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 소리 옛 임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쏘냐.
'('나그네 설움', 고려성(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태평레코드, 1940.2)
요즘도 노래방에서 애창되는 '나그네 설움'은 식민 지배를 받는 민족의 상황을 고향을 잃고 떠도는 나그네에 비유,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년설(본명 이창민)이 노래한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지은 이가 창녕 조씨 매계 조위의 15세 손 조경환(1910~1956)이다.
고려성이란 예명으로 활동한 '나그네 설움'의 작사가 조경환의 동생 조광환도 같은 시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들 형제는 해방 전후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나화랑이란 예명으로 활동한 동생 조광환은 '향기 품은 군사우편' '무너진 사랑탑' '열아홉 순정' 등의 명곡을 남겼고 이 곡들은 나라를 잃은 설움과 광복, 동족 간의 상잔 등 힘든 시대를 살던 민중의 애환을 위로하는 희망의 노래가 됐다. 창녕 조씨 문중의 마지막 이야기는 매계 조위가 당대의 문장가이자 풍류 선비로 이름을 날렸듯 그 후손 중 해방 전후 힘든 시절 민중의 아픈 삶을 달래는 작사가와 작곡가로 이름 떨친 조경환`광환 형제의 노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담뱃갑 뒤에 기록한 명가사 '나그네 설움'
조경환이 나그네 설움을 작사한 때는 1938년 겨울로 알려졌다. 당시 조경환은 일본 와세다 대학 재학시절 반일(反日) 행동으로 경찰서의 불순분자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일본인들이 모든 것을 차지한 조선은 조경환이 날개를 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에 조경환은 극작과 연극을 겸한 예술인으로 백성들의 애환을 풀어줄 길을 찾았다. 1930년대 당시는 많은 문필가와 시인, 극작가들이 가요 음반제작에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들을 가요 작가로 불렀다. 조경환도 1938년 11월 태평레코드사에서 가요제작업무를 총괄하는 문예부장직을 맡았다.
이 무렵 조경환은 김천과 인접한 성주 출신 가수 백년설(본명 이창민)과 친분이 두터웠다. 둘은 늘 같이 어울렸고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술 한잔과 함께 고민했다. 이런 조경환의 행동에 일본 경찰은 늘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고, 술자리에서 한 말이 빌미가 돼 1938년 12월 조경환과 백년설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조선인 사상범 관련 사건을 전담하던 부서)로 끌려갔다. 둘은 일본 경찰이 뒤집어씌운 혐의로 인해 밤샘 조사를 받고, 모진 수모 끝에 새벽에야 경위서를 쓰고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둘에게 한겨울 찬바람이 부는 인적 없는 새벽의 광화문 공기는 너무도 차가웠다. 둘에게는 이런 현실이 몸은 비록 내 나라에 있건만 마음은 고향을 잃고 이국을 헤매는 나그네처럼 느껴졌다.
이때 백년설이 "형님, 언제부터 낯익은 서울 거리가 이국보다 더 살벌해졌습니까"라고 하자 조경환은 문득 시상을 떠올렸다. 백년설을 재촉해 새벽까지 문을 연 광화문 뒷골목 주점으로 들어간 조경환은 자리에 앉자마자 떠오른 시상을 기록하려고 양복 주머니를 뒤졌으나 수첩은 경찰부 고등과에 압수당하고 없었다. 아쉬운 대로 담뱃갑을 풀어 뒷면에 떠오른 감상을 적었다.
'낯익은 거리다 마는 이국보다 차거워라.… 새벽길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두 사람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며 참을 길 없는 울분을 달랬고, 조경환은 이런 마음을 담뱃갑 뒤에 빼곡히 적어갔다. 나라 잃은 설움과 이민족 통치하의 민족적 슬픔을 우회적으로 깔아 놓은 나그네 설움 노랫말은 이렇게 쓰였다. 훗날 조경환은 담뱃갑에 1절로 기록했던 가사를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고자 3절로 돌려 완성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그네 설움'이란 제목이 붙여진 이 가사에 이재호가 곡을 붙였고, 백년설이 불러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그네 설움은 1930년대 후반에 새로운 유행 사조로 등장한 이른바 '장조 트로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광복 이전 대중가요 중 음반 판매량이 가장 많은 곡으로 알려졌다. 조경환은 나그네 설움 외에도 데뷔곡 '절연편지'(1939, 이재호 곡, 나성려 노래, 태평레코드)를 비롯해 '어머님 사랑'(1940, 이재호 곡, 백년설 노래, 태평레코드), '비오는 해관'(1940, 무적인 곡, 백년설 노래, 태평레코드), '금박댕기'(1942, 김교성 곡, 모란봉 노래, 태평레코드), '고향에 찾아와도'(1958, 이재호 곡, 최갑석 노래, 오아시스레코드)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조경환은 1939년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김천(김천극장)에서 '전국음악콩쿨대회'를 열기도 했다.
