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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촌 문병란
겨울 산촌(山村)
사방이 막혀버렸다, 깊은 겨울
버스도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막혀버려다오.
겨울은 내 고향의 구들목에
미신이 들끓는 달,
지글지글 끓는 사랑방 아랫목에서
머슴들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달,
화투장 위에도 밤새도록 흰 눈이여 쌓여다오.
겨울 산촌(山村)은 막힌 대로가 좋아
눈은 이틀째 자꾸만 내리고
자꾸만 내리고
신문도 배달부도 안 오는 깊은 겨울.
도시에서 실려오는 편지도
새마을 잡지도 오지 말아다오
차라리 신문이여 오지 말아다오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유행가여 들리지 말아다오
지불명령을 가지고 오는 우체부 아저씨여 오지 말아다오.
눈 내리는 소리만 들리게 하고, 차라리
호롱불 가에서 심청전을 읽으며 울게 해다오
춘향이와 이도령의 서러운 이별을 함께 울게 해다오.
이틀째 이틀째 내리는 눈, 심란하게 심란하게 내리는 눈,
과부네 집 창가에 바스락거리는 눈,
눈 녹으면 어이할거나, 얼음 풀리면 어이할거나.
읍내로 나가는 고개도 막히고, 학교로 나가는 앞길도 막히고
간이역으로 나가는 윗길도 막히고,
막힌 땅에서 농부가 울어, 막힌 가슴으로
고향이 울어.
차라리 모두 다 막혀버려다오
차라리 모두 다 막혀버려다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고무신 문병란
고무신
어느 노동자의 발바닥 밑에서
40대 여인의 금간 발바닥 밑에서
이제는 닳아지고 구멍 뚫린 고무신,
이른 새벽 도시의 뒷골목 위에서나
저무는 변두리의 진흙밭 속에서나
그들은 쉬지 않고 아득히 걷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쉬임 없이 걸어온 운명,
즌데만 딛고 온 고단한 발길 따라
캄캄한 어둠도 밟고 가고
끝없이 펼쳐진 노동의 아침,
타오르는 불길도 밟고 간다.
아득한 시간의 언덕 너머 펼쳐진
고향의 잃어진 논둑길을 걸어서
가물거리는 호롱불을 찾아가는 고무신,
두메산골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도
흑산도 뱃놈의 발바닥 밑에서도
뿌듯한 중량의 눈물을 안고
그들은 어디서나 돌아오고 있다.
영산포 어물장 법성포 소금장
이 장 저 장 굴러다니다
영산강 황토물 속에 처박혀
멀뚱멀뚱 두 눈 부릅뜨고
한많은 가슴 썩지 못하는 고무신.
주인의 정든 발에 신기었을
또 하나의 고무신을 생각하며
그 주인의 발가락 사이
솔솔 풍기는 고린내를 생각하며
송송 구멍 뚫린 가슴 안고
빈 달빛에 젖는 양로원 뜨락.
오늘은 엿장수의 엿판에 실려
보이지 않는 땅으로 팔려간다.
뒷골목 쓰레기통에 누워 낮잠을 자고
허름한 변두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군화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윤나는 구두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모진 학대 속에 짓밟힌 고무신,
기나긴 형벌의 불볕 속을
오늘은 절뚝이며 절뚝이며 쫓겨간다.
선거때 야음을 타고
구장 반장 손을 거쳐
살금살금 박서방 김서방을 찾아간
10문짜리 검정고무신
민주주의의 유권이 되었던 자랑도
알뜰한 관록도 사라진 채
오늘은 구멍 뚫린 밑창으로
영산강 황토물이나 마시고 있구나.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
식모살이 순이의 발바닥 밑에서
뜨겁게 뜨겁게 닳아진 세월,
돌멩이도 걷어차며 깡통도 걷어차며
사무친 설움 날선 분노 안으로 삭이고
변두리로 변두리로 쫓겨온 고무신.
번뜩이는 죽창(竹槍)에 구멍난 가슴 안고
장성 갈재 넘어가던 짚신,
그 발자국마다 핏물이 고이는데
오늘은 구멍 뚫린 고무신이 쫓겨난다.
