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9월 28일)■
0490년 그리스가 마라톤전투(the Battle of Marathon)에서 페르시아에게 승리하다.
1530년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세상떠남
1573년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 (Caravaggio) 출생
1745년 영국 런던 드루리 레인 극장(the Drury Lane Theatre)에서 영국 국가가 처음으로 연주되다.
1794년 프랑스에 대항하여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가 페테스부르그에서 동맹을 맺다.
1803년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 출생
1825년 콜롬비아의 3선 대통령 누녜스 출생
1841년 프랑스 정치가 조르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출생
1850년 미국, 해군 및 상선에서 태형을 폐지
1864년 칼 막스가 세계노동자기구 설립을 제안했을 때 런던에서 처음으로 인터내셔날이 만들어지다.
1865년 엘리자베스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이 영국에서 처음으로 자격을 인정받은 여자 내과의사가 되다.
1885년 한성전보총국 개국 한성-인천 최초 전신시설 개통
1891년 미국 소설가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세상떠남
1894년 시몬 마크(Simon Marks)와 톰 스펜서(Tom Spencer)가 나중에 전국적인 체인점이 된 페니 바자르(Penny Bazaar)를 맨체스터에서 열다.
1895년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세상떠남
1902년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목로주점'의 에밀 졸라(Emile Zola) 사망
1908년 의병장 허위 세상떠남
1916년 영국 영화배우 피터 핀치(Peter Finch) 출생
1917년 영국 무용가 마이클 소암즈(Michael Soames) 출생
1920년 유관순 순국
1924년 이탈리아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Marcello Mastroianni) 출생
1934년 프랑스 영화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 출생
1937년 국제연맹 총회, 일본 비난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
1939년 폴란드 군대가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한다는 조약을 맺은 후에 항복하다.
1945년 현준혁 암살
1946년 조선경비대 제2대 총사령관(참령 李亨根) 취임
1948년 정부, 남부교역 중지를 선언하다
1949년 미국, 대외군사원조법 성립
1949년 북한군 제8차 유격대 침투
1950년 나토(NATO)공동방위군 창설
1950년 산돌 손양원 목사 순교
1950년 이승만대통령, 38선이북 진격 명령
1950년 정부, 서울 수복
1950년 NATO군 창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58년 북한 무장간첩선 나포.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
1961년 시리아서 쿠데타, 통일아랍공화국서 이탈
1963년 도미니카의 후앙 보슈 전(前)대통령은 쿠데타로 실각 후 망명
1963년 미국 처음으로 원자력 이용한 인공위성 발사
1963년 영국-인도네시아군, 사라와크에서 무력충돌
1963년 프랑스-독일협정. 아프리카대륙에서의 양국 세력 확정
1965년 필리핀 타알화산 폭발, 약2000명 사망
1966년 아르헨티나 반(反)영국 폭동
1966년 유엔총회서 인도네시아의 UN복귀를 발표
1968년 북악 스카이웨이 개통
1969년 서독 총선거. 기민당 신승
1970년 산체스 엘살바도르 대통령 방한
1970년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세상떠남
1973년 영국 시인 오든(W H Auden) 세상떠남
1977년 일본 적군파, 일본항공(JAL)기 납치
1977년 허담 북한 외무장관 미국 방문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 된지 26일 만에 서거하다.
1982년 한강종합개발사업 착공
1989년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망명지 하와이서 사망
1990년 걸프사태 부대파견을 위한 추진위원회 구성(위원장 국방부차관)
1990년 전쟁기념관 기공
1992년 노태우 대통령, 한국 대통령으로 첫 북경 방문해 한중정상회담
1992년 영국 극작가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Douglas) 세상떠남
1994년 여객선 에스토니아(Estonia)호가 발틱해에서 침몰하여 약 852명이 사망.
1995년 북한, Frog. Scud 600기 배치. 공군 선제 파괴계획 수립.
1995년 한국 공로명 외무 UN 연설서 "북한인권 개선" 촉구
1997년 98프랑스 월드컵 예선 일본원정경기에서 2:1로 역전승을 거두다.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 당시 감독 차범근
1997년 유럽의 골프선수들이 스페인 발데라마에서 벌어진 라이더 컵 대회에서 미국팀에게 승리하다.
