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y Rac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의 가문은 유서 있는 러시아 귀족이며, 아버지는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부계의 할아버지도 역시 군인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도 있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서도 다소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라 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교양이 높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농노해방이후 사회적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점차로 농토를 잃게 됐고, 1882년 19세 때에 양친이 서로 별거하게 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페테르부르크에 옮겨서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의 유아과정에 입학, 피아노공부를 계속했다.
85 년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A. Siloti)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 니콜라이 즈베레프(N.S. Zverev)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실로티 역시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는 리스트에게 사사하여 90년부터 모교의 교수가 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외에도 화성학과 작곡법을 아렌스키(Arensky)에게 ,대위법을 타니예프(Taneyev)에게 배웠고, 뒤에 실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다.
재 학시절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하여, 9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실로티에게 바친 곡으로서, 모스크바의 구트헤일 출판사에서 op.1(작품번호 1번)으로써 출판되었다. 91년에는 피아노경연에서 제1위로 입상, 이듬해 졸업작품으로 단시일에 쓴 오페라<알레코>로써 금메달상을 획득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93년에 볼쇼이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92년에는 피아노곡집 <환상적 소품집>도 작곡되었다. 그 곡집의 제2곡인 전주곡(C#단조)은 그의 피아노곡으로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93년 존경하던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맞게 되자, 그는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기 위해서 피아노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d단조)을 작곡했다.
이해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여자전문학교의 피아노과 교사가 되는 한편, 러시아명지를 순회연주하여 명성을 떨쳤다.
95 년에는 교향곡 제1번(d단조)을 작곡, 이 곡은 97년에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첫 공연을 가진 바 있으나 아주 평이 나빴다. 이에 의기소침한 나머지 그는 한동안 다른 길을 택하여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으나 , 이것 역시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98 년 런던 필하모니협회의 초빙을 받아 영국에 건너갔고, 피아니스트/지회자로서 자작을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귀국하게 되자 제 1교향곡의 실패에서 받았던 정신적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않아서 새로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도록 청탁을 받으면서도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다 행히도 모스크바의 정신병과의 명의 사다르박사의 치료로써 신경쇠약은 완치되고, 1901년에 피아노협주곡 제2번(c단조)을 완성 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첼로 소나타(1901), 13의 프렐류드(1903~4)등의 걸작을 낳게 됐다.
0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의 지휘자를 맞게되고, 이 무렵에 오페라 <인색한 기사>와 <프란체스카다 리미니>를 작곡, 동극장에서 초연되었다.
07 년부터 09년까지는 드레스덴에 살면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 교향곡 제2번(e단조)과 피아노 소나타 제1번(d단조), 교향시 <죽음의 섬>을 썼다. 제2교향곡은 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같은 해 초연된 스크랴빈의 교향곡 제4번<법열의 시>를 능가하여 클린카상 제1위에 입선된 걸작이다.
09년 미국을 순회연주하고, 보스턴교향악단을 지휘한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편, 피아노협주곡 제3번(d단조)을 작곡했다.
10 년에 귀국하여 17년까지는 주로 피아니스트,지휘자로 활약하고, 피아노곡 및 가곡 작곡에 손을 대었다. 이 무렵의 작품인<성 크리소느토무스의 전예악>은 옛 러시아의 즈나메니 성가를 인용한 것인데, 20세기의 러시아정교의 전례음악으로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한 그에게 또다시 크나큰 시련이 들이닥쳤다. 러시아혁명은 그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귀족출신인 그는 공산정권이 싫은 나머지 1917년 말에 파리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 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정주하며, 해마나 여름에는 스위스에서 정양을, 가을에는 유럽의 곳곳을 순회연주하는 식의 생활을 되풀이했다. 26년부터는 오랫만에 작곡을 위한 붓을 들어 피아노협주곡 제4번(g단조)을 완성했고, 그 뒤 34년에는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36년에는 <교향곡 제3번>(a단조), 40년에는 <교향적 무곡>을 작곡했으나, 그 가운데서 <파가니닌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만이 일반에게 알려져 있다.
이 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복귀 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크랴빈이나 바실렌코 등이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 받을 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넌,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고, 특히 자기작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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