썩어도 썩어도 썩지 못하는 한많은 가슴,
땅 속 깊이 파묻혀도
뻘밭 속에 거꾸로 처박혀도
한사코 두 눈 부릅뜨고
영영 죽지 못하는 한(恨)
여기 벌떼같이 살아나는 아우성이 있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꽃씨 문병란
꽃씨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문병란시집, 삼광출판사, 1971
나그네 문병란
나그네
먼 길 헤매다
몇해만에 돌아와 보니
사람들 얼굴 바뀌어졌네.
아는 얼굴들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내 자리엔
다른 얼굴이 은은히 웃네.
나는 어느 하늘가로 떠돌아 왔는가
나는 어느 별 아래로 헤매어 왔는가
빈손 가지고 떠났다가
빈손 가지고 돌아와
오늘은 얼굴을 반쯤 가리네
살며시 돌아서 찡긋이 한 눈을 감네.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대위법 5 문병란
대위법 5
눈보라가 지동치는 깊은 겨울
내가 천은사 승방
따뜻한 아랫목에서
번뇌를 소재로 한
한 편의 연가를 쓰고 있을 때
천은사 아래 땜 공사장에선
눈보라 속에서 크레인이 울고
불도저가 윙윙거렸다.
내가 승방에 누워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시베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들으며
한잔의 커피를 들고 있을 때
공사장의 인부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광의면 주조장에서 실어 온
찬 막걸리를 벌떡벌떡 마시고
수로를 만드는 골짜기에선
다이나마이트가 처절히 울었다.
나는 하루 쉬어도 봉급이 나오는데
그들은 하루 쉬면 굶어야 한다
누가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하는가?
눈보라는 거세어지고
지리산이 웅웅대며 몸부림친다
산문(山門)에 기대어
그리움을 노래하기엔 부끄럽구나
백팔번뇌를 찾고 선(禪)을 말하고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고
승방의 독신이 외롭다 말하기엔 부끄럽구나
눈보라는 거세어지고
크레인도 크게 운다
작열하는 다이나마이트
무너져 가는 바윗돌
내 가슴은 뜨거워져 간다
아 이런 날 부처님도
절을 지키기엔 민망하겠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돌멩이 문병란
돌멩이&
반들반들하고 이쁜 돌멩이 하나
내 품에 감추었어라
심심할 땐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급할 땐 미운 놈 이마빡도 까주게
나는 돌멩이 하나
남몰래 감추었어라
아 애증(愛憎)의 산하(山河)
내 주먹을 어디다 둘꼬?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땅의 연가 문병란
땅의 연가(戀歌)
나는 땅이다
길게 누워 있는 빈 땅이다
누가 내 가슴을 갈아엎는가?
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
아픔을 참으며
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
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
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
가만히 쓰러지는 사람
농부의 때묻은 발바닥이
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
멋대로 사랑해 버린 나의 육체
황토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
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
연한 잠 속에서
나의 씨앗은 새 순이 돋힌다.
철철 오줌을 갈기는 소리
곳곳에 새끼줄을 치는 소리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새벽마다 연한 내 가슴에
욕망의 말뚝을 박는다.
상냥하게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
내 아픔을 밟으며
누가 기침을 하는가,
5천년의 기나긴 오줌을 받아 먹고
걸걸한 백성의 눈물을 받아 먹고
슬픈 씨앗을 키워온 가슴
누가 내 가슴에다 철조망을 치는가?
나를 사랑해다오, 길게 누워
황토빛 대낮 속으로 잠기는
앙상한 젖가슴 풀어헤치고
아름다운 주인의 손길 기다리는
내 상처받은 묵은 가슴 위에
빛나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다오!
짚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고무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군화가 짓밟고 간 다음에도
탱크가 으렁으렁 이빨을 갈고 간 다음에도
나는 다시 땅이다 아픈 맨살이다.
철철 갈기는 오줌 소리 밑에서도
온갖 쓰레기 가래침 밑에서도
나는 다시 깨끗한 땅이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아픔이다.