1998년 마크 맥과이어 미 메이저리그 사상 시즌 70개 최다 홈런기록 수립
1998년 박찬호, 메이저리그 진출 3년만에 시즌 15승 달성
1999년 현대남녀농구선수단, 평양서 북한농구팀과 친선경기
2000년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전 총리 사망
2001년 건군 제53주년 국군의 날 행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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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480 마라톤 전투
아테네 근교의 '마라톤 평야'에서 그리스군은 2배나 더 많은 페르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이때 필리피데스라는 한 병사가 쉬지않고 26마일이나
달려 9월 28일, 이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전하고 지쳐 죽었다고 한다.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올림픽에서 그의 영웅주의를
기념하여 마라톤을 마지막 경기로 장식하게 되었는데,
1926년까지 26마일(40㎞)이 전코스였으나 현재는 42,195㎞이다.
1397 (조선 태조 6) 정릉의 흥천사 완성
1885 한성 전보총국 개국. 한성-인천간 최초의 전신시설 개통
1891 미국의 소설가 멜빌(1819-1891) 세상 떠남
"그렇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명상과 물은 영원히 결부되어 있다.
고래잡이 배는 나의 예일 대학이요 하바드 대학이었다."
1895 프랑스 세균학자 파스퇴르 세상 떠남/ 광견병 왁찐 제조에 성공, 저온 살균법 고안
1908 의병장 허위 순국
1912 일본 키체호, 동해서 침몰. 1,000명 사망
1925 낙랑고분 왕간묘 발굴
1939 독일과 소련, 우호조약 조인. 폴란드 분할 비밀협정도 조인
1948 정부, 남북교역 중지 선언
1950 국군 서울 탈환, 이승만 대통령 이북 진격 명령
1956 장면 부통령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격, 경상을 입음/범인 김상봉 병보석으로 출감 후 세상 떠남
1958 프랑스, 국민투표로 제5공화국 헌법 승인
1962 옥외 무인 공중전화 최초 설치
경북 군위군에서 제2석굴암 발견
1963 부산 구포 삼양제지공업사서 무쇠솥이 파열. 11명 사망, 20명 부상
1970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1918-1970) 세상 떠남
1970 지미 헨드릭스, 28세의 나이에 약물 과용으로 세상 떠남/블루스로부터 광적인 사이키델릭에 이르는
요소들을 두루 결합, /관능적 주법으로 기타를 연주하여 모든 기타리스트들에게 과서적 존재로
남은 그는 죽기 전날, 화판에 십자가, 케네디, 히틀러, 징기스칸, 부처 등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1971 일본 최초 인공위성 신세이, 지구이온층 관측에 성공
1972 한국 아마추어 천문가클럽 창립총회
1977 일본 적군파, JAL기 납북
1978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심장마비로 즉위 26일만에 세상 떠남
1989 전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 세상 떠남
1991 미국, 단거리핵 일방 폐기 1991 세계역도선수권대회서 용상과 합계서 전병관 2관왕
1992 노태우 대통령과 중국 양상쿤 국가 주석, 한중정상회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의견 일치 등 한중관계, 한반도 문제 등에 인식 공유
1992 민자당 김영삼총재, 민주당 김대중대표, 정주영 국민당대표 3당대표회담
조속한 국회정상화와 안기부법 개정에 합의
1992 국가안전기획부, 전 민중당 중앙정책위의장 장기표 등 6명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불고지죄)
1997 98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본원정경기서 2대1 역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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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B.C.480)
마라톤 전투는 페르시아전쟁 중 마라톤평원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아티카 북동부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을 밀티아데스 지휘하의 아테네 중장보병군 1만 명이 격파, 오후 한나절 만에 패주시켰다. 이때 필리피데스라는 한 병사가 쉬지않고 26마일이나 달려 9월 28일, 이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전하고 지쳐 죽었다고 한다./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올림픽에서 그의 영웅주의를 기념하여 마라톤을 마지막 경기로 장식하게 되었는데, 1926년까지 26마일(40㎞)이 전코스였으나 현재는 42,195㎞이다./
■창경궁 건립(1483.09.28)
조선 성종 14년(1483년) 9월 28일 창경궁이 건립됐다./창경궁은 창덕궁, 덕수궁, 경복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시대 5대 궁궐.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 마련한 수강궁 자리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광해군 8년(1616년)에 다시 지어졌다./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또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격을 낮춰 부르기도 했다. 1984년에는 우리 정부가 일제가 없앴던 문정전과 월랑을 복원한 후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돼 있다.