◆나화랑(본명 조광환`1921~1983)의 민요 사랑
나화랑이란 예명으로 활동한 조광환은 맏형 조경환의 영향을 받아 1942년 제1회 레코드예술상(전국 13도 신인가수 대항 콩쿨전)에서 입상해 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이내 가수활동을 접고 1942년 8월 '삼각산 손님'(조경환 작사, 구성진 노래)으로 작곡가로 데뷔했다.
이후 '도라지 맘보'(1952, 탁소연 작사, 심연옥 노래), '향기 품은 군사우편'(1952, 박금호 작사, 박춘산 노래), '닐늬리 맘보'(1953, 탁소연 작사, 김정애 노래), '서울의 지붕 밑'(1955, 고명기 작사, 송민도 노래), '청포도 사랑'(1956, 이화촌 작사, 도미 노래), '무너진 사랑탑'(1958, 반야월 작사, 남인수 노래), '열아홉 순정'(1959, 반야월 작사, 이미자 노래), '이정표'(1960, 월견초 작사, 남일해 노래), '님이라 부르리까'(1963, 김운하 작사, 이미자 노래), '정동대감'(1965, 신봉승 작사, 이미자 노래) 등 주옥같은 명곡을 남겼다.
조광환은 해방 전후 1세대 가요 작곡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전통음악과 재래 민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대중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펼쳤다. 내선일체란 명목으로 자행된 일제의 문화 말살정책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인 민요는 제대로 보급될 수 없었다. 조광환은 1954년 킹스타레코드사에 전속 작곡가 겸 문예부장으로 입사하며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펼쳤다. 그는 이 기간에 전국의 민요를 수집하고 편곡해 많은 민요음반을 제작했다.
당시는 8`15 광복과 6`25를 거치며 시대적인 사회 정황과 트로트의 단조 비극성이 들어맞으며 민요가 트로트에 서서히 밀려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광환이 수집, 편곡해 음반으로 제작한 민요를 살펴보면 '강원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아리랑 타령' 등 아리랑이 41곡에 달하며, 베틀가 19곡, 노들강변 17곡, 태평가 17곡, 창부타령 16곡, 사발가 16곡, 뱃노래 13곡 등 수백 곡에 달한다. 이외에도 '가야금 타령' '경복궁 타령' '개 타령' '은실 타령' '창부 타령' 등 34종의 타령도 음반으로 제작했다.
조광환은 1954년 제작된 SP음반 '노들강변/ 백두산을 바라보고'를 시작으로 1958년까지 16장을 만들었다. 이후 10인치 LP음반이 보급되면서 1950년대에만 '남도민요선집' '유행신민요걸작집' '남도민요 1`2`3집' '한국고전무용곡 특집 1~5집' '한국민요특집 1~5집' '한국민요집 1~5' 등 모두 24장을 발매했다. 1960년대부터 보급된 12인치 LP판으로는 '남도민요집 1~3집' '경기도 민요' '한국민요선집 1~10집' '매혹의 한국민요 14곡선' 등 27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이는 동시대 민요음반을 낸 작곡가 전기현, 김교현, 문호월, 손목인, 박시춘, 한복남 등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다.
조광환은 당시 트로트에 밀려 소외되는 국악 민요들을 채보하고 이를 편곡해 음반으로 제작했다. 이런 민요음반 제작은 큰돈이 되는 사업은 아니었다. 이는 고향인 봉계에서 천석꾼 집안으로 불리던 조광환의 집안이 쇠락한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광환은 가수 도미, 남일해, 이미자, 박재란, 유성희 등 많은 연예인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중 대구 출신이던 남일해와는 특히 인연이 깊었다. 조광환은 1958년 남일해에게 '비 내리는 부두'를 취입하게 한 것을 시작으로 약 70여 곡을 함께 제작했다. 남일해는 아직도 지방공연을 다닐 때면 수시로 김천을 방문해 스승 조경환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가요계에서 엘레지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미자도 조경환과의 인연으로 '열아홉 순정'을 불러 데뷔했다. 당시 HLKZ TV(훗날 TBC방송국으로 개칭)가 매주 진행한 아마추어 노래자랑 '예능 로타리'에서 1위를 차지한 이미자의 재능을 조경환은 일찌감치 알아보고 연구생으로 받아들였던 것.
