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전쟁에서도정보전이 펼쳐졌다 (하)
“백성이 곧 하늘” 백제 민심을 이반시켜라
고구려 조정은 백제 왕실·백성 간 민심 흐리기 ‘역점’
승려 도림 첩자로 잠입 500년 수도 한성 ‘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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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 승려 간첩 도림을 활용 백제의 민심을 이반
춥고 좁은 산악지대인 압록강 유역에서 따뜻하고 경제활동이 원활한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수도를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비옥한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당시 백제의 수도이던 한성(漢城)을 공략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승려 간첩 도림(道琳)의 활약으로 백제 수도 한성을 공략할 여건을 조성하고, 기회를 포착한 고구려는 공격을 실시해 한강유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지휘해 한성을 포위하자,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했다. 고구려가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고, 바람을 이용해 화공작전(火攻作戰)으로 한성의 성문을 불태우니, 성안의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 항복하려는 자가 발생하는 상태였다. 개로왕은 곤궁해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騎兵) 수십을 데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군사가 쫓아가 사로잡았다.
이에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해 백제에서 간첩행위를 할 만한 자를 구했는데, 승려 도림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어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장수왕이 기뻐하며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했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것처럼 백제로 들어갔다. 이 무렵 백제 개로왕은 바둑을 좋아했는데 도림이 개로왕에게 자신이 바둑을 배워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곁에서 가르쳐 주겠다고 하며 접근했다. 개로왕은 도림을 불러서 바둑을 두어 보니 국수(國手)인지라, 마침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했다.
하루는 도림이 왕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신은 다른 나라의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텁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오직 한 가지 바둑의 기술로써 보답했을 뿐 다른 도움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데 왕의 뜻이 어떠하신지요?”라 하자, 개로왕이 “말해 보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내가 바라는 바이다”라고 대답하자, 도림이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 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한 업적으로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니 백제의 성곽은 수선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땅에 임시로 매장돼 있고, 백성의 집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신은 대왕을 위해 이와 같은 상태를 찬성할 수 없습니다.”
백제 왕이 이를 따라,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해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궁실과 누각과 대사(臺?)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한강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석곽의 무덤을 만들어 부왕의 묘를 다시 만들고 한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의 창고가 비고, 백성이 곤궁해져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두는 것보다 심했다.
이에 도림이 백제에서 도망쳐 고구려로 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에게 내주었다. 개로왕이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사직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하지 못하니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이어라”라고 해 왕자 문주(文周)는 남쪽으로 갔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던 자들인데…개로왕을 포박해 아차산 아래로 보내 죽였고, 고구려는 남녀 포로 8000명을 잡아서 돌아갔다.
위 내용은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 기능해온 오늘의 서울인 한성이 고구려에 점령당하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고구려는 이보다 약 70여 년 앞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시기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해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적은 있으나, 이곳을 점령해 통치하지는 않았는데, 이 전쟁을 통해 한성을 완전히 복속시켜 지배했다.
군사 작전에 앞서, 먼저 고구려 조정에서는 백제 왕실과 백성의 틈을 벌려 민심이 이반해야 향후 고구려군의 군사 공격 시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우리 조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 이 경우 백제 백성의 민심을 국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에 초점을 두고 고구려에서 정보전을 구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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