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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인 것은
(고린도전서 15:9-11)
2012년 3월 4일 주일예배
길희성 형제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간단히 말해서, 신앙인들은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살아 온 자신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감사한 마음과 겸손이 있는 반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우연이고 순전한 행운이라 생각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자기 힘, 자기 노력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만하여 감사라는 것을 모릅니다. 물론 두 부류의 사람이 이렇게 확연히 갈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늘 감사하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있으며, 나는 사실 그런 사람도 신앙인으로 간주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 해도 하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남에게 베풀 줄도 모르고 나누는 데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내가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로 부모의 도움 없이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사람인데, 부모로부터 재산은 물려받지 못했다 해도 적어도 건강과 머리는 물려받았으니까 성공할 수 있었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무시하는 말입니다. 거기에다 사회에서 맺은 각종 인연의 도움을 생각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자수성가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자기가 살아 온 삶의 궤적을 돌이켜 보면서 오늘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내가 나인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고 감사와 겸손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인간이며 그런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일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자기가 잘나서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덜 된 사람, 철이 덜 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감사할 줄 모르고 만족을 모르며 인생을 경쟁과 투쟁 속에서 피곤하게 살다가 가던지, 아니면 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한 많은 삶을 살다가 가기 쉽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나는 ‘주어 진 것’은 모두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통해 주어진 것은 물론이고 사회를 통해 주어진 것이든,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은 모두 은혜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외국 여행을 해 본 사람은 다 느끼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잘 사는 나라도 드물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미국에 자리 잡고 사는 동포들을 부러워했지만, 요즈음 한국에서 웬만큼 사는 사람이면 그런 생각 하지 않고, 이민 가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지만, 요즈음은 미국 지사에 발령 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홍콩이나 인도네시아나 동남아시아 나라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면 여러 가지 기회도 많고 골프도 즐기고 부인들은 가정부까지 두며 편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나라가 이 만큼 잘 사니까 기업이든 개인이든 모두가 덩달아서 생활수준이 올라간 것이지, 어디 개인의 노력만으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물론 중산층 정도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며, 요즈음 우리사회의 화두인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의 양극화를 간과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이 양극화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입니다. 최근 다보스 포럼에 모인 사람들조차 모두 자본주의의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 궤도 수정을 주도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나라는 중대한 선거 둘을 앞두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재벌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절대로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점점 부를 독점적으로 세습해가는 재벌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자기가 잘 해서 자기 능력으로 산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라도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가 이미 다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건강과 가족 환경, 그리고 살면서 만난 사람들 - 어렸을 적 나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용기를 준 선생님, 친구들, 고향 사람들, 선후배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과 노동자들, 내가 속한 단체의 회원들이나 지도자들, 내가 속한 사회, 국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형성했고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모든 여건들을 ‘인연’이라 부릅니다. 우리 모두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연의 줄에 신세를 지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우리 기독 신앙으로 말하자면, 진정으로 나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누구시냐고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답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답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전통적으로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만약 어떤 피조물이 그렇게 말하면 그야말로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되고 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고백하기를,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아주 간명하게,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이라고 되어 있고, 그리스어 원문도 아주 간단명료하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ego eimi ho eimi). 우리말로 하면 문장이 좀 길어지고 지저분하게 되는 것이 흠입니다. 특히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오늘’이라는 말이 그리스어 원문이나 영어로는 필요 없는 말입니다. 문장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의 내가 되었다” 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나이다’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나는 나가 아니다 라는 말이 됩니다. 만약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을 빼고 “나는 나다”라고 했다면 그야말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웃기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습관적으로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면서 뻔뻔하게 하나님 노릇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불교가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설교 시간에 불교 이야기 별로 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아 사상, 혹은 공사상인데, 그것에 의하면 우리는 “나는 나다”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나는 나가 아니다”를 먼저 깨닫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불교의 법어를 다 들어보셨겠지만,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반드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먼저 알고 해야 진리가 됩니다. 