생애 500여 곡의 가요를 남긴 나화랑(조광환)은 대중가요 1세대 작곡가로 작곡의 귀재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아들 조규천`규만`규찬 3형제도 가수 겸 작곡가, 음반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천시사
김천 종가문화의 전승과 현장(민속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반짝이는 별빛아래, 나화랑, 그의 인생과 음악(민경탁)
베일에 가려진 가요 작가 고려성(경북예술 통권 제28호, 2009, 한국예총경상북도연합회)
<자문>
민경탁 한국문인협회 김천시지부 부지부장, 가요연구가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조운현 창녕조씨 참의공파 종중회장
조지환 창녕조씨 매계 조위선생 16세손
◇창녕 조씨 문중의 인물
◆'조문삼문장'(조전, 조위(1454~1503), 조신(1454~1529))
◆조윤희(1534~1616). 매계 조위의 손자.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네 고을의 수령과 판관, 첨정, 예빈시정 등을 역임했다. 아우 고성군수 조윤신, 양구현감 조윤지와 3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다. 형제 모두가 80세가 지나도록 건강해 당시 '갈탄삼로'라 불렸다. 시에 능해 여러 시편이 있었으나 '봉촌고' 몇 편만 전한다. 통정대부 영월군수를 역임했다.
◆조효창(1623~1680). 166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8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적, 공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예조좌랑을 지냈다. 1679년 어천도찰방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개평관객사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림과 시문, 서예에 능해 삼절이라 일컬어졌다.
◆조세붕(1691~1760). 첫째 형은 조세호, 둘째 형은 조세룡, 셋째 형은 조세봉이다. 숙종 조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참봉에 제수되고 수직으로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들 사형제를 일컬어 사효사학행이라 했다.
◆조림(1711~1790). 매계 조위의 7세손으로 산림숙덕지사로 칭송됐다. 1784년 대신들의 천거로 선공감 가감역을 비롯해 경연관 세자시강원 자의를 거쳐 6품에 오른 뒤 장원서 별제, 사헌부 지평, 형조참의 등에 제수됐다. 이후 상소를 올려 모두 사퇴했다.
정조는 "대궐 안 숲 속 맑은 매미 소리 듣고 경의 높은 덕을 생각하노라"며 말을 타고 올라오라고 했다. 예관을 보내 국사를 수의하기를 8번이나 했다. 이런 정조의 예우에도 불구하고 산림에 묻혀 후진 교육과 풍속 순화에 힘썼다. 저서로 의례집설과 신재문집 5권 3책이 있다.
◆조국명(1750~1840). 1837년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91세까지 살았는데 세상에서 선학옹이라 불렀다.
◆파평 윤씨. 도정 윤태진의 딸. 조상철의 처. 시어머니 병환에 허벅지 살을 베어 올려 수명을 연장하면서 정려(충신, 효자, 열녀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됐다.
◆조시영. 매계 조위의 12세손. 1873년 아우 조익영 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882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수찬, 교리, 응교, 사간원헌납, 지평, 장령, 집의, 성균관사성, 장악원정, 동학교수, 병조정랑, 통례원 우통례, 좌통례 등을 지냈다. 1890년 통정대부에 올라 돈녕부도정을 거쳐 병조참지, 참의, 형조참의, 동부승지에 올랐다. 외직으로 홍양`고령군수, 여산부사, 경상도소모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향약과 향음주례를 실시해 풍속을 교화하고 농상올 권장하는 치적을 남겨 생사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편저로 상례제요가 있고, 저서로 후계문집 16권 8책이 있다.
※바로잡습니다
대구 달서구 도원동에 사시는 애독자 권수기 씨가 지난 6월 23일 자 '김천의 문중 이야기'<6편> 나라 잃은 민중의 애환 노래한 대중가요 1세대 형제' 기사 중 '금박댕기'(1942, 김교성 곡, 모란봉 노래, 태평레코드) 부분은 김교성이 아니라 박시춘(본병 박순동)이 작곡하고 모란봉이 아닌 백난아(본명 오금숙)가 노래했다고 알려 왔습니다. 또 나화랑과 관련한 '향기 품은 군사우편'(1952, 박금호 작사, 박춘산 노래) 부분의 '박춘산'은 '유춘산'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권 씨의 지적에 따라 해당 자료를 제공해 주셨던 가요연구가 민경탁 선생에게 사실 확인을 부탁드렸고, 민 선생은 "가요 '금박댕기'의 관련 뮤지션들은 '조경환 작사, 김교성 작곡, 모란봉 노래, 1942. 10. 태평레코드사 5050'가 맞다"고 전해 왔습니다.
당시 태평레코드사 음반(초반) 목록을 보고 확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민 선생은 "권수기 씨가 제보한 것은 재반(두 번째로 낸 음반. 1947년 럭키레코드사 제작 음반)의 정보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반면 박춘산은 유춘산의 오류임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또 권 씨와 민 선생은 기사 중 '조경환은 가수 도미, 남일해 … 예능 로타리에서 1위 한 이미자를 조경환은 … 연구생으로 받아들였던 것' 단락에서 '조경환'은 '조광환'이 맞다고 전해왔습니다.
확인한 결과, 이 단락에서 조광환을 조경환으로 기록한 것은 오타였기에 정정합니다. 오류를 지적한 권수기 씨와 민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정확한 취재와 자료 검토를 통해 같은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