오늘 누가 이땅에 빛깔을 칠하는가?
오늘 누가 이땅에 멋대로 선(線)을 긋는가?
아무리 밟아도 소리하지 않는
갈라지고 때묻은 발바닥 밑에서
한줄기 아픔을 키우는 땅
어진 백성의 똥을 받아 먹고
뚝뚝 떨어지는 진한 피를 받아 먹고
더욱 기름진 역사의 발바닥 밑에서
땅은 뜨겁게 뜨겁게 울고 있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법성포 여자 문병란
법성포 여자
마이가리에 묶여서
인생을
마이가리로 사는 여자
주막집 목로판에 새겨온 이력서는
그래도 화려한 추억
항구마다 두고 온 미련이 있어
바다 갈매기만도 못한 팔자에
부질없는 맹세만 빈 보따리로 남았구나.
우리 님 속 울린
빈 소주병만 쌓여 가고
만선 소식 감감한
칠산 바다 조기떼 따라간 님
법성포 뱃사공은 영 돌아오지 않네.
어느 뭍에서 밀려온 여자
경상도 말씨가 물기에 젖는데
알뜰한 순정도 아니면서
집 없는 옮살이 바닷제비
서쪽 하늘만 바라보다
섬 동백처럼 타 버린 여자야
오늘도 하루 해
기다리다 지친 반나절
소주병을 세 번 비워도
가치놀 넘어서 돌아올 뱃사공
그 님의 소식은 감감하구나.
진상품 조기는 간 곳 없고
일본배 중공배 설치는 바다에
허탕친 우리 님,
빈 배 저어 돌아올
굵은 팔뚝 생각하면 울음이 솟네.
진종일 설레는 바람아
하 그리 밤은 긴데
축축히 묻어오는 눈물
여인숙 창가에 서서
미친 바다를 보네
출렁이는 우리들의 설움을 보네.
뱃길도 막히고 소식도 끊기고
징징 온종일 우는 바다
니나노 니나노
아무리 젓가락을 두들겨보아도
얼얼한 가슴은 풀리지 않네.
용왕님도 나라님도 우리 편 아니고
조기떼도 갈치떼도 우리 편 아니고
밀물이 들어오면 어이할거나
궂은비 내리면 어이할거나.
오 답답한 가슴 못 오실 님
수상한 갈매기만 울어
미친 파도를 안고
회오리 바람으로 살아온 여자
만선이 되고 싶은 밤마다
텅 빈 법성포 여자의 몸뚱이도
미친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구나.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시 문병란
시(詩)&
한 그루 나무와 같이
묵묵히 서 있는 저녁의 기도가 아니다.
한밤중 뜨는 달처럼
그렇게 어설프지 않고
푸른 과수원에 넘치는 향기처럼
그렇게 황홀히 젖는 달빛이 아니다.
단단히 쥐어진 주먹
뜨겁게 부딪치는 찰나에 꽃피는 아픔,
벌떡벌떡 숨쉬는 허파 속에 있고
추리고 추린 오늘의 동사(動詞),
온몸으로 으깨리는 눈물 속에 있다.
부드러움 속엔 이미 부드러움이 없고
사랑의 속삭임 속엔 이미 사랑이 없다.
언어는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새하얀 달빛
시(詩)는 이미 시(詩) 속에 없고,
손끝에 닿으면 타버리는 한줄기 불꽃
재 속에서 추리는 마지막 사리(舍利)이다.
시(詩)는 가을 하늘에 떠도는 조각구름
강물에 비치는 후조(侯鳥)의 날개가 아니라
시(詩)는 때묻은 발바닥
모독당한 오늘의 양심에 있고
맹물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
한방울 이슬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마시고 피는
모진 장미의 까시
콕콕 찌르는 분노에 있다.
우리들의 시(詩)는 이미 쫓겨난 왕자,
한밤에 부르는 세레나데가 아니고
허리가 꺾인 코스모스
창백한 백합의 흐느낌이 아니다.