■창경궁 건립1484. 9. 28
창경궁 전경 1484년(성종 15) 9월 28일 창경궁이 건립되었다. 창경궁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성종이 그 자리에 새로이 별궁으로 창경궁을 건립한 것인데, 창경궁은 창덕궁·덕수궁·경복궁·종묘와 함께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하나이다.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해 있으나 창경궁만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쪽을 향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세웠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을 1633년에 중건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난향각·취요헌·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1841.09.28~1929.11.24)
클레망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며 언론인이다. 클레망소는 1871년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902년 4월에는 바르 지역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6년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했고 1906~09년 총리를 역임했다./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클레망소는 즉각 행동에 나서 프랑스 국민에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13년 발간된 일간지 <자유로운 인간 L'Homme Libre>을 통해 반전(反戰)·반군(反軍)주의자, 사회주의자, 과격한 노동운동가 등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을 퍼붓는 한편 군비 확장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던 1917년부터는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레이몽 푸앵카레의 요청에 의해 전시내각(1917~20)을 이끌었다. 클레망소는 이 기간 동안 냉정하고 끈덕지게 전쟁을 수행해 '승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후에는 파리 평화회의 의장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골격을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한편 1894~1906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때는 자신이 관여하는 언론지 <정의 La Justice>·<새벽 L'Aurore>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기사를 싣는 한편 정부를 맹렬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1841년 9월 28일 태어남 / 1929년 11월 24일 죽음
클레망소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서른 살 이후에 배웠다. "- 조르주 클레망소
클레망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며 언론인이다. 클레망소는 1871년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902년 4월에는 바르 지역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6년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했고 1906~09년 총리를 역임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클레망소는 즉각 행동에 나서 프랑스 국민에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13년 발간된 일간지 <자유로운 인간 L'Homme Libre>을 통해 반전(反戰)·반군(反軍)주의자, 사회주의자, 과격한 노동운동가 등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을 퍼붓는 한편 군비 확장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던 1917년부터는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레이몽 푸앵카레의 요청에 의해 전시내각(1917~20)을 이끌었다. 클레망소는 이 기간 동안 냉정하고 끈덕지게 전쟁을 수행해 '승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후에는 파리 평화회의 의장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골격을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1894~1906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때는 자신이 관여하는 언론지 <정의 La Justice>·<새벽 L'Aurore>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기사를 싣는 한편 정부를 맹렬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1865년 영국 최초의 여성 내과 의사 탄생
엘리자베스 가렛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 1836-1917)은 절대적인 남성 영역이었던 의학계에 금기를 깨고, 영국 최초의 '여성' 내과 의사가 된 인물이다. 1859년 당시 24살이었던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 1호인 엘리자베스 블렉웰(Elizabeth Blackwell)과의 만남을 통해 '의사'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녀는 일부 의과대학에 지원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앤더슨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미들섹스 병원(Middlesex Hospital)에 간호사로 취업한 뒤 의학 수업의 청강을 시도했으나, 남학생들의 반발에 부딪쳐 강의실 출입을 금지 당하게 된다./그러나 얼마 뒤, 앤더슨은 <영국 약사 협회>(the British Society of Apothecaries) 정관에 여성 시험 신청 금지 조항이 누락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1865년 <영국 약사 협회> 시험에 응시 합격함으로써 이 협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입회됨과 이 동시에 '의사' 자격증을 받게 되었다. 영국 의학협회는 '앤더슨' 사건 이후 곧바로 정관을 변경하여 여성의 의학 직종 종사를 금지했다.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앤더슨은 런던에서의 개업의 생활을 중단하고, '의학 박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모든 영국 의과 대학이 그녀의 입학을 거부하자, 그녀는 프랑스 '파리대학'으로 건너가 1870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한성-제물포 전신 개통(1885.09.28)
1885년 오늘 한성과 제물포, 즉 지금의 서울과 인천 사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신시설이 개통되었다. 송신 측에는 전신키·송신전지 등의 송신장치를 설치하고 수신 측에는 유극계전기·음향기 등의 수신장치를 설치하는 가장 간단한 직류전신방식이었다./현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세워진 한성전보총국에서 전보 업무를 취급했다. 17년 뒤인 1902년 3월 20일에는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화가 개통되고 그해 6월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면서 시내전화업무가 시작되었다./그러나 1905년 4월 한·일통신협정의 체결로 통신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 한성-제물포 전신 개통(1885)
1885년 오늘 한성과 제물포, 즉 지금의 서울과 인천 사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신시설이 개통된다. /송신 측에는 전신키·송신전지 등의 송신장치를 설치하고 수신 측에는 유극계전기·음향기 등의 수신장치를 설치하는 가장 간단한 직류전신방식이었다. /현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세워진 한성전보총국에서 전보 업무를 취급했다.