불자들이 우리 주기도문처럼 매일 예불 시간에 암송하는 <반야심경>이라는 짧은 경전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려면 나 아닌 무수한 타인들, 그리고 하늘과 대지와 풀과 나무를 비롯한 온 우주 만물이 인연으로 함께 작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누구도 “나는 나다”라고 말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실체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와 구별되는 나라는 모습으로 없지만 있는 듯 가명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독립적이고 별개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모든 번뇌 망상의 으뜸입니다. 그 반대로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노동자와 기업가, 호남과 영남, 여당과 야당, 남과 북, 우리나라와 외국,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의 진리가 사물의 실상이며, 이 무아, 공, 불이, 평등성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나라는 분리된 개체가 느끼는 소외와 고독, 고민과 번뇌에서 벗어나 나와 이웃, 나와 온 우주가 하나 되는 엄청난 기쁨과 감사를 느끼며 그야말로 동체대비의 넓고 순수한 사랑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와 달리 주어진 환경이 열악해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부채 의식을 가지고 남은 인생이라도 이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한 개인의 행복이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듯, 한 개인의 불행 또한 그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기 위해 꼭 바울 사도처럼 드라마틱한 경험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자기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신앙 간증이라는 것을 하면서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는 그런 은총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도 모두 우리의 인생길에서 향하던 각자의 다마스쿠스가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 삶의 전환을 맞게 되었고 이 예수를 본받아 살려고 새길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향하던 다마스쿠스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사이파 바울처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하고 열성이었던 율법주의의 다마스쿠스였습니까 아니면 출세와 야욕의 다마스쿠스였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만날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도 보는 눈이 없어 지나치거나 고의로 피하고 말았는지요? 여하튼 우리 모두가 무수한 인연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또 새길교회의 자매 형제가 되어 지금의 ‘나 아닌 나’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반드시 특별한 것이 아니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는 눈만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서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늘과 대지와 산과 들과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며 은총으로 느껴집니다. 어렸을 적에는 이런 말이 실감이 안 났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평범한 것들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볼 수 있는 신앙의 눈만 있으면 들에 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서도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삶 자체가 축복이며 은총임을 깨달아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은 바울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만, 이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도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은총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회심을 그 사건 하나만 보면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후좌우 맥락을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창세 때부터 작용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라면, 예수를 만나 생의 일대전환을 경험하고 새로운 존재가 된 바울이라는 인물을 내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는 창세부터 작용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바울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활한 이 우주 공간과 무수한 별들 가운데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별이 생성되어 인간이라는 놀라운 존재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무신론자들은 순전히 우연의 연속이었다고 믿기 어려운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빅뱅의 순간부터 진화의 전 과정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물리학자들과 신학자들 가운데는 우주가 탄생의 순간부터 인간이 출현할 것을 예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하튼 이 거대한 불모의 물체 덩어리처럼 보이는 우주 공간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우리의 작은 머리 하나로 이 광대한 우주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감탄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로 나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도 예수님의 탄생이나 바울의 회심 못지않게 신기한 일이지요.
하나님의 은총은 바울이 회심하는 순간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 무수한 우여곡절을 통해서, 공간적으로는 그의 좌우에 주어진 무수한 인연의 그물망을 통해 무한대로 소급해 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 모두가 지금 여기에 있도록 섭리하신 것이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다 귀한 존재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시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나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 온 우주가 존재한다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영락교회에서 중고등학교 신앙생활을 했는데, 장로님들이 대표기도하시면서 걸핏하면 ‘만세전부터 예비하신’이라는 기도를 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아 아주 싫어했습니다. 지금 철이 좀 들어 생각해보니, 맞기는 맞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서정주의 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마다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를 흔히 불교의 연기 사상, 공사상이 들어 있는 시라고 해석하는데, 바울의 회심도, 그리고 내가 나인 것도 참새 한 마리도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상만사를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세전부터 예비하신 것이라고 한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국화꽃이 피는 것과 소쩍새가 우는 것이 연관이 있다면 나와 여러분의 출생을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예비하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 길희성이라는 사람이 한국 땅에 태어나 신학이라는 것을 공부하고 불교라는 것도 알게 되어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불교식으로 해석하게 된 것도 만세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심한 과대망상일까요?
