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유가 바라보는 세상]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5주년을 맞아
무쏠리니 시신은 푸줏간 고기처럼…2차대전 세 악당의 최후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5주년이 되는 해다. 6년 간에 걸친 이 전쟁은 남아메리카를 제외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었고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을 주축으로 한 3국 동맹과 미국, 영국, 소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들과의 한판 대결이었다. 이 전쟁을 일으킨 세 나라의 독재자들이었던 세 악당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 도오조 히데끼(東條英機)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죽어갔을까? 이들 세 악당은 모두 1880년대에 태어나 둘은 1945년에, 하나는 1948년에 죽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쏠리니는 이틀 간격으로 죽었는데, 둘 다 딸 같은 나이의 정부(情婦)들과 함께 죽었다. 히틀러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기 1주일 전인 1945년 4월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 56세, 자살 하루 전에 결혼식을 올린 에바는 33세였다. 불과 이틀 전 이탈리아에서는 독재자 무쏠리니와 그의 애첩 클라라 페타치가 공산당 계열의 시민군 손에 잡혀 총살당했다. 그때 무쏠리니는 64세였고 애첩 페타치는 우연히도 에바 브라운과 똑같은 33세였다. 무쏠리니가 시민들 손에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자기도 그런 수모를 피하기 어렵겠다고 판단,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당시 베를린의 한 지하 벙커에서 측근 및 비서, 경호원 몇 명과 함께 숨어 있었다. 서쪽에서는 미군과 영국군이 수도 베를린을 향해 쳐들어오고 동쪽에서는 쏘련군이 역시 베를린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자 히틀러는 죽음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9개월 전 독일군 장교들의 암살 기도를 간신히 모면한 후에 히틀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전선 지휘관들에게 무리한 작전명령을 하달했으나 독일군은 패주를 계속했다. 마침내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애인 에바와 지하 벙커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다음날 신부와 동반 자살한다. 에바 브라운은 17세 때 40세의 정치인(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 즉 NAZI당 당수) 히틀러를 만났다. 그녀는 당시 히틀러 전속 사진사의 사진 모델로 일하고 있다가 히틀러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히틀러 부부는 괴벨스 선전장관과 보어만 비서실장, 슈페어 건설장관 등 최측근들과 경호원 및 비서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 방에서 청산가리가 든 알약을 부인 에바와 나누어 먹는다. 그는 알약을 입에 넣은 직후 미리 준비한 권총을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12년 집권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몇 초 후 부인도 쓰러져 숨을 거둔다. 히틀러는 죽기 전에 부하들에게 시신을 지상으로 옮겨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시신이 불태워지지 않고 쏘련군이 가지고 갔다가 1970년에 완전히 다 없앴다는 설도 있으나, 히틀러가 자기 시신을 불태우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1937년의 에바 브라운(1912~1945).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2011년 3월 10일 온라인에 공개한 사진이다. 오른쪽 위는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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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부부가 자살한 다음 날 그의 심복이자 선전선동의 귀재라 불렸던 요제프 괴벨스 장관 가족도 같은 장소에서 집단 자살한다. 히틀러와 함께 지하벙커에서 피신생활을 하고 있던 괴벨스 부부에게는 5~13세 자녀 1남5녀가 있었는데, 부인이 자녀들에게 청산가리가 든 초컬랫을 취침 전 먹여 모두 침대에서 죽게 했다. 아이들의 죽음을 확인한 괴벨스는 아내를 먼저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기도 쏘아 자살했다. 괴벨스 부인은 오래 전 이혼한 전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은 당시 군대에 나가 있었다. 괴벨스는 자기 아이들에게 모두 H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히틀러(Hitler) 신봉자였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그 집안 전통이었다는 설도 있다. 지하벙커에는 세 명의 여성비서들도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히틀러가 자살한 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벙커를 나서기 전 화장품으로 얼굴에 검은 점을 찍어서 마치 천연두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쏘련군은 독일 여성들을 보면 무차별 성폭행을 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 북위38도선 북쪽에 들어온 쏘련군도 북한 여성들을 성폭행한 일이 많아 남자들이 자경대를 만들어 우리 여성들을 보호한 적도 있다. 가장 비참한 무쏠리니의 최후 1922년부터 21년간 이탈리아를 통치한 무쏠리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 노동운동가였다. 그의 경력은 히틀러와 상당히 비슷하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그 역시 히틀러처럼 하사 계급으로 제대하고 정계에 뛰어든다. 웅변조의 연설 솜씨로 곧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홰씨스트(Fascist) 당을 창건하여 1922년 수상이 된다. 무쏠리니의 Fascism(홰씨즘)도 히틀러의 Nazism(나치즘)과 성격이 비슷한 국가사회주의 독재였다. 무쏠리니는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한다며 아프리카 이집트를 침공하려다 실패하고 그 옆에 있는 약소국 이디오피아를 점령한다. 1940년에는 히틀러와 군사동맹조약도 맺는다. 1937년 만주침략을 단행한 일본도 1939년 독일과 동맹국가가 되었다.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끼어들게 되자 무쏠리니의 이탈리아군대는 지중해 연안전선에서 미군과 영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고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다. 이탈리아를 독일편으로 끌어들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정적들은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이 임박해오자 무쏠리니를 한 고성(古城)에 감금하고 수상직을 박탈한다. 그러나 독일군 특공대가 그를 구출하여 독일점령 하 북이탈리아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한다. 1944년 여름 미군과 영국군의 유럽대륙 상륙으로 독일이 본국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무쏠리니도 북이탈리아에서 철수하는 독일군 대열에 끼어든다. 그는 일단 알프스산맥을 넘어 중립국 스위스로 들어가 거기서 비행기로 스페인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독일군 사병 외투를 얻어 입고 독일군 트럭 한 구석에 앉아 있었으나 반(反)무쏠리니 공산당 계열 시민군에게 발각되었다. 무쏠리니를 따라 해외로 도주하려던 애첩 클라라 페타치도 잡혔다. 그녀의 남동생은 도망치다가 총살되었다.