17년 뒤인 1902년 3월 20일에는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화가 개통되고 그해 6월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면서 시내전화업무가 시작된다. /그러나 1905년 4월 한·일통신협정의 체결로 통신권을 일본에게 빼앗긴다.
■파스퇴르 세상 떠남(1895.09.28)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생물학자였던 루이 파스퇴르가 1895년 오늘 세상을 떠났다./그는 부패나 발효가 미생물의 작용임을 설명해 자연 발생설을 부인하고, 저온 살균법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 광견병ㆍ탄저병의 예방 접종법도 발견했다.
■1895년 화폐속의 인물 파스퇴르 (프랑스) 세상떠남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 12. 27 ~ 1895. 9. 28 프랑스 5프랑(1967년 발행)/프랑스 화학자·미생물학자
쥐라주 돌 출생.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물리·화학을 공부한 뒤 1849년 스트라스부르대학 화학교수가 되었다. 타르타르산에 의한 광회전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분자 내 원자 배열의 문제에 도달, 화학조성·결정구조·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J.H. 반트호프 입체화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때 생물이 입체이성질(立體異性質)의 한쪽만을 이용, 합성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주의 <비대칭성>을 강조하였다. 1854년 릴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857년 젖산균에 의한 젖산 발효를, 1860년 효모에 의한 알코올 발효를 증명하여 발효의 의의를 확립하였다. 1861년 비등점에서 공기를 단절한 플라스크 안에서는 물질이 썩지 않음을 증명함으로써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하였다. 1862년 아세트산의 발효와 알코올에서 아세트산으로 변하는 것을 연구하여 식초의 새로운 공업적 제법을 확립하였다. 1865년 포도주의 산패(酸敗) 원인균을 연구하여 약 60℃의 저온살균법을 고안함으로써 프랑스의 포도주제조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 J.B.A. 뒤마로부터 누에의 미립자병(微粒子病)과 연화병(軟化病)에 관한 연구를 의뢰받고 연구한 결과 감염된 병충의 알에 의한 전염예방법 등을 발표하여 양잠업의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1867년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연구를 계속하여 1877년 탄저병(炭疽病)·패혈증(敗血症)·산욕열(産褥熱) 등의 병원체를 밝혀냈다. 이 연구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외과의사 J. 리스터는 외과수술에서 방부법(防腐法)의 응용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879년 닭콜레라의 독성을 약화시킨 배양균을 닭에게 주사하면 면역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백신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을 일반화하였다. 1881년에는 양(羊)의 면역실험에 성공하였고, 탄저병 면역에 관한 공개실험을 하여 그 유효성을 실증하였다. 1882년 프랑스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그의 최대 공헌은 광견병백신 제조의 성공으로서, 1885년 광견에 물린 소년에게 처음으로 백신을 접종, 생명을 구하였다. 1888년 파스퇴르연구소, 초대소장에 취임하였다.
■에밀 졸라 타계(1902.09.28)
1902년 9월 28일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에밀 졸라가 타계했다./그의 대표작 <루공 마카르 Rougon-Macquart> 총서는 20권의 연작소설로, <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에는 고급 창녀의 인생을 다룬 <나나 Nana>(1880)와 광산촌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상을 폭로한 <제르미날 Germinal>(1885)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루공 마카르> 총서 제1권인 <목로주점>은 자연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실험소설론 Le Roman experimental>(1880)에서 소설가는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등장인물에 대해 실험이나 임상실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불행과 범죄의 근원인 인간의 허약함과 사악함에 대해 귀중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했다. 또한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 때 유명한 평론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발표해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졸라는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에밀 졸라 타계1902. 9. 28
졸라, Edouard Manet가 1868년에 그린 유화 <Portrait d'Emile Zola>(부분),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1902년 9월 28일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에밀 졸라가 타계했다. 그의 대표작 <루공 마카르 Rougon-Macquart> 총서는 20권의 연작소설로, <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에는 고급 창녀의 인생을 다룬 <나나 Nana>(1880)와 광산촌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상을 폭로한 <제르미날 Germinal>(1885)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루공 마카르> 총서 제1권인 <목로주점>은 자연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실험소설론 Le Roman experimental>(1880)에서 소설가는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등장인물에 대해 실험이나 임상실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불행과 범죄의 근원인 인간의 허약함과 사악함에 대해 귀중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했다. 또한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 때 유명한 평론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발표해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졸라는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1910년 화폐속의 인물 마카파갈(필리핀) 출생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1910. 9. 28. ∼ 1997. 4. 21.