아무튼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 못지않게,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바울도 몰랐던 우주와 지구 탄생의 신비, 그리고 생명의 출현과 장구한 진화 과정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참 인간 예수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하늘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서 이 모든 과정과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생각하려고 굳이 칼뱅의 예정론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정과 예비는 어감만 다른 것이 아니라 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비’가 조건을 조성하고 제공해 준다는 정도의 뜻으로서 우리 인간의 자유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개념이라면, ‘예정’은 아무리 궤변을 동원해도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비라고 해도 너무 문자적으로 취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비도 어디까지나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두 연인이 서로 “당신을 만난 것은 운명이다.” 혹은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것이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예비라는 말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정이든 예비이든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이고 고백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주 하나님은 별개가 아니고, 창조의 은총과 구원의 은총이 별개의 은총이 아닙니다. 창조와 구원을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둘은 구별은 해야겠지만 별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미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욕심으로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지금 처한 형편을 보면서 은총은 무슨 은총, 무슨 은총이 요 모양이냐고 불평하는 사람은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도 신앙에 눈이 뜨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하는 힘입니다.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을 구별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아니라 세상의 눈으로 보면서 나의 뜻, 나의 시각, 나의 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알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무슬림들 - 이슬람은 순종, 무슬림은 순종하는 자라는 뜻 - 의 신앙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극적 상황에서도 그들은 우리처럼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무슬림이지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처지와 환경에 처하든, 바울 사도처럼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길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부요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빌4:11-12)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의 힘일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어떤 환경 어떤 조건에서도, “나의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신앙만 있다면 우리에게 실패란 없고 비극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삶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풍성하게 주어져 있는 것들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탐욕으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순수하고 소박하게 보지 못하고 온갖 욕망을 투사해서 봅니다. 사물들을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나 친구로 소박하게 대하기보다는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따지고 계산하는 데 우리는 익숙해 있습니다. 아니면 냉철한 과학적 관찰과 탐구의 대상으로 보거나 기술을 통해 조작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현대 사상계를 주름잡아 온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기술문명은 존재자를 그 존재의 신비에서 대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 놓으라고 닦달하고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본주의 상업문화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돈벌이의 수단이 되며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집을 지으려고 부동산에 들리면서부터는 땅이 모두 돈으로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좋은 곳을 보면 탐심이 생기고 평당 얼마냐고 묻게 되더라고요. 요즈음 아이들조차도 서로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 몇 평짜리에 사느냐를 따지는 사회에 살다보니 아이들의 심성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근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학생 폭력도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사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도 학교 폭력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학생들의 폭력은 매우 드물었으며, 조폭 수준에 버금가는 폭력은 더욱 없었고, 무엇보다도 조직적으로 돈을 뜯어내기 위한 폭력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힘자랑하는 수준의 폭력이 아니었습니까? 어쩌다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한숨만 나옵니다.