엉겅퀴처럼 억세게
들찔레처럼 어기차게
칡덩굴처럼 쭉쭉 뻗어
뽑혀도 뽑혀도 다시 살아나는 뿌리에 있다.
아직도 낡은 연미복을 입은 시인아
이제는 시들은 꽃다발은 던져버려야 한다
가냘픈 피리는 내던져버려야 한다
시(詩)는 시(詩)가 끝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
아직도 한밤중
흉중에 뜨는 명월(明月)을 안고
아쉽게 매아미 껍질을 어루만지는 손아
황홀히 보석을 들여다보는 공허한 눈아
언어를 사랑할 때
언어는 이미 연금술사의 마술
증발한 맹물 속에 시(詩)는 없다.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연연한 마음 속에
이미 시는 없고
부드러운 혀끝에 박힌 까시,
천년의 여의주(如意珠)는 깨어졌다.
보다 뜨거운 가슴을 위하여
보다 피아픈 운율을 위하여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시인아 시(詩)를 배반하여라
그대 교과서 속에서
그대 애인의 눈동자 속에서
진정 그대 시집 속에서
죽어가는 시(詩)의 껍질을 버리고
정수리를 퉁기는 까시가 되라
복판으로 날아가는 창끝이 되라.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시인의 간 문병란
시인(詩人)의 간(肝)
독수리가 파먹다 남은
프로메테우스의 간,
용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한점 토끼의 간,
빛나는 식칼은 목마르다.
어쩌다 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모진 형벌,
천번 죽는 사나이가
모질게 최후의 간을 지키고 있다.
제 꾀에 속아
용궁 제3별관에 감금당한 토끼,
간을 둘러싸고 흥정이 한창인데
시인아, 너의 간은 어디다 감춰두었느냐.
벌겋게 불 단 적쇠 우에
한점 살코기는 지글지글 타고 있다
오 이 잔인한 사육제,
도마 위에 놓여 있는 식칼은
퍼어렇게 날세워 빛나고 있다.
오늘 누가 내게 간을 요구하는가
사방이 막힌 땅에 서서
오로지 지켜온 나의 간,
코카서스 산중으로 갈거나
바닷속 용궁으로 갈거나.
독수리야 독수리야
너를 위하여
너의 날카론 부리를 위하여
모질게 지켜온 한점 간,
오늘은 쪼아 먹으려무나
시름없이 쪼아 먹으려무나.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아버지의 귀로 문병란
아버지의 귀로(歸路)
서천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귀로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석양의 입김이 어리우고,
상사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딸 앞에선
그 어느 대통령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왕국
주류와 비주류
여당과 야당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 노을!
무너져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 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유행가조 1 문병란
유행가조(流行歌調) 1
부로크 담길 돌아서 돌아서
내 고향 팽나무 서 있는 곳에
새마을 사업 지나간 다음
심심하게 서 있는 말뚝만 남았고
장다리꽃 핀 밭두렁 가에서
처녀를 빼앗긴 순이가 보따리를 싸는데
어이할거나 꾀꼬리 암수놈
흥이 나서 미친 대낮 자지러지는데
모두 다 끼리끼리 어울리는데
헛간에 조선낫 먼드름히 걸어놓고
서울로 오입 나간 정든 머슴아
어이할거나 오월은 무장무장 짙어가는데
장광에 기대어도 문설주에 기대어도
서울로 가신 님은 영영 소식 없는데
떡갈나무 속잎 피는 영마루에서
배고픈 뻐꾸기는 자꾸만 울어쌓는데
어이할거나 김(金) 과부 속곳 속
미친 심화(心火)의 아지랑이 활활 타고
심심하게 심심하게 아름다운 대낮
장광에 기댈거나 문설주에 기댈거나
꾀꼬리는 자꾸만 신이 나는데
환장하게 환장하게 눈부신 대낮
뻐꾸기는 자꾸만 미쳐가는데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인생 문병란
인생&
어려서는 양지쪽에서
한줌 흙으로 만족했던 인생!
모래성(城)을 쌓아 놓고도
천하를 호령하는 성주
나는 언제나 왕자였네.