필리핀 200Piso(2002발행) 정치가, 대통령(1961∼65년)
판팡가주 출생. 1949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하원 외교위원장을 지냈으며, 1951년 대일강화회의 대표를 거쳐 국제연합총회 대표도 역임하였다. 1961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가르시아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의 강화를 주장하는 등 반공친미 정책을 수립하였으나, 1965년 선거에서 마르코스에게 패하였다. 1971년 6월부터 제헌회의 의장직에 있으면서 신헌법 초안을 마련하였으며, 1979년 자유국민연합을 조직하였다. 2001년 에스트라다가 부패혐의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부통령이던 마카파갈 의 딸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요로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필리핀 최초의 부녀대통령이 탄생했다.
■유관순 순국(1920.09.28)
3ㆍ1 만세운동(1919년 3월 1일)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1920년 오늘 19세의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일제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 안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했던 유관순 열사는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 3ㆍ1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일제가 학교 문을 닫자 만세 시위를 지휘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갔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앞장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주어졌다.
▶ 스페인 우익 반군, 톨레도 점령(1936)
프랑코 장군의 지휘 하에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내전을 일으킨 우익 반군들! /내전을 일으킨 지 두 달 만인 1936년 오늘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70km 떨어진 도시 '톨레도'를 점령한다. /프랑코 장군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원조를 받고 교회의 지지를 받았다./내전은 이후 1939년까지 2년 반동안 계속된다. /프랑코 장군은 1939년 1월 26일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3월 28일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내전을 끝내고 정권을 장악한다.
프랑코는 팔랑헤당의 1당 독재에 의한 파시즘 국가를 수립한다. /1966년 종신주석의 지위를 확립해 통치하다 1975년 11월 20일 사망한다.
■9.28 서울 수복(1950.09.28)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함락됐다.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던 중 힘을 되찾은 국군의 반격과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상황을 맞기 시작했다./9월 15일 이른 새벽,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다음 날부터 수도 서울을 되찾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당시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적은 인민군 제9사단 등 2만여 명으로 강력한 방어망을 갖췄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27일 서울에서 물러나고 만다. 28일 아군은 서울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던 적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날 서울 시내에는 ‘수도 완전 탈환’이라는 제목의 신문 호외가 뿌려졌다. 적에게 수도 서울을 빼앗긴 지 90일 만이었다.
▶ 9·28 서울 수복(1950)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연합군이 1950년 오늘 서울을 수복한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된 지 석 달 만이다. /한,미 연합군은 앞서 25일 오후부터 서울 시가전에 돌입해 26일을 고비로 북한군의 저항을 꺾었다./이튿날인 27일 오전 6시 10분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이어 9월 28일 마침내 수도 서울이 90일 만에 완전히 수복됐다. /서울 수복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의사당에서 수도 탈환식이 거행됐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60년 7월 27일 장면 부통령 암살미수 저격사건의 배후자 이익흥 등 6명의 피고인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1956년 9월 28일 오후2시38분경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원 김상붕이 쏜 총탄에 맞아 왼손을 다쳤다. 경찰은 사건의 배후인물로 민주당 서울 성동지구당 간부 최훈을 체포했으나 그 이상의 배후는 밝혀내지 못했다.그후 1957년 1월 1일 최훈의 부인이 前성동경찰서 사찰주임 이덕신을 배후인물로 지목하자 검찰은 이덕신도 구속했다. 최훈은 법정에서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로 생각한다"고 폭로했으나 김종원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국회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장영복 등 경찰간부가 배후조종한 사실을 탐지해냈으나 이 또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4년 뒤 4·19혁명이 성공하자 김종원은 법정에 불려나왔고 그는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는 김종원에게, 김은 장역복에게, 장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는 이덕신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56년 9월 28일 오후2시38분경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원 김상붕이 쏜 총탄에 맞아 왼손을 다쳤다. 경찰은 사건의 배후인물로 민주당 서울 성동지구당 간부 최훈을 체포했으나 그 이상의 배후는 밝혀내지 못했다./그후 1957년 1월 1일 최훈의 부인이 前성동경찰서 사찰주임 이덕신을 배후인물로 지목하자 검찰은 이덕신도 구속했다. 최훈은 법정에서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로 생각한다"고 폭로했으나 김종원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국회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장영복 등 경찰간부가 배후조종한 사실을 탐지해냈으나 이 또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4년 뒤 4·19혁명이 성공하자 김종원은 법정에 불려나왔고 그는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는 김종원에게, 김은 장역복에게, 장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는 이덕신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
