주신 선종욱 원장님과 작별하고 우리는 용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다소는 피곤하지만 한결같이 모처럼 알찬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함의 소회로 이내 광명역에 도착하여 신원장님 내외분과 유윤 사장님이 하차하시고, 우리는 용산역에서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어린 시절 막연히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이라고만 배웠지 어느쪽에 있었는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고 살아오다가 아리랑 포럼이라는 모임을 접하여 잊었던 우리의 과거 모습에 대한 흔적을 직접 답사하여 살펴본 것에 대하여 무척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땅에 살았던 선조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생기는 답사였다.
답사를 제안한 회장님, 현장에서 애쓰신 김상선생님, 그리고 항상 모임을 위하여 애쓰시는 간사님, 동참해 주신 회원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11. 9. 5.
총무 엄태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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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야외학습과 실내학습이 합쳐진 듯 열공하신 총무님의 정성이 배어나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이런 학구적인 답사 기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재밌었을 것 같네요~ >_<
와~ 총무님 그날 열공하시더니 역시~~~~ 감사합니다, 글 읽으면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였답니다.
친절하고 열정적인 김상 선생님의 안내와 설명, 함께한 회원여러분, 덕분에 아주 좋은 답사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