모든 것이 지배와 이용의 대상이 되었고 모든 것이 상업적 거래의 대상이 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항시 불만이고 불안해하고 고향을 상실한 것 같은 공허감 속에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삶을 잊어버린 지 오래고, 언제든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자연의 축복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하늘과 대지의 고마움, 강과 숲과 풀과 나무들의 축복,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들꽃에서 존재의 신비를 감지하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끼는 예수님의 감성을 우리는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또 더 많이 가지려고 바쁘게 뜁니다. 그러니 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빈곤한 세계에서 삽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항시 배고프고 항시 불만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현대인들은 모두 존재 위주의 삶이 아니라 소유 위주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끝없이 소비와 향락을 부추기는 현대 상업문명 속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인간의 심성이 어떻게 될지, 인류의 문명이 어디로 갈지, 그리고 이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 지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달리는 자동차에서 계속 달리지도 못하고 뛰어 내리지고 못하고 속수무책 지켜만 보면서 순간의 쾌락에 몸을 맞기고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하거나 은폐하면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혹은 지금 이 순간도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이 느끼는 세계, 그들의 눈에 사물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보십시오.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정도로 신비롭고 감사하게 여겨질 것이며, 평소에 무심코 넘겼던 하찮은 존재들도 새롭고 신비롭게 느껴져 안아주고 입을 맞추어주고 싶어질 것이다. 매 순간이 새롭고 소중하고 고마우며, 누구를 원망하고 불평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가져다 준 이 마지막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원한이나 회한을 가지고 죽는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한 인생이야말로 실패한 인생일 것입니다. 원수까지 용서하고 만물을 품고 세상과 화해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찬송가 ‘놀라운 은총’ (Amazing Grace)의 가사 대로, “이제껏 내가 산 것은 주님의 은혜요, 또 장차 나를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라는 고백의 노래를 우리가 평소 때,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진심으로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은 이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교회 창립 25주년을 맞아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큰 기대 속에서 교회를 시작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교회의 많은 일에 개입했고 개입되기도 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회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교회를 향해 할 말이 없겠습니까? 오늘 같은 이런 자리에서 그 동안 실수 했던 일, 개인적으로나 교회로서나 잘 못 했던 일, 말이나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 다투었던 일, 새길이라고 말만 앞섰지 정작 별로 다른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없으면서 한국교회 비판하고 욕하는 것을 재미나 보람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일, 바치는 일에나 헌신하는 일에 인색했던 일, 작은 교회지만 교회 살림 꾸려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비판만 하거나 방관만 했던 일, 교인으로서 해야 할 책임은 하지 않고 목소리만 크고 심지어 무임승차 하려고 했던 일, 무엇보다도 새길을 따른다면서 새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도 않았고 어려운 새길보다는 익숙했던 옛길을 그리워하면서 뒤돌아보았던 일 등, 뼈아프게 자책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을 드려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일날 너무 자책하고 자학할 필요가 있을까 해서 말씀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받은바 은총 이야기는 자칫 잘못하면 값싼 은혜 이야기가 되기 쉽습니다. 자화자찬, 아전인수 식 이야기로 자위하기 쉽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먼저 없다면 새로운 각오를 다지려는 동기도 용기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맨날 야단만 맞고 맨날 자책만 하는 아이가 커서 어떻게 될지 뻔한 일이듯이, 교회도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나 신자나 자기를 자중하고 자애하는 자긍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관습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속에 잠들어 있었을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 깨워주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어두운 세상, 어두운 교계를 밝히는 등불이 되라는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버리지 않으시고 몇 번이고 다시 일으켜 주시면서 바른 신앙의 행진을 계속하도록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러한 은총에 대한 깊은 자각과 감사가 없이는 예수 따르미로 살려는 새로운 결단이나 용기를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은 그래서 근심이나 걱정, 자책과 회한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확인하고 감사하면서 그 간의 잘못이 있으면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화해하고 격려하면서 마음껏 자축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25년 전에 작성했던 새길교회 창림선언문을 함께 교독했지만, 저는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아직도 ‘00이라고 자부합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세인의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25년 전 교회를 시작할 당시와 비교해서 한국교회의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그야말로 구제불능 상태가 되어서 아예 포기하고 떠나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을 것이며, 누구 하나 아쉬워할 사람도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은 25년 전보다도 더 귀하고 의미가 있으며 새길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아쉬워서 살려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존재에, 그리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늘 아버지 하나님에 붙잡혀서 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 교회가 지닌 많은 부족함과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인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편안한 마음으로 고백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바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더욱더 예수 운동에, 그가 전파한 하나님나라의 복음 운동에 열심을 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25살 성숙한 청년기에 접어든 교회의 오늘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30세, 예수님의 나이가 될 때는 바울 사도처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더 크게 더 큰 감동 속에서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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