▶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사망(1978)
제263대 교황, 바오로 1세가 1978년 오늘 서거한다./교황으로 선출된 지 33일 만의 일이다./그의 시신은 사망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방부처리됐다./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서두른 방부처리와 관련해 독살설 등 많은 음모론이 떠돌았지만 규명되지 못했다. //교황의 사인은 심장발작이나 폐색전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교구장을 지낸 바오로 1세는 바로 전달인 8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의 후임으로 선출됐었다. /그는 즉위와 함께 온화한 이미지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사로잡지만 교황 대관식을 치르지 않는 파격도 보여 줬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망명지 하와이서 사망(1989.09.28)
1989년 9월 28일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망명지 하와이에서 72세로 사망했다. 마닐라에서 태어나 필리핀대 법률학을 공부한 마르코스는 상-하원을 거쳐 자유당총재와 상원의장을 지냈다. 1965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돼 21년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장기집권했다./특히, 1972년에는 3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폐지하고 대통령에게 입법, 사법, 행정권을 집중시키는 헌법을 발표했으며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하기도 했다. 마르코스의 아들 봉봉은 대통령 보좌관으로 재직했고, 그의 아내 이멜다도 마닐라의 시장으로 일할 정도로 친족정치가 횡행했다. 1986년의 대통령 부정선거가 문제가 돼 하와이로 망명했다./마르코스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 첫째,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을 하려했던 것과 둘째, 박정희가 민주화 운동을 반강제적인 분위기에서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로 정당화했듯이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국민투표라는 가식적인 절차로 정당화하려 한 점이 닮았다. 또 마르코스는 항일운동을 발판으로 대통령이 되고 부정선거로 하야해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는 이승만과도 비슷하다.
■[1989년]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망명지 하와이서 사망
21년에 걸쳐 독재정치를 펼쳤던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1989년 9월 28일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망명지 하와이에서 72세로 사망했다. 마닐라에서 태어나 필리핀대 법률학을 공부한 마르코스는 상-하원을 거쳐 자유당총재와 상원의장을 지냈다. 1965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돼 21년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장기집권했다./특히, 1972년에는 3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폐지하고 대통령에게 입법, 사법, 행정권을 집중시키는 헌법을 발표했으며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하기도 했다. 마르코스의 아들 봉봉은 대통령 보좌관으로 재직했고, 그의 아내 이멜다도 마닐라의 시장으로 일할 정도로 친족정치가 횡행했다. 1986년의 대통령 부정선거가 문제가 돼 하와이로 망명했다./마르코스는 박정희 前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 첫째,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을 하려했던 것과 둘째, 박정희가 민주화 운동을 반강제적인 분위기에서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로 정당화했듯이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국민투표라는 가식적인 절차로 정당화하려 한 점이 닮았다. 또 마르코스는 항일운동을 발판으로 대통령이 되고 부정선거로 하야해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는 이승만과도 비슷하다.
▶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 사망(1989)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1989년 오늘 신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이 때 그의 나이 일흔둘! /장례식은 부인 이멜다와 아들을 비롯한 가족과 수십 명의 추종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쓸쓸하게 치러졌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86년까지 20년 동안 필리핀을 철권통치했다. 부인 이멜다가 수도 마닐라의 시장을 지내고 장남이 대통령 보좌관으로 재직하는 등 족벌정치도 일삼았다. /1986년 2월 대선 직후 국민의 지탄에 밀려 하와이로 탈출했다.
<참고> 조선, 부산에 두모진해관 설치(1878.09.28)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09/e2007092717165963820.htm
<참고> 제1인터내셔널 창립(1864.09.28)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2371&yy=2007
<참고> '백경' 작가 허먼 멜빌 사망(1897.09.28)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052&yy=2006
<참고>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사망(1989.09.28)
http://www.donga.com/fbin/moeum?n=dstory$c_134&a=v&l=1&id=200709280077이 게시물을..