나이 들어서는
한송이 꽃을 바라보며
남몰래 가만히 한숨 쉬는 버릇
보랏빛 노을을 사랑했고,
아버지가 된 지금은
왜무시 크듯 쑥쑥 크는 새끼들 보며
주름살로 소슬히 웃는 버릇
씁쓰름한 소주로 목을 축이네.
파랑새를 찾으러 간
그날의 소년은 돌아오지 않고
저 산 너머 멀리
행복을 찾아간 소녀도 돌아오지 않고
어쩌다 보면
춘향이 뒷모습 같은 나의 아내
마흔일곱살이 너무 아쉬어
짐짓 나이를 두 살 줄이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적당히 취하네.
아 무지개를 바라보면
아직도 내 가슴은 뛰는데……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전라도 뻐꾸기 문병란
전라도 뻐꾸기
싸구려 농사 내던진 억만이가
새벽 이슬 떨며 떠나간
황토빛 고갯마루에
올해도 뻐꾸기가 찾아와 운다.
보따리 싸버린 순이가
처녀를 빼앗긴 보리밭 너머
저수지 언덕 위에서
올해도 뻐꾸기는 찾아와 운다.
억만이도 떠나가고
순이도 떠나간 곳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는데
순이가 벗어놓고 간
하얀 고무신 위에
눈부신 햇살만 고이는데
다시 찾아온 전라도 뻐꾸기.
이 산에서 저 산에서 울어쌓는다.
앞산에서 울다가
뒷산에서 울다가
이제는 공중에서 우는 소리
처음엔 한 마리가 울다가
나중엔 두 마리 세 마리
결국엔 수십 마리 수백 마리가 되어
이 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 뻐꾹
억세게 억세게 울어쌓는다.
갑오년에도 울던 새
조병갑이가 원님노릇 하던 때도 울던 새
배고픈 우리 할배 할매
쑥죽 먹을 때도 울던 새
귀양 온 다산(茶山)님 등뒤에서도 울던 새
몇백년 울던 새가 지금도 운다
진양조 가락보다 더 슬프게
육자배기 가락보다 더 아프게 운다.
옥양목 적삼에 다리미 지나갈 때
누이의 등뒤에서 울던 새
새참때 밭두렁에 앉아 쉬야 보시던
할머니 등뒤에서 울던 새
저놈의 새 울어싸면 흉년만 오더라고
저놈의 새 울어싸면 난리만 나더라고
고시랑거리던 어머니 등뒤에서 울던 새.
올해도 뻐꾸기만 운다,
못 살고 떠나간
철이도 남이도 돌아오지 않는데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땅,
하늘만 미치게 푸른 땅에서
황토빛 무덤만 늘어가는 땅에서
백년을 울고도 남은 울음을
천년을 울고도 남은 울음을
작년에도 울고 남은 울음을
올해도 울고 남을 울음을
이 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 뻐꾹
전라도 뻐꾸기만 피를 토한다.
뻐꾸기야
뻐꾸기야
울다가 울다가 시진한 전라도 뻐꾸기야.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정당성 2 문병란
정당성 2
때때로 나의 주먹은
때릴 곳을 찾는다.
그 어느 허공이든가
그 어느 바위 모서리이든가,
주먹은
때릴 곳을 찾아 고독하다.
뻔뻔한 이마,
오만한 콧날을 향하여
꼭 쥐어진 단단한 주먹.
응집된 핏덩일 물고
사각의 쟝글 속에
불꽃을 튀기는
일순,
산산히 부서져가는
그 어느 절정에서
나의 주먹은 피를 흘린다.
지금은 싸움이 끝나고
패배를 어루만지는
고독한 주먹,
그 어느 허공을 향하여
캄캄한 어둠을 겨냥하고 있다.
언젠가는 뜨거운 유혈에 젖어
피를 물고 깨어져갈
슬픈 묵시(黙示),
주먹은 정당성을 찾고 있다.