시민군이 총살하고 주유소 마당에 거꾸로 매단 무쏠리니와 애첩의 시신(왼쪽에서 두번째와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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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은 무쏠리니와 그의 애첩을 1945년 4월28일 북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코모 호수가로 끌고 가 총살한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 애첩은 33세였다. 시민군은 그들의 시신을 밀라노 시내로 싣고 가 한 주유소 앞마당에 내려놓는다. 무쏠리니의 독재 하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무쏠리니와 페타치 그리고 다른 무쏠리니 부하들의 시신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막대기로 구타하고 침을 뱉었다. 이 장면은 사진으로 찍혀 지금도 몇 장 남아 있다.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무쏠리니 유해는 가매장 되었다가 13년 후인 1957년 그의 조강지처가 거두어 가 가족묘지에 묻었다 한다. 권총자살 실패한 도오조 히데끼에게 미 군의관이 의치 만들어주고 장난 글 새겨 겁도 없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도오조 히데끼는 토오쿄에서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군인으로 살다 죽었다.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도오조는 승승장구, 만주에 진출한 관동군 사령관을 거쳐 1940년 7월 군부대신, 다음해 10월에는 총리대신(수상)직까지 겸하고 나중에는 외무대신, 내무대신, 상공대신, 교육대신까지도 겸하여 사실상 군국주의 일본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1941년 12월7일(하와이 시각) 도오조는 미국 해군함대가 모여있는 하와이의 퍼얼 하버(진주만)를 일본 항공모함 적재 항공기 350여대를 동원, 일요일 아침에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함으로써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진주만 공격 이야기는 누구나 대개 다 아는 것이므로 여기선 생략하고 도오조가 어떻게 죽어갔는가만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과의 3년간의 전쟁에 지친 일본 황실과 온건파는 1944년 7월22일 강경파 도오조 수상을 3년 만에 물러나게 한다. 1년 후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미국 원자탄을 얻어 맞고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한다. 토오쿄 시내 다이이치생명보험 빌딩 6층에 자리잡은 태평양지구 미군 총사령관 겸 연합군 최고사령관 매카앗서(MacArthur) 장군은 도오조 히데끼 전 수상을 포함한 일본 군부와 민간 정치인 등 총 40명을 전범(전쟁범죄인)으로 낙인찍고 체포를 명령한다. 미 육군소령 한 명이 헌병 3명과 OSS(후에 CIA)요원 2명을 데리고 1945년 9월 8일 토오쿄 세다가야구에 있던 도오조 자택에 도착하자 도오조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미군과 첩보요원들이 총소리를 듣고 그의 방에 들어가 보니 그는 가슴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누군가가 심장이 있는 위치에 숯으로 원을 그려놓았고 탄환은 그 원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총알은 그의 심장 대신 위에 박혀버렸다. 육군대장이 권총자살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쩌면 그는 동정심을 노리고 자살 쑈를 벌인 것인지도 모른다.
권총 자살에 실패하고 쓰러진 도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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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조는 미군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그는 치아가 나빠 이가 7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미군 치과의사가 의치까지 만들어주었다는데, 그 치과의사는 의치 안쪽에다 모올스 부호(Morse code)로 Remember Pearl Harbor(진주만을 잊지 말라)라는 글을 새겨놓았다고 한다. 물론 도오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군의관의 이 장난이 미군 방송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알려지자 군의관은 도오조 입에서 그 의치를 꺼내 장난삼아 새긴 부호를 갈아서 지웠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진주만 기습 50주년인 1995년 미국 TIME과 LIFE 잡지에 의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년 반 동안의 수사와 재판을 거쳐 도오조는 1948년 11월12일 다른 6명과 함께 A급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모든 과오를 인정하고 원자탄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봐서라도 일본 국민에게 동정과 관대함을 보여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64회 생일 1주 전이었다, 사형집행 전 그는 그의 감방 당번인 미군 헌병 일등병에게 그의 약식훈장(가슴에 다는 직사각형 리본)들을 전부 선물로 주었는데, 그 훈장들은 지금 훌로리다 주 펜사콜라에 있는 미 해군비행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도오조 히데끼의 유해(화장된 가루)의 절반은 가족묘지에 묻혀있고 나머지 반은 토오쿄의 야수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와 함께 처형된 다른 6명의 유해 일부도 야수쿠니에 있다. 그런데 현 아베 수상을 포함한 역대 일본 수상 대부분이 야수쿠니를 찾아가 이 전범들을 애국자로 칭송하는 일이 벌어져 다른 나라들 특히 한국과 중국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도오조는 3남4녀를 두었는데, 차남은 전쟁 전과 후에도 미쓰비시 중공업 회장을 지냈고, 막내아들은 자위대 공군소장, 사위 한 명은 자위대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장남의 딸은 1992년 할아버지를 미화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75주년에 워싱턴에서 조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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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