■오늘의 관심뉴스는 내용이 좀 많지만 꼭 알아야 될 내용인 것 같아 알려 드립니다. 장애인 도우미 은행 정말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인데 이제서야 설립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그동안 혜택을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곳곳에 이런 은행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오-늘-의--관-심-뉴-스-------------------------
장애인 위한 도우미은행 아시나요? [파이미디어 2007.09.27 14:14:03]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여러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하고 지내야 했던 장애인과 가족들을 위한 반가운 소식. 고양시장애인복지관은 장애인들의 지역사회 통합과 사회참여, 기본권을 보장하고 장애인과 보호자들의 다양한 사회참여를 돕고 정서적 안정을 지지하기 위해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중증장애인 도우미뱅크 서비스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씨의 딸입니다./급작스런 뇌출혈로 중증장애를 갖게 된 어머니는 주위의 도움 없이는 거동조차 힘듭니다. 자식들이 있다지만 모두 각자의 가정과 직장 생활 때문에 어머니 곁에서 돌보아드릴 시간이 없어 걱정스러운 마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 며느리와 같이 생활해도 모두 직장생활로 가사는 엉망인 채로 겨우 생활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우미뱅크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돕지 못하고 돌보아 드리지 못하는 심정 때문에 어머니를 뵐 때마다 가슴 아파해야 했는데 이제는 친정에 와도 깔끔하게 정돈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생활하시는 부모님을 뵈니 참 좋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도우미활동가를 무척이나 좋아하시고 하는 일에 구분을 안 하고 밑반찬도 준비해 놓고 가시니까, 딸로써는 안심도 되고 도우미뱅크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다소나마 안정을 찾게 되어 다행이고 수년간 지체장애인으로 생활하시니 외출이나 산책 등에 있어 누군가와 동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터라 도우미뱅크를 이용하고부터는 산책도 하며 말벗도 하며 우선 적으로 어머니를 돌보지 못하는 가족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더욱더 발전하여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도우미 뱅크가 되길 바랍니다. 장애인과 가족들의 아름다운 이웃, 도우미뱅크 /장애인과 가족들의 다양한 사회참여를 돕고 장애인 가정의 정서적 안정을 지지하며 신체적, 정신적 이유로 원활한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이 어려운 장애인에게 각 장애 영역별 특성에 맞춘 지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재활서비스 지원방향과 계획을 수립하고 자립생활과 사회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해 2007년 4월 도우미뱅크 문을 열었다. /도우미뱅크는 지역사회 장애인과 가족들들 위한 고양시의 특화된 복지서비스로 고양시거주 중증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활동보조, 가정 내 보호지원, 치료교육지원, 간병지원, 위탁보호 등을 지원하고 있다.도우미뱅크를 이용하려면 우선 고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장애인 또는 가족들이 복지관에 내방하거나 전화로 접수 하면 전문 상담자의 상담을 통해 필요사항을 파악한 뒤 전문가들과의 사례회의를 통해 지원 계획 및 자원 연계가 이루어져 서비스가 제공된다. 이용료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 또는 가족은 전체 도우미 활동비 중 20%를 부담하고 나머지 80%는 시에서 부담한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권자 및 차상위계층의 경우 시 부담을 100%로 이용할 수 있다. /아직 도우미뱅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아 지역 장애인과 가족들의 신청이 이어져 벌써 도우미뱅크를 이용하는 이용자는 200여명이 등록되어 있으며 30여명의 도우미가 가족처럼 활동하고 있다. /프로그램 시작 4개월, 아직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름처럼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적절히 도와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은행이 되어 고양시 8천여 중증장애인 모두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지만 ‘찾아가는 서비스, 맞춤형 서비스’를 통해 욕구를 해결하며 사회참여와 기본권을 보장하는 또 하나의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사회복지 서비스가 되는 도우미뱅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고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 도우미뱅크 031-924-2516~7 www.gydoumi.or.kr
(자료제공 = 홀트아동복지회, 글 = 조은용 사회복지사/고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 [정리 = 파이뉴스 백민호 기자 따뜻한 사람들의 희망연대 '파이뉴스' 제보 및 보도자료 pimedia.co.kr <저작권자 ⓒ 파이미디어 파이뉴스>
■오늘의 역사 (9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