문병란시집, 삼광출판사, 1971
죽순밭에서 문병란
죽순(竹筍)밭에서
죽순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밭에는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올리는 대나무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 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 소리
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
달빛을 받아 먹고
이슬을 받아 먹고
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
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
쑥쑥 뽑아오르는 소리
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
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
유혈이 낭자하던 대밭
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대밭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굳은 땅을 뚫고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나오는 소리
죽순밭에는
뾰쪽뾰쪽 일어서는
카랑한 달빛이 흐른다
도도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묵은 끌텅에 새 순이 돋아
창끝보다 날카로운 아픔이 솟는다.
가슴이 막혀 답답한 날
대밭에 가서 창을 다듬자
왕대 곁에 서서
꼿꼿이 휘지 않는
한줄기 죽순을 뽑아올리자
응혈진 어둠을 뚫고
핏물진 연한 살을 뚫고
벌떼같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낭자하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아 소리 없는 아픔이 솟아오른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직녀에게 문병란
직녀(織女)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쳐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코카콜라 문병란
코카콜라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같이
양(洋)병에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 낀 일등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매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구나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켜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슬슬 잘 넘어가느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잘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림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턴가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레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켜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을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금털털 게트림만 씁쓰름히 남아 있더라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편지 문병란
편지&
고향엔 고향엔 5월이 왔다
고향엔 고향엔 뻐꾸기가 울고 있다
제비쑥 탐스런 언덕 위에서
쑥바구니 던져두고 울던 누이야
치마끈 끌러놓고 쉬어가는 계절
넉넉한 5월의 햇살 아래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고 있다
산꿩이 알을 품는 보리밭 가에서
쑥나물 질근 씹으며 울던 누이야
지금은 어느 꽃밭을 날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느냐
문명의 앵속꽃 피는 아편굴에서
두 눈 빼앗긴 슬픈 불나비
고운 날개마저 모조리 찢기었느냐
밤마다 어느 외인병사 앞에서
수지운 열아홉살이 서러운 누이야
쑥니풀 향기 대신 독한 지폐내음
진달래꽃 향기 대신 역겨운 술내음
이국 병사의 첩첩한 가슴 속에서
헤매다 헤매다 쓰러진 나비야
고향엔 고향엔 5월이 왔다
안골엔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고
밭고랑엔 탐스레 살벌은 보리모개
떡갈잎 사이에 뻐꾸기 숨어 울고
종달새도 비비배배 자지러졌다
지금은 논두렁에 빈 바구니 던져 두고
어디론가 팔려가 소식 없는 누이야.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하동포구 문병란
하동포구(河東浦口)
유행가 가락 따라
나도 모르게 왔네
빈 호주머니 노자도 없이
엿판도 못 짊어진 전라도 사나이
삼학(三鶴)소주 한잔에 취해서 왔네
하동포구 80리에 빈 모래사장만 눈부시고
발자국도 없이 쫓겨온 사나이
눈부신 햇살에 갇혀 길을 잃었네
무슨 알뜰한 옛사랑의 맹세도 없이
삼천포(三千浦) 아가씨의 설운 눈물도 없이
덧없이 부서진 마음 모래알로 빛나는데
어디서 누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옷소매 잡는가
눈부신 한낮이 길게 누워 있는 나루터
주인 잃은 빈 배만 흔들리는데
눈물을 씹어봐도 한숨을 씹어봐도
쓴맛 단맛 알 수 없는 설운 내 팔자
하동포구는 아직도 울고 싶은 곳이더라
하동포구는 아직도 사나이 옛정이 목메는 곳이더라
돈타령 팔자타령 사랑타령
한잔의 막걸리만 남은 땅에서
어느 문둥이가 손톱을 뭉개다 간 모래밭에서
알알이 빛나는 모래알을 적실
무슨 짭짤한 눈물이나 남았던가
모래밭 속에 몹쓸 이름 깊이 묻으면
추억은 소주처럼 저려오는 눈물
두 주먹 불끈 쥐고 땅을 쳐봐도
뻘밭에 오줌을 철철 갈겨봐도
무심한 햇살만 남아 있더라
빈 소주병만 남아 있더라
환장하게 환장하게
눈부신 모랫벌만 지글지글 타더라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호수 문병란